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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 삼매경.
서예 삼매경. ⓒ 고은아

조지아 주의 찌는 듯한 여름이 다 지나고 화창한 가을 날씨가 기분 좋게 느껴지던 지난 토요일(9월 24일) 오후, 나는 6학년짜리 딸과 1학년짜리 아들을 대동하고 애틀랜타 시내에 있는 에모리대 캠퍼스를 찾았다. 캠퍼스 동쪽 끝에 있는 기숙사 18층 펜트하우스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숲과 호수로 뒤덮인 대학교 풍경이 근사하다.

한국계 입양아들에게 멘토를

이날은 케임(KAME, Korean Adoptee Mentorship Program at Emory)이 올해 첫 월례 행사를 여는 날이었다. 에모리대 학부생들이 가까운 지역에 사는 한국계 입양아들과 일대일로 만나 한국 문화도 전하고 닮은 얼굴의 롤모델도 되어 주기 위해 2009년에 시작된 케임은 현재 12명의 대학생 멘토가 11명의 입양아 멘티와 결연하고 있다.

회장과 부회장을 포함해 총 13명이 활동하고 있고 두세 명 더 멤버를 보충하기 위해 요즘 지원서를 받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 조건 때문에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한국어가 유창한 교포 학생도 몇 명 있다. 이번 학기 새로 회장이 된 최지원씨도 그중 하나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까지 다섯 가족. 여느 때와 비슷한 규모다. 예빈과 트레이 남매, 애쉬튼과 스텔라 남매, 브리젯, 그리고 올해 처음 참가한다는 톨랜드까지 모두 8명의 아이들과 6명의 부모들, 11명의 케임 멤버가 모였다.

열 살짜리 내 딸아이를 빼면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행사장으로 뛰어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학생들과 뒤엉켜 한바탕 소란스럽다. 2~3년째 얼굴을 봐온 사이인지라 스스럼이 없다.

이 개구쟁이들을 데리고 이날의 주제인 '한국의 서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됐다. 문방사우를 비롯해 각종 시각 자료를 설명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깔아 놓은 신문지를 찢으며 장난을 치던 아이들이 실습이 시작되자 진지해졌다. 종이와 붓을 받아 들고 검정 먹물을 찍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간다. 언니, 오빠, 형, 누나의 도움을 받아 자기 한글 이름도 써 보고 영어 이름도 한글로 써 본다.

 아이들의 서예 작품들.
아이들의 서예 작품들. ⓒ 고은아

서예 시간이 끝나자 간식 시간이다. 송편과 유자 주스, 알로에 주스 등 한국 마켓에서 사온 먹을거리를 맛보고 덤으로 초코파이랑 한국 과자, 사탕이 들어있는 선물도 받았다.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기숙사 앞마당에서 한동안 뛰어놀다 보니 어느새 예정된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마지막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여 "김치~!"

이날 행사에는 지난 5월에 졸업해 전임 회장이 된 김승규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케임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김씨가 케임을 구상하게 된 배경에는 하버드대학교가 있었다. 또 한 명의 설립자인 은동원씨는 한국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다.

"2005년에 입학해서 한 학기만 마치고 군대 가느라 한국에 다녀왔어요. 2008년 6월에 제대하고 복학하기 직전 하버드대에 놀러 갔다가 후배가 속한 클럽 행사에 따라갔는데, 그게 HCKAMP(Harvard College Korean Adoptee Mentorship Program)였어요. 몇 년 만에 다시 미국에 나온 거라 얼떨떨한 상태였는데, 앞으로 대학생활 하면서 내가 할 일 하나를 확실히 찾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 뜻이 맞는 10명의 회원을 모아 2009년에 케임의 첫 삽을 뜨게 된 것이다. 2005년에 설립된 하버드대의 모임에서는 현재 약 25쌍의 멘토와 멘티가 연결돼 있다.

 송편은 이런 맛이야!
송편은 이런 맛이야! ⓒ 고은아


 역시 뛰어노는 게 최고야!
역시 뛰어노는 게 최고야! ⓒ 고은아

미국에 산재한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

관련 자료들을 찾다 보니, 유사한 모임이 코넬대에도 있었는데(Cross-Cultural Adoptee Mentorship Program), 한국계 입양아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몽골, 인도네시아, 버마, 카자흐스탄 등 다양한 인종 간 입양을 포괄하고 있는 만큼 규모도 좀 큰 편이었다. 가까운 조지아대(UGA)에는 아시아계를 아우르는 ACMP(Asian Children Mentoring Program)가 2006년에 설립돼 활동 중이었다.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성인 입양인들이 청소년기의 입양아들을 돕는 멘토 프로그램(Adoptee Mentor Program)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대개의 단체들이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들어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 입양아 지원 단체들이 하나둘 생겨난 것과 때를 같이한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무엇인가 결핍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지난 10여 년 사이에 급격히 생겨난 변화인 듯하다.

