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흔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비유된다. 권력의 감시견인 언론이 권력과 너무 가까우면 유착현상이 벌어지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감시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MB(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은 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워서 탈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본관에서 조중동 사옥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2~3㎞에 불과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동아>(종로구 세종로)와 <조선>(중구 태평로)은 물론, <중앙>(중구 순화동)과 <문화>(서대문구 충정로)까지 모두 반경 3㎞ 이내에 있다.
심정적인 거리는 더 가깝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가 도마에 올랐지만, '조중동문'이 60%를 싹쓸이한 것으로 드러난 MB 정부의 '정부 광고 몰아주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대기업 앞에서 '공정사회'의 칼을 휘두르면서 뒤로는 조중동문에 '호박씨' 물리는 품새를 보면, MB 정부와 조중동문은 한 통속이거나 자웅동체인 듯싶다.
권력과 언론이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유착 속에서 MB 정부 4년이 지난 요즘 서울 광화문 일대에 악취가 진동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 출신 김두우 전 홍보수석과 <조선> 출신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 등 '반경 3㎞ 이내 언론인 출신 MB맨'들의 잇단 부패 스캔들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한국기자협회가 23일 성명에서 "'MB의 남자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언론인 출신들의 비리가 더욱 눈에 띈다"며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을까 싶다.
박영선은 MB 아킬레스건 'BBK 의혹'과 뗄 수 없는 정치인그래서 이명박 정부 심판을 내걸고 서울시장에 출마한 MBC 경제부장 출신 박영선 의원(51, 서울 구로 을)이 25일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것은 외려 신선해 보인다. 언론인 출신 'MB의 남자들'이 추문에 휩싸인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박 의원이 이날 연설에서 꼽은 이번 서울시장 선거의 키워드도 '변화와 희망 그리고 MB 심판'이었다.
박영선은 이명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인 'BBK 의혹'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인이다. 지난 2007년 대선은 '이명박 대 정동영'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명박 대 이명박'의 대결이었다. 전자가 참 또는 진짜 이명박라면 후자는 거짓 또는 가짜 이명박이었다. 그 참과 거짓의 경계선에 BBK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박영선은 MBC 경제부 기자 시절인 2000년 11월 서울 시청앞 삼성생명 빌딩 17층에 있던 BBK 사무실에서 이명박을 인터뷰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에리카 김과 동생 김경준씨 등을 만나 토건사업가에서 금융사업가로 변신을 꾀한 이명박의 요청으로 이뤄진 인터뷰였다. 기자였던 그가 BBK 의혹에 관심을 갖게 되고, 'BBK 저격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계기를 마련해준 이는 이명박 자신이었다.
비례대표 초선의원이었던 박영선이 대중에게 지명도를 높여준 것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 누리꾼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린 '박영선 동영상'이었다. MBC 기자 시절에 이 후보를 인터뷰한 모습을 담은 2분43초 분량의 이 UCC(사용자제작물)는 유튜브에 올라간 뒤 1주일 만에 조회 수 66만여 건을 기록할 만큼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박 의원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한 사람의 면전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쏘아붙일 만큼 '강심장을 가진 여전사'였다. 박 의원은 TV토론을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영 후보 측 참모들과 맞닥뜨린 이 후보가 최재천 의원과 악수를 하면서도 옆에 있던 자신을 못 본 체 지나치자 "(저를) 똑바로 못 쳐다보시겠죠?"라고 소리치며 이 후보의 뒤통수를 향해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쏘아붙여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순간 당황한 이 후보의 입에서 나온 방언은 "저거(저게),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였다.
검찰총장에게 "그렇게 세상 쉽게 보지 말라"고 충고한 '간 큰 정치인'당시 '박영선 동영상' 등 이 후보 비난 UCC를 게재하거나 유포한 자는 물론, 다운로드한 누리꾼까지 수사를 의뢰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이 현재의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다. 그러나 선거 직전에 공개된 '이명박 CD'를 보면, 이 후보는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최고경영자과정 특강에서 "올해(2000년) 1월에 BBK를 내가 설립했고, 증권회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증권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금감원에 신청서를 냈고, 6개월 만에 허가가 나왔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이명박 전 의원이 박영선 기자와 인터뷰하기 한 달 전의 상황이다. '박영선 동영상'도 'BBK 의혹'도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였다. 그러나 거짓은 너무 깊이 숨어 있었다. 이명박 대세론을 무너뜨리기에는 '박영선 동영상'도 '이명박 CD'도 너무 늦게 나왔다. 이 후보는 530만 표가 넘는 압도적 표차로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BBK 의혹을 밝히는 데 앞장선 '낙선 정치인'들은 줄줄이 사법처리 되었다. 사법처리 후 복권된 김현미 전 의원과, 아직 재판이 진행중인, 그래서 더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서 '각하' 험담을 맘껏 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정봉주 전 의원이 대표적 사례다.
