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둘이서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온다. 그러니 좋은 여건에서 구경하긴 틀렸다. 오늘은 옵션이란 이름으로 할슈타트를 관광하기로 되어 있다. 할슈타트는 잘츠부르크 동남쪽에 있는 인구 815명의 작은 마을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할슈타트 호숫가에 있으며,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철기시대 말기까지 문화를 꽃피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할슈타트는 다흐슈타인, 잘츠캄머굿과 함께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로 가는 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하나는 동쪽의 호수를 보며 산길을 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나 있는 고속도로를 통해 가는 방법이다. 전자는 경치가 좋고, 후자는 시간이 절약된다. 사실 가장 좋은 코스는 몬트 호수와 아터 호수를 보고 할슈타트 호수를 따라 할슈타트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올 때는 산길로 해서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절약을 위해 산길과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할슈타트에 도착하니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호수와 마을과 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토요일이라 관광안내소도 문을 닫았다. 지도도 없이 안내책자도 하나 없이 정말 감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셉 1세의 결혼 25주년 기념비다. 이 비석은 1879년 4월 24일에 세웠으며, 결혼은 1854년 4월 24일 바이에른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등짐을 진 노동자 석상이 보인다. 이곳에서 소금을 채굴하고 운반하던 노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것 같다. 할슈타트의 '할'은 고대 게르만어 할란(Hallan)에서 나왔으며, 소금덩어리란 뜻이다. 그리고 '슈타트'는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할슈타트는 소금의 도시가 된다. 잘츠부르크, 할슈타트, 할라인, 모두 소금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다. 석상을 지나자 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길인 호반도로(Seestraβe)가 나타난다.
나는 아내와 둘이서 이 길을 따라 걷는다. 이슬비가 계속해서 온다.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통행도 별로 없다. 가게 앞의 기념품들이 우릴 반긴다. 닭, 오리, 새들이 인상적이다. 잠시 선착장으로 내려가 호수를 가까이서 들여다 본다. 해가 났으면 물빛이 더 아름다울 텐데 온통 회색빛이다. 배들은 사람이 없어 그냥 비를 맞고 있다. 구름으로 인해 산과 하늘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
다시 도로로 나오니 할슈타트 소금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보인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암염으로 100g에 3.9유로다. 사실 암염의 질이 천일염만 못하다고 한다. 또 길을 따라가면서 보니 잘츠캄머굿 2011 모차르트 축제 포스터가 걸려 있다. 날짜를 보니 오늘이다. 저녁 8시에 개신교회에서 AD HOC 사중단과 함께 하는 실내악 연주회가 열린다. 다시 북쪽으로 더 가니 호반도로 56번지에 선사박물관이 나타난다.
할슈타트 문화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우리는 계단을 통해 그곳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그 계단에 시간여행이라는 우리말이 보인다. 정말 반갑다. 위로부터 아래로 독일어 Zeitreise, 영어 Time Travel, 불어 Voyage dans le Temps가 보인다. 더 아래로는 우리말 시간여행, 일본말 タイムトラベル, 중국말 時光追憶이 보인다. 계단 위 평지에는 이 지역에서 채굴한 석회석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광산업자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게오르크 람사우어(1795-1874)의 동상이 서 있다.
람사우어는 할슈타트 소금광산(Salzberg)의 선사시대 묘지터를 발견하고 발굴한 사람이다. 그를 통해 할슈타트 선사문화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고, 이를 기념해서 선사박물관 앞에 기념동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동상 옆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입구에 '역사의 문. 7000년 시간여행'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할슈타트 문화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기원전 850년부터 450년까지 철기시대 발굴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광장과 교회 그리고 성당
과거로의 시간여행보다 현재의 시간여행이 더 중요한 나는 다시 길을 따라 개신교회 쪽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교회에 이르기 전 왼쪽으로 시장광장이 나타난다. 이 광장이 할슈타트의 마을 한 가운데쯤 있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는 삼위일체 석주가 세워져 있다. 페스트를 퇴치한 것을 기념해 이곳 주민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기념탑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할슈타트 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장 앞에는 개신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863년 신고딕 양식으로 호숫가에 지어졌다. 이처럼 신교가 할슈타트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요셉 1세의 신교에 대한 관용정책 덕분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결혼 25주년 기념비가 마을 앞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앞의 제단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고 오늘이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한다'라는 문구와 '주여! 우리와 함께 있어 주소서'라는 기도 문구가 보인다.
할슈타트를 비롯한 알프스 광산지역은 원래 루터의 개신교가 전파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 볼프 디트리히 주교가 부임하면서 이 지역의 루터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주민들의 상당수가 이곳을 떠나거나, 발칸의 산악지대인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1781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1세에 의해 다시 개신교가 허용되었고, 그때부터 할슈타트에는 개신교로 전향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할슈타트 주민의 26%가 개신교를 믿고 있다.
교회를 나와 산쪽으로 난 교회길(Kirchenweg)을 올라가면 가톨릭교회가 나온다. 이곳에는 성모승천교회와 미카엘 교회가 있다. 성모승천교회는 할슈타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505년 후기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유명한 마리아 제단을 볼 수 있다. 3개의 판으로 만들었고, 양쪽 두 개의 판을 접어 가운데 중심판을 가릴 수 있도록 했다. 가운데 중심판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515년 조각가 레온하르트 아스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카엘 교회는 신도들의 유골을 보관하는 묘지교회로, 카르너(Karner)라고도 부른다. 16세기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현재 1500명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 할슈타트는 산악지역이어서 넓은 공동묘지를 확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매장한지 이삼십년 유골을 수습해서 이곳 교회에 모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골의 이마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여기서 길은 호숫가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가면서 건물들을 보니 지금까지 본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 건물들은 빗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우리에게 차분히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가면서 아내와 나는 새로운 것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없다. 길가에 수도가 있는데, 먹는 물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산골이라 물이 깨끗하고 수질이 좋은 것 같다.
다시 마을 입구로 돌아오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올라 우리는 가이드에게 호숫길로 갈 수 없느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시간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듣는다. 버스는 할슈타트의 소금산 밑으로 뚫은 터널을 지나 바로 마을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이내 알프스 산록을 따라 잘츠부르크로 달려간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산위로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또 산골을 따라 흘러가는 하천도 보인다. 이들 하천이 모여 잘차흐(Salzach) 강으로 연결되고, 잘차흐는 다시 도나우강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발칸 여행은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나우 하류인 루마니아의 콘스탄자를 지나서 부쿠레슈티로 간 다음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왔기 때문이다. 도나우강은 오스트리아의 북쪽 린츠에서 빈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본류를 만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남쪽 상류인 알프스 산록을 지나가는 것이다. 사실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송어(Die Forelle)'도 이곳 알프스 지역의 맑은 물에서 뛰어 노는 송어의 모습을 보고 작곡했다고 한다.
이제 차는 미라벨(Mirabell) 정원으로 향한다. 그곳은 잘츠부르크 주교였던 볼프 디트리히가 1606년 자신의 정부였던 살로메를 위해 지어준 미라벨 궁전에 있는 정원이다. 미라벨 궁전은 처음 알테나우(Altenau) 궁전으로 불렸고, 살로메와 그의 자식들이 살았다. 그러나 1612년 그가 대주교직에서 쫓겨난 후 궁전 이름이 미라벨로 바뀌게 되었다. 미라벨은 이탈리아어 미라빌레(mirabile)에서 온 여성 이름으로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이다. 지금은 궁전보다 정원으로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