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고향 하면 떠오르는 풍경에 넓은 들이나 실개천, 얼룩배기 황소가 출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향수 어린 정경들이 있다. 굳이 명명하자면 '고향의 골목'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도시 속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골목길을 만나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련함과 그리움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골목을 이리저리 배회하곤 한다. 내가 자란 어린 시절의 놀이터요, 다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속으로 찾아 헤매던 고향의 골목을 추억하면서···.
사실 당시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나 외곽의 풍경은 슬레이트와 시멘트 블록과 널빤지 등이 주요 배경으로 그 삭막함과 비인간적인 느낌은 지금의 획일적인 아파트와도 만만치 않다. 그런 삭막함이 정감적이고 소박하고 따스하게 기억되는 건 아마도 '골목'의 힘이 아닌가 싶다. 주거공간의 일부이고 이웃간 만남의 장소이며 사랑방이자 놀이터이기도 한 공간, 골목이 있어 궁핍스럽고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는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런 골목안 풍경들을 서른살때부터 삼십년이 넘게 줄곧 사진으로 찍어온 이가 이 책 <골목안 풍경 전집>의 저자 김기찬이다. 지난 2005년 향년 68세로 별세한 저자가 남긴 6권의 '골목안 풍경' 사진집과 미공개 유작 34점을 한데 모아 만든 책으로 모두 500여 점의 사진이 수록된 그의 전집이기도 하다. 가난과 행복은 어울리지 않는 이 시대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느껴지는 사진들이 차곡차곡 포개져있다. 몸만 시간에 쫓겨 바쁘게 허덕일 뿐, 마음은 오히려 공허해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들에겐 치유와 같은 사진집이다.
그는 골목안에서 자신의 고향을 보았고,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꼈다고 한다. 골목안 주민들과의 오랜 유대감을 바탕으로 진행된 그의 골목안 작업은 그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사진에 나타난 골목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거실이며 놀이터이자 공부방이었고, 동네 사람들 간의 소통과 생활의 현장이었다.
낮은 데로 임한 사진들"나더러 인물을 클로즈업한 강렬한 사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코앞에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런 일은 잘 못하겠어요. 설사 몇 장 그렇게 찍었다 해도 그건 내 사진이 아닌 것 같아서 결국 고르지 않게 되더라구요" - 본문 가운데 마음 약해서 차마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가슴이 찡한 감동을 주었고 그의 사진에 더욱 깊이 빠지게 한다. 가난과 결핍으로 인해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을 배려해 자기 사진 작업의 완성도보다 골목안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앞섰던 작가의 따뜻함이 역설적으로 이 사진집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대부분이 대상을 단순히 하나의 사진 소재로 보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사진이 나오기가 어렵다. 그는 포토그래퍼 이전에 따뜻한 마음과 정겨운 시선으로 이웃을 감싸안는 휴머니스트였던 것 같다. 그의 사진의 남다른 따스함은 그의 사람됨과 진정성에서 나온 듯싶다. 김기찬의 사진의 매력이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재의 대상이 아닌 일체감이 느껴지는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동네에 살다시피 오가야 한다는 건 사진을 찍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동네 가게앞 평상에 앉아 이마의 주름살을 펴지 못하는 할머지의 속사정 얘기나, 전쟁통에 죽도록 고생하며 젊은시절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인생역정을 한참씩 들어주곤 했을 것이다.
골목 안 사람들과 저자가 한가족처럼 엮이면서 생기는 동류의식에서 찍힌 사진들에 따뜻한 체온이 담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를 찍은 사진으로만 느껴지지 않은 이유다.
풍요와 성급하게 맞바꾼 소중한 것들 어렸을 적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뛰어놀던 골목을 찾는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 숲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리들의 고향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 이들은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생활 전통을 골목안에 담으며 열심을 다한다. 나의 고향 서울, 아직도 빛바래지 않는 서울의 골목, 어린 시절 추억속의 골목, 마음의 고향이다. 친근한 얼굴들, 그들이 엮는 온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영원히 남기고 싶다 - 본문 가운데 그의 사진 속 배경이나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쾌적하지 않고 가난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양지를 만들어 이불을 보송보송하게 말리는 장면, 개구쟁이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웃 간에 술 한잔을 놓고 어려움을 나누는 인정이 사진 속에 녹아 있어 결코 불쌍하거나 요즘말로 '구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풍요로움과 성급하게 맞바꾼 소중한 것들이 그 속에 남아 있다는 강한 이끌림에 그의 골목안 사진을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게 만든다. 디자인 도시 서울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이 골목안에 있을 듯하여 두리번거려본다. 그건 아마도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주인이 되어 한가롭게 거닐기도 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그리워서 그런 것 같다. 바로 골목이 이미 옛적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골목의 주인은 사람만이 아님을 말하는 사진들로 재미있다. 바둑을 두는 주민들 사이에서 같이 바둑판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애견이 참 기특하고, 골목에서 빠질 수 없는 고양이들이 담장 위, 계단 끝에서 수시로 등장하고 초라한 동네지만 이곳에도 엄연히 에로스가 존재함을 주인을 대신하여 증명이라도 하듯 교미에 열중하는 개들도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동물들은 도시인의 팍팍한 삶에 많은 위로를 주는 고마운 존재다.
특히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골목안 사람들의 변모한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연애하던 남녀가 훗날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깜찍한 꼬마 쌍둥이 자매가 어엿한 처녀로 성장한 모습, 엄마 품에 안긴 재롱동이 꼬마가 훌쩍 커서 엄마를 업은 모습 등은 마음 짠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오랜세월 한가지 주제만을 추구해온 작가의 끈질긴 노력에 감탄하게도 한다.
점심시간에 책상에 앉아 사진집을 보고 있자니 젊은이부터 중장년의 사람들까지 와서 사진들을 흥미롭게 쳐다본다. 흐뭇한 웃음을 짓는 사람, 추억에 젖은 표정, 감동한 얼굴··· 마치 자신과 가족, 그리운 친인척들의 사진을 보는 듯한 표정들이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비좁고 초라하며 쾌적하지 않은 공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마주쳤던 이웃들과 그 공간의 풍속에 깊은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곳이 인간의 도시였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골목안 풍경 전집> 김기찬 사진, 눈빛 펴냄, 2011년 8월, 592쪽,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