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위) 근무 당시 친구 부친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지인은 내가 진실위에 근무한다고 하자, "진실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조사해서 문제야"라며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교회 장로인 그가 정말 뭣도 모르고 떠드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친구 부친의 장례식이라 그냥 참고 자제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물론 위 교회 장로의 지적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진실위는 국가기관이고 조사관은 공무원이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한국역사나 법에 대한 지식 또는 조사나 연구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건 피해자의 친인척은 이해충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아예 채용대상이 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는 많은 유족들이 연좌제 등으로 반세기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생활고로 고생했기 때문에 그 결과 자녀들에게 좋은 학교교육을 시키기가 어려웠다. 반면 위와 같이 까다로운 전문성을 요구하다 보니 진실위 조사관들은 공부를 많이 한 석박사급이 많았다. 그래서 진실위 조사관 중에 피해 유족의 자녀나 친인척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래서 진실위는 양쪽에서 다 욕을 먹었던 것 같다. 수구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은 진실위를 빨간색으로 덧칠했고, 반면 피해자 유가족은 국가기구라는 경직된 제도 안에서 움직이는 공무원 조사관의 모습에 울화와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다.
윤호상 선생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연합회 대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지난 9월 17일 어렵사리 선생을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처음 생각은 1시간 정도만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윤 선생의 한 많은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나는 결국 약 5시간 동안 그의 말 못할 사연과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험난한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온 피해자 유족들과 윤 선생의 이야기를 내 몸이 피곤하다고 감히 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지난 9월 17일 윤 선생과 5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이영조 전 위원장에 대해 집단소송과 고발 추진 - 진실위가 4년여의 활동을 마치고 지난해 말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유족분들은 아직 과거사 정리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또 어떤 유족분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전 진실위 3기 위원장 이영조씨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려 한다. 왜 그런 주장이 나오나?"우리 유족회는 진실위 3기 위원장 이영조를 직무유기로 집단 고발하는 것을 지금 준비 중이다. 과거사법에 의하면 진실위는 그 자체 결정만으로도 조사활동기간을 법적으로 2년이나 더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영조씨는 2010년 1월 22일 제122차 전원위원회의에서 조사기간을 단지 약 2개월만 연장했다(2010년 4월 24일에서 6월 30일까지로). 그럼으로써 그는 역사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방기하고 민간인학살 유족들을 기만했다. 더구나 이영조씨는 조사종료 기간이 남았는데도 유족들이 신청한 사건을 무더기로 기각처리했다.
생각해봐라.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사건을, 57년 동안 묻혀 있던 사건을, 40명의 조사관이 4년간 조사해서 그 진실을 다 규명할 수 있겠는가? 2년을 연장해서 6년을 조사해도 물리적으로 절대시한이 부족하다, 그런데 스스로 조사기간을 두 달만 연장한 뒤 그 활동을 종료한 이영조씨는 유족들의 가슴에 두 번 못을 박았다. 우리 유족들은 이런 이영조씨를 집단으로 고발할 것이고 끝까지 법적투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유족들은 자기직무를 유기한 이영조씨를 상대로 지금 집단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영조씨는 결코 대학(경희대)에 교수로 복직되어서도 안 될 사람이다. 그는 진실위 위원장으로 근무 당시 가해자를 밝히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해 군대 대장이나 경찰서장 수준에서 사과하고 사건을 무마, 처리하자고 하였다. 자기 부모나 처자 또는 형제가 잔인하게 학살당해도 그렇게 무성의하게 강 건너 불 보듯이 사건을 처리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민다."
- 그래도 지난해 12월 이영조씨가 유족들을 위해 위령제를 개최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노력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은데?"반인륜적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에 대해 정부의 한마디 사과도 없는 위령제가 무슨 위령제인가? 유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영조씨는 진정성이 없는 그 위령제를 국민의 혈세와 국고를 낭비해가며 강행했다. 우리 유족들은 아직도 그런 거짓 위령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결코 납득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당시 우리 유족들은 국가폭력의 의해 학살된 희생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모시설을 세우고,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이영조씨는 우리 유족들의 이러한 절규를 통째로 무시해 버렸다. 우리 유족들이 요구해온 진상조사와 유해발굴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대책도 없이 활동을 종료한 이영조씨를 그래서 우리 유족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진실위, 중립성 이유로 조사에서 유족 배제"- 화제를 바꾸자. 유족들이 느끼는 진실위 활동의 전반적 한계와 아쉬움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진실위는 민간인학살 조사과정에서 유족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거나 당사자인데도 이른바 중립성과 객관성을 앞세워 유족을 철저히 조사과정에서 배제했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정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족을 조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학살사건에 대해 유족들은 자신들이 겪거나 목격한 체험사례를 발표함으로써 진실위 조사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조사에 혼선을 일으킨다고 발표회를 못하게 해서 결국 4회만 발표한 후에 중단했다. 진실위 종합보고서는 신청인의 증언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못했고 보고서의 질은 심각하게 떨어졌다고 우리 유족들은 평가한다.
