"대구와 부산을 방문한 결과 국내 정치에 지역주의가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다른 이념을 발전시켜왔지만 경상도 유권자들은 정책의 차이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한국 정치인들은 지역구 유권자를 대변하는 정책을 입안할 동기가 별로 없다."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 대사가 2008년 12월 23일 본국에 보낸 <영남: 한나라당에 대한 충성심과 지역주의의 여전한 군림>이라는 제목의 한국 정세분석 전문 중 일부다.
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이 전문은 미 대사관 직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지지도를 측정하기 위해 영남지역을 둘러본 뒤 느낀 점이 정리돼 있다.
2011년 9월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안철수 쓰나미'에도 과연 영남 주민들은 이같은 한나라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유지할까, 아니면 대변화의 길을 걸을까?.
울산지역 한나라당, 진보민주정당 관계자, 주민 견해, 현장 탐방 등을 통해 이 문제를 들여다봤다.
"한나라당 의원들, 살갑지 않나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 대사의 분석이 정확했다고 볼 때, 영남지역 주민들은 왜 이처럼 한나라당에 집착을 보이는 걸까.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울산에서 그 예를 들어보자. 울산은 지난 1962년 공업특정지구로 지정됐다. 그후 50여년간 인구가 113만 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전국에서 최대 산업단지로 성장하자 취업 인구가 모여 들었다. 이런 인구 구성 탓에 울산을 '전국 여론 바로미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울산은 19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도시 혹은 진보정치 일번지로 불렸다. 하지만 지역 구성원들 성향의 주를 이룬 건 역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정규직 노동자의 보수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울산도 영남권의 정서와 비슷하다.
노동자들이 대거 밀집한 북구와 동구는 다소 약하지만, 그외 지역은 지난 십수년간 한나라당 후보가 나오면 60% 이상의 지지율을 얻어 당선됐다. 지방자치단체장이든 국회의원이든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작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공식이 성립해 왔다. 왜 이런 현상이 지속돼 왔을까.
울산을 비롯한 영남권에서 상존해 온 순환 공식은 '한나라당 정치인 국회의원·지자체장·지방의원 석권-예산권 장악-우호단체에 갖가지 혜택-차기 선거에서 한나라당 정치인 선택'이다.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주요 지지 기반은 지자체의 보조금 혜택을 받는 수백 개에 달하는 소위 관변단체다. 지역 구성인들은 대부분 이들 관변단체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웃이던, 학연, 지연 등 어떤 식으로든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진보민주진영이 정책(무상급시, 반값등록금 등)을 내걸고 지역 곳곳을 파고 들지만 이 끈끈한 연결고리를 끊기는 역부족이다.
우선 이들 관변단체의 수장들이 거의 보수 성향을 가지면서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들 단체 구성원들에 따르면 우선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관변단체 수장과 함께 주민들을 살갑게 대한다. 각종 행사나 모임에서 이들이 주민들과 부대끼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자체 예산, 혹은 지자체 예산 일부를 보조받아 치르는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에서 한나라당 정치인들이 이런 살가움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마치 주민을 형제 자매 대하듯 함께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치면서 어울린다. 행사를 마치며 나오는 주민들이 '역시 한나라당이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현실에 부닥치는 여러 문제들을 제쳐두고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면면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한여름 땡볕에서 혹은 한겨울 찬 바람속에서 '무상급식,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진보진영 정치인들의 정책적 구호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우리가 아무리 발품을 팔아 정책을 외쳐도 시민에게 크게 어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갈수록 팍팍해지는 서민 가계에다, 한나라당이 스스로 어기는 친서민 정책 사례가 늘어나자 이같은 기류에도 변화가 감지됐다. 지난해 6.2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선거에서 이상기류는 표로 나타나기도 했다.
"주민들 모이니 한나라당 욕밖에 안하더라"
지금껏 한나라당 정치의 특성은 '보스정치'를 해왔다는 데 있다.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시의원, 구의원 공천권을 사실상 발휘한다는 것은 이제 다 알려질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울산으로 올 때 지방의원이 눈도장을 찍으려 손살같이 공항으로 달려가 모셨다는 이야기가 지역에서 화자된 것은 이제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지자체장의 성향에 있다. 국회의원 못지 않게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자체장은 예산과 인사권을 거머쥐면서 관련 단체 등에게 자신이 속한 한나라당 성향을 독려하기도 한다. 시민단체가 주민예산참여제를 부르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울산지역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한나라당 보스정치에 반발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기자회견을 하며 대놓고 보스정치를 비판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친 한나라당 성향을 가졌던 정치인들이 근래 들어 무상급식 찬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최근 불어닥친 안철수 열풍이 울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울산 중구 지역 한 관변단체 인사는 "추석에 동네사람들이 모였는데, 화두는 한나라당을 욕하는 것이었다"며 "막상 내년에 자녀 대학 등록금을 내려니 벅찬 주민이 이를 주도하더라"고 말했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추석 때 지역을 둘러보니 민심이 급격히 변화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며 "하지만 이같은 변한 민심이 진보민주진영으로 향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올바른 정책을 주민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패턴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그 방법이 옳든 그르든 한나라당이 주민들을 살갑게 대해왔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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