박영선은 MB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총선에서 당의 전략공천으로 서울시 구로구(을)에 출마해 지역구에 안착했다. 박 의원과 가까운 한 정치인은 "정치를 계속할지 망설였던 그가 막판에 출마를 결심하게 된 데는 배지를 달지 않으면 사법처리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캘리포니아주) 변호사로서 '김&장'에 다닌 남편 이원조씨는 MB가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더는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일본에서 취업해야 했다. 재혼해 얻은 늦둥이 아들(12)은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지금은 미국 LA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선은 지난 8월 한상대 검찰총장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폭풍 같은 눈물'을 보여 잊혀진 BBK 의혹을 되살렸다. 그는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에리카 김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한상대 후보자에게 "에리카 김 사건은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고 못박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도 있고 감옥에 간 사람도 있다. 이로 인해 민주당 의원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 줄 아느냐"고 다그치다가 감정이 북받쳐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말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그는 10여 분 동안 눈물을 삼키는 가운데서도 검찰총장 후보자 앞에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우고 다닌다"고 경고했다. 검찰총장이 될 것이 확실한 사람에게 "그렇게 세상을 쉽게 보지 말라"고 충고하는 '간 큰 정치인'은 그 말고 누가 있을까 싶다.
젊은이에게 '패자 부활전' 기회 주는 '포근한 엄마 서울'17~18대 국회에서 BBK 사건과 각종 인사청문회 저격수로 활동하면서 재벌과 검찰이라는 마지막 성역과 겁 없이 '맞짱'을 뜬 '여전사'가 이번에는 '포근한 엄마 서울'을 들고 나왔다. 대중에게는 낯설어 보이는 구호다. 그러나 경제부 기자 시절 그는 경제정의의 가치를 맨 앞줄에 두고 취재하면서도 이웃 주민들이 친환경 유정란을 공동구매할 수 있도록 배려한 '따뜻한 아줌마'였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라는 '각하'의 한탄이 절반의 진실은 담고 있는 셈이다.
그 포근함의 중심엔 민주당이 지난해 지방선거 때부터 한나라당과 전선을 구축해온 '보편적 복지'가 있다. 그의 복지 공약은 "(시민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와 서울시가 엄마처럼 보호해 주겠다"는 표어로 상징된다. '서울 젊은이 펀드' 1조 원을 조성해 창의력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엄마의 넉넉한 품'으로 패자 부활전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엄마 박영선'이 따뜻한 시정을 펼치려면 본선에 앞서 시민후보인 박원순 변호사와의 '본선보다 힘든 예선'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박영선 캠프에서는 예선만 통과하면 본선은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오마이뉴스>-리서치뷰 27일 여론조사에서도 박원순 후보와의 예선에서는 '고전'하지만 본선에서는 나경원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나경원 의원이 한나라당 후보로 거론될 때도 지난 선거에서 오세훈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한 한명숙 전 총리가 지지율은 더 높았지만, 나경원과의 최종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측한 후보는 박영선이었다. 그만큼 민주당에서는 '나경원이라는 꿩을 잡는 매는 박영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시민후보 박원순'과의 일전이다.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공교롭게 고향(경남 창녕)도 같다. 현재로서는 민주당이라는 종갓집 며느리와 '안풍'(안철수 바람)을 업은 시민후보의 대결 구도에서 후자에 유리한 국면이다. 그러나 박 의원을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게 한 원동력은 "민주당의 도전정신은 불가능해 보이는 걸 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신념이다.
박 의원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17대 국회에서는 재벌 특혜 문제에 대해, 18대 때는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에 대항해 싸워왔다. 재벌, 검찰 권력과의 싸움에서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싸워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런 점에서도 (박 변호사와) 차별화된다고 본다"고 각을 세웠다. 또 민주당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3+1(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반값등록금) 복지정책을 내걸어 승리했고, 10·26 선거도 무상급식에 반발한 오세훈 시장의 사퇴에서 비롯된 '복지전쟁'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박원순의 등장은 민주당이 국민과 함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들고 나온 격이라는 주장이다.
'심청' 박영선, 손학규의 눈을 번쩍 뜨게 할 수 있을까그래서 그가 먼저 의지하는 곳도 서울시의 30만 민주당원이다. "부패한 MB 정권과 썩은 서울 시정을 바로잡을 세력은 민주당밖에 없기에 현실에 공감한 민주당 당원들이 서울시장 경선에 많이 참여해 줄 것으로 믿는다"는 당원들에 대한 신뢰다. 그가 25일 후보경선에서 강조한 것도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의 자긍심이었다.
"민주당 서울시장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권교체의 시작입니다. 10년 만에 찾아올 민주당 서울시장은 총선승리, 민주당 대통령의 출발역입니다. 그 열차가 오늘 출발합니다. 희망을 싣고 10월 26일을 향해 우리 다함께 출발합시다."박영선은 MBC 선배인 정동영 의원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지금은 손학규 대표 체제에서 정책위의장으로서 한창 정책 구현을 통한 정치의 의미와 재미를 만끽할 재선 의원이다. 그러나 그는 '당을 먼저 살리자'는 동료 정치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꺼져가던 민주당 경선 흥행의 불씨를 살려놓았다.
그래서 박영선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에 비유된다. '하늘이 낳은 효녀' 심청의 부친 심봉사는 민주당일 수도, 손학규 대표일 수도 있겠다. 공교롭게도 심봉사의 이름도 '학규'다. 박영선에게는 50년 전통 제1야당에서 서울시장을 못내 문을 닫을 상황에 직면한 손학규의 눈을 뜨게 하고, 더 나아가 '안철수 쓰나미'에 휩쓸려간 한국의 정당정치를 복원해야 하는 힘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아서 '민주당의 효녀' 박영선이 심봉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적을 이룰지 누가 알겠는가. 마라톤에서 '페이스 메이커'가 우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듯이,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에서도 이변은 종종 일어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