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듯, 푸른 하늘도 얼마나 높은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특히, 맑은 가을하늘은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노랗게 익은 열매만 봐도 배부른 계절이요, 수확하는 모습만 봐도 기쁨 가득한 진한 가을이다. 가을 냄새가 온 천지로 퍼져 있다. 24일 경남 하동 북천면 하늘에도 가을향기는 가득 차 있었다.
몇 해 전, 가을여행을 떠난 차에 우연히 만난 코스모스 축제 현장. 바다같이 넓은 땅에 가을바람을 타고 코스모스가 물결치는 풍경을 보았다. 정말로 장관이었던 그 때,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 이번에 맘먹고 다시 찾았다.
어떤 지역이든, 축제장으로 가는 길 중 제일 걱정되는 것은 주차문제. 그런데 휴일을 맞아 엄청나게 많은 인파와는 달리 넓은 주차장으로 우려했던 걱정은 덜은 셈. 귀찮게 여겨지는 사소한 것은 조금 걸어야 한다는 것. 하기야 축제장에 와서 걷지 않고 무슨 구경을 할까 생각하면 문제가 될 수는 없지.
수만 평의 넓은 들녘은 그야말로 코스모스 물결이다. 논둑길을 따라 형형색색 사람물결도 일렁인다. 손에 과자봉지를 든, 엄마 손에 이끌려 논둑을 따라 걷는 아이는 어떤 감정일까? 아직도 처녀 적 시절 단꿈에 빠진 듯 한, 아주머니라고 해야 하나,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애매한 60대. 모두 코스모스 파도치는 가을향기에 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개울 한 가운데서 한 폭의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는 젊은 화가의 모습도 예뻐 보이기만 하다.
북천에는 코스모스만 있는 게 아니다. 더욱 진한 가을을 느끼게 배려한 점도 눈에 띈다. 코스모스 하나만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가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재랄까. 원두막 위로 줄을 칭칭 감아 올라가 핀 박 넝쿨. 떨어지는 물줄기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그 사이로 보이는 코스모스. 약 5백 미터 길이에 40여 종의 박과 식물을 심은 조롱박 터널. 조랑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코스모스 꽃밭을 한 바퀴 도는 코스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광경이다.
들녘 중간에 눈꽃이 폈다. 소녀 둘이 눈싸움을 하는 듯한 장면이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눈이 내린 것이 아니다. 메밀꽃이 눈처럼 내려 눈꽃을 피운 것이다. 아마도 소녀 둘은 평생토록 메밀꽃밭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 건너 맞은 편은 가을을 상징하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을 축 늘어뜨린 수수와 조는 수많은 씨앗을 달고 하늘로, 땅으로 힘겹게 서 있다. 해바라기도 목을 늘어뜨리기는 마찬가지.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 자연의 이치지만 사람도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이 아니던가. 모두 어릴 적부터 농사지으며 보아왔던 풍경인데, 오늘 이 곳에서 왠지 가슴이 저밀어 옴을 느낀다.
북천역. 60~70년대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겨운 역사가 캡슐 한 알처럼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득 안은 채 내리고, 떠난다. 삶의 교차점이요, 만남과 이별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예쁜 소녀 넷을 만났다. 생면부지의 만남. 내 블로그에 싣는다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잠시 망설임 끝에 웃으며 승낙한다. 아마 이 소녀들도 메밀밭 소녀들처럼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리라는 생각이다.
내가 사는 거제도엔 기차가 없다. 그러다보니 여행은 순전히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터. 그러다 보니 때론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고, 하고 싶기도 하다. 이날 북천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농촌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차여행을 하는지는 몰랐다. 물론 코스모스축제를 보러 기차여행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오랜만에 기차가 도착하고 떠나는 모습이 보고 싶어 한참을 기다렸다. 오전시간 코스모스 사진을 찍느라 두 시간을 넘기고, 점심시간도 어중간 해 점심도 그른 상태. 역무원에 물으니, 오후 1시 31분 열차는 도착한단다. 무궁화호 1941호. 열차를 타 봤던 기억은 군 시절 휴가 나올 적, 그 때 뿐. 열차가 8분 늦게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밉기만 하다. 배는 고픈데 기다리는 시간이 지겹기 때문이다.
기적소리 울리며 천천히 들어서는 열차.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철로에 귀를 대며 열차와 숨바꼭질 하는 촌 동네 순진한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묵중한 몸을 이끈 열차는 중압감에 하얀 숨을 내뿜으며 정확한 위치에 멈춘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다. 먼저 내려야 탈 수 있으련만, 타기에 바쁜 사람들로 혼잡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사람을 실은 열차는 떠나기에 바쁘다. 그런데 저 멀리 한 청춘 남녀가 달려온다.
"아저씨! (열차)안에 짐이 있어요.""안돼요."(역무원이 하는 말)사실 열차는 문을 완전히 닫았고, 서서히 떠나는 상태. 약 10미터를 달리다 열차는 다시 멈추고 만다. 그 짧은 시간 기관사와 연락이 닿았는가 보다. 청춘 남녀는 열차에 올랐고, 다시 열차는 떠나갔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밀려온다. 그 청춘남녀의 가방이 어떻게 열차 안에 남기게 됐는지? 앞선 역에서 계속 열차를 타고 북천역에서 내려 코스모스 축제를 구경할 계획이었는데, 짐을 두고 내렸는지? 그렇다면 코스모스 축제 구경도 못한 그 청춘 남녀가 안됐다는 생각이다.
하동 북천에는 갖가지 물결로 일렁인다. 들녘은 노란 물결이요, 코스모스 꽃밭은 꽃물결, 도로는 차량 물결이요, 그리고 논둑길은 사람물결로 일렁이며 가을이 넘쳐나고 있다. 북천 코스모스 메밀축제는 다음 달 3일까지 열린다. 가을을 느끼고 싶다면 하동 북천 기차여행도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주요행사 중 전시마당으로 옛 농기구 전시, 이동 동물원, 조롱박터널 등이 있고, 도리깨질, 새끼 꼬기 등 전통문화 체험마당, 미꾸라지 잡기, 메밀묵 만들기, 밤.고구마 구워먹기 등 체험행사를 비롯한 많은 행사가 북천을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으며, 거제지역 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뉴스앤거제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