보스턴 지역의 'AFC 멘토링(Adoption & Foster Care Mentoring)'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2001년에 설립되었는데, 가족과 집을 잃고 수양부모나 보호소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평균 연령 10세, 포스터 케어를 받는 동안 6번에서 11번가량 이사를 하고, 5번 이상 학교를 옮기며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인생의 멘토'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저스틴 파스콰리엘로씨는 그 자신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포스터 케어를 받으며 성장했고, 9세에 입양되어 양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고 친모와도 계속 연락을 하며 자랄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대에 진학한 그는 대부분의 동기들이 비즈니스나 금융 쪽으로 진로를 정하던 4학년 때 시험적으로 '유스 멘토링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기금 마련에 나섰다. 이 프로그램은 보스턴 지역 기업체들의 후원과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현재 72명의 불우 청소년들에게 멘토와 리더십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보스턴 지역에서 포스터 케어를 받고 자라는 아동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는 AFC 멘토링.
보스턴 지역에서 포스터 케어를 받고 자라는 아동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는 AFC 멘토링. ⓒ www.afcmentoring.org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내셔널 케어스 멘토링 운동본부(National Cares Mentoring Movement)는 특별히 흑인 아동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는 단체다. 2006년에 설립된 이 단체가 진단하듯 흑인 사회의 현주소는 가히 위급상황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위기의 내용들이다.

▲ 미국 내 초등학교 4학년 흑인 학생의 58%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 몇몇 도시에서는 80%의 흑인 남자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 매일 1000명의 흑인아이들이 체포된다.
▲ 25세에서 29세 사이의 흑인 남자 8명 중 1명이 감옥에 있다.
▲ 가장 많은 수의 흑인 남자 아이들이 살해되고 있다.

"그들이 보는 대로 그들은 자랄 것이다." 이는 애틀랜타 지역 '100인의 흑인 사업가 모임'의 명예 의장이자 NCMM 의장인 토마스 도치씨가 한 말이다. 롤모델 없이 자라는 흑인 아동들에게 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따를 만한 일대일 멘토를 지정해 줌으로써 반복되는 빈곤과 범죄의 악순환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운동들에 힘입어서일까? 아동발달리서치학회(Society for Research in Child Development)의 2006년 자료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미국 내 약 300만 명의 청소년이 일대일 멘토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해 여섯 배나 증가한 수치다.

아동들이 이런 혜택을 받는다는 건 자원하는 멘토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멘토가 되려면 대개 일정 시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매주 멘티와 만나거나 연락을 해야 하며, 이런 관계를 최소한 1년 이상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케임은 새 회원을 뽑을 때 엄격한 면접을 거친다. 영어와 한국어 구사능력은 기본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인지 테스트한다. 또 매주 회원 모임에 나오고, 격주로 가정 방문을 할 수 있어야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참가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두 학기 이상 활동할 수 있다는 다짐을 해야 회원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한 번 회원이 되면 한국으로 가지 않는 한 끝까지 가는 것 같다.

뭐, 한국에 갔어도 끝은 아닌 모양이다. 행사에서 만난 예빈과 트레이의 엄마 뎁 앤드류스씨는 내년 여름쯤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때 한국으로 돌아간 회원들을 다시 만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흑인 아동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는 내셔널 케어스 멘토링 운동본부.
흑인 아동들에게 멘토를 연결해 주는 내셔널 케어스 멘토링 운동본부. ⓒ www.caresmentoring.org

함께 잘 사는 사회의 힘

친하게 지내는 선배 한 사람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이 어려서부터 보이스카웃 활동을 쭉 해왔는데, 거기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친구 아버지가 아들의 멘토가 되어 주고 있다고 했다.

"미국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내 아이가 잘 자라려면 그 주위의 아이들도 다 같이 잘 자라야 한다는 생각 말이야. 아들 친구 아버지가 변호산데, 캠핑이나 훈련 때 자주 만나면서 직업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를 해 준대. 그 영향을 받았는지 자기도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네."

멘토링 프로그램이 운동으로 번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미국 사회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자식을 끌어주는 마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변 아동들을 돌아보는 마음. 미국이 잘 못하는 것도 많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이유는 이런 잠재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라나는 모든 아이가 그들을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인생의 멘토'를 만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케임 행사를 참관하면서 '멘토링'을 하기엔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 내 생각을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들딸들이 보기 좋게 기우로 만들어 주었다.

"지난 여름방학 때 한국 가 있을 때도 엽서를 보내고 입양 부모님들과 이메일도 계속 주고받았어요. 지금 4학년이지만, 졸업한 후에도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요. 그러면 지금 어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고 청소년이 될 때 진짜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쯤이면 저도 뭔가가 돼 있겠죠?" (최지원씨)

"참가 가족들이 에모리대 근처에 사셔서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아이들을 찾아가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얘들이 저를 사촌 형이나 오빠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입양 부모님들도 저희에게 미국 사회에 대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조언들을 해 주시곤 하죠. 아주