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입니다. 두 아들과 지리산으로 향합니다. 구절양장 휘어진 도로를 한참 올랐습니다. 자동차도 힘든지 숨을 헐떡입니다. 반대편 내려가는 길에 표지판이 서 있는데 내용이 심각합니다.
'브레이크 파열', '기어 1단 사용'이라는 엄한 글과 뒤집힌 자동차 사진이 보입니다. 운전대에 힘이 들어갑니다. 전남 구례 성삼재에 닿았습니다. 가을바람과 고즈넉한 산행에 대한 기대는 주차장 모습을 보고 깨끗이 접었습니다.
주차장 밖 도로까지 자동차가 점령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의 품, 지리산을 찾아 많이들 모였습니다. 철없이 떠날 줄 모르는 늦더위가 목을 타고 흐릅니다. 그래도 모두들 가벼운 걸음에 표정은 밝습니다.
지리산이 사람 마음을 넉넉하게 만듭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봅니다. 그곳은 지금 무슨 색깔 옷을 입었을까요? 기대 품은 걸음이 빨라집니다. 우거진 길을 아들과 편히 걷자니 노고단 오는 길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엔 이곳 오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했습니다. 구례 버스터미널까지 접근하는 일도 고생이지만 화엄사에 오르는 길이 정말 힘들었지요. 요즘도 그 길 택해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지리산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몸은 축 늘어졌다일명 '죽음의 1코스'로 불리었던 산길을 기다시피 오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0년도 한참 지난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뜻 맞는 몇 명이 고생길을 나섰지요. 여수에서 순천을 지나 구례에 닿았습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탔는지 기억도 없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이 버스에서 저 버스로 수없이 옮긴 덕분에 구례 버스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지리산은 코빼기도 안 뵈는데 벌써 몸이 축 늘어졌습니다.
고통이 이쯤해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한 고비가 더 남았네요. 화엄사행 시골버스를 타야 합니다. 터미널에서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탔습니다. 털컹거리는 시골버스 뒤로 뿌연 먼지가 길손님 놀리듯 이리저리 춤을 춥니다.
그 모습을 힘없이 바라보다 화엄사에 닿았습니다. 시간은 점심때를 가리킵니다. 배고픈 청춘들 배꼽시계는 미련하게도 정확합니다. 대충 낮밥을 챙겨먹고 화엄사 옆을 돌아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초주검 돼 오른 산,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며 지나갑니다시작은 완만한 산길입니다. 작은 도랑을 건넙니다. 두런두런 앞 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가파른 길을 몇 차례 오른 뒤엔 이번 산행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시작합니다. 지리산에 왜 가야 하는지...
대답 없는 질문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주검이 돼 산을 오릅니다. 땀범벅으로 산을 오른 지 한참, 노고단이 코앞에 닿을 즈음 갑자기 탁 트인 큰길이 나옵니다. 황당했습니다. 지리산에 자동차 길이라니 입이 벌어집니다.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웬 자동차가 휭하고 지나가더군요. 헛것을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봅니다. 뿌연 흙먼지가 방금 지나간 물체의 형상을 가렸지만 소리는 남았습니다. 자동차가 틀림없습니다.
놀라운(?) 차를 바라보다 화엄사에서 올랐던 길을 되돌아 보니 웬 개고생인가 싶더군요. 당시 저는 산 아래에서 성삼재를 지나 노고단까지 자동차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알았던들 자가용도 없으니 버스를 타야하는데 위험한 길을 기도하며 갈 바엔 제 힘으로 오르는 편을 택했을 겁니다. 죽을 듯 올랐던 그 길 위로 자동차가 먼지 일으키며 달리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고운 능선 아래 숨은 또 다른 이야기...힘겹게 오르던 노고단을 이제 두 아들과 편히 오릅니다. 상념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이네요. 산꽃들이 이곳저곳에 피어 시간의 흐름을 알립니다. 늦더위에도 제 힘을 다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가가 살며시 카메라를 들이 대고 예쁜 꽃을 실컷 담아 돌아왔습니다. 산 아래로 가는 길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위험한 도로입니다. 무조건 1단으로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느릿느릿 내려오자니 젊은 날 고생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고통스럽지만 뜻 깊고 아름다웠던 그 길을 편안한(?) 이 도로가 빼앗은 건 아닌지 못내 아쉽습니다. 곤히 잠든 두 아들을 보며 다음번엔 화엄사에서 올라볼까도 생각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나 두 아들 끌고 다시 그 길을 걸을 날이 오겠지요. 고생길을 걷다보면 어머니 품같은 지리산을 온전히 몸으로 느낄 겁니다. 그때 지리산 능선과 능선이 보여주는 고운 선 아래 꼭꼭 숨어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렵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지리산의 아름다움 저편 이야기도 알아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