진실위의 잘못은 또 자국민에 대해 민간인학살을 자행한 반인륜범죄자 이승만에게 면죄부를 준 데 있다.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다. 그래서 진실위의 과거사정리 활동은 아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유족회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80% 이상은 아예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엔 물론 신청기간이 1년으로 제한된 이유도 있지만 박정희가 5·16쿠데타 직후에 민간인학살 유족을 이중 처벌한 역사적 학습효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 진실위 핵심 관계자가 말했듯이 진실위 기본법은 누더기법으로 진실위는 가해자를 강제적으로 구인할 권한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향후 진실위가 새로 생길 때는 과거 진실위에서 부족했던 면들이 반면교사로 더욱 내실 있게 반영되어야 마땅하다."
- 그래도 이영조씨는 짧은 기간에 진실위 종합보고서도 발간하고 나름대로 성과도 적지 않았다고 보는 측도 있는 것 같다."이명박 정권 들어와서 이영조씨를 비롯하여 위원들이 수구인사로 대폭 교체되면서 진실위의 진실규명 의지와 신념이 아예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인사들이 이영조씨와 더불어 발간한 진실위 종합보고서는 그 내용이 지극히 초보적 수준이고 너무 부실하여 우리 유족들은 그것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오죽하면 전 진실위 조사관들마저 따로 조사관 백서 발간을 준비하고 있겠는가? 이영조씨는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생명과 인륜의 문제에 진보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럼 유족들이 보기에, 새로운 진실위가 생길 경우 그 규모나 조사기간은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보는가?"과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이었던 김희수 변호사는 한 강연에서 과거사정리기구는 상설기구이거나 최소한 10년 이상의 기간을 조사해야 한다고 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 김 변호사는 진실위 규모로 조사관 400명에 보조요원 300명을 합쳐 700명 정도가 과거 민간인학살사건과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기구여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지극히 적절하고 정확한 조언이다."
- 현 정부에서 과거사정리 활동은 이미 물 건너갔기 때문에 다음에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그때나 새 진실위 구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본다는 비난도 있는데?"이런 정권일수록 우리 유족들은 정부를 상대로 더 싸울 것이고 계속적인 진상규명을 요구 할 것이다. 특별히 피해자 중 미신고자가 대다수인 것을 감안하여 지난번 우리 유족들은 국회의원들을 만나 특별법 발의를 건의했고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유족회의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향후 특별법 제정을 전제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피해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국적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전국 시군구면에 진실위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못한 미신청자 유족들을 위해 '미신고자 접수처'를 설치하고 피해유족들로부터 신고접수를 받아야 한다.
1960년 4월 혁명 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가 정부에 보고한 시도별 민간인 학살규모가 110만 명이 넘는 것을 봐도 전 진실위 때 1만 건보다는 최소 10배 이상 많게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신청할 것이다. 인간생명과 인륜의 문제에는 당리당략이나 보수진보가 없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 인민군, 좌익,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도 추가조사를 해야 한다는 유족들의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런 학살 사건들은 이승만 때부터 조사를 해서 이제 조사가 충분하지 않느냐라는 반론도 있는데?"어떤 유족들은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의해서 가족이 학살당했는데도 남한정권의 보복이나 연좌제의 피해가 무서워서 또는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말로 적대세력이나 좌익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신고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진실위는 적대세력의 의한 학살사건도 추가조사를 해야 한다. 좌우 이념을 떠나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 만드는 것이 민주정부의 할 일이다.
이영조씨처럼 스스로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며 정치꾼이 되기를 꿈꾸고 진실위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자는 진실을 추구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기구의 수장이 될 자격이 없다, 향후엔 그래서 정치를 떠난 중립적이며 양심적인 비정치꾼을 진실위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그럴 때 이 땅에 진정한 화해와 국민통합이 진실위 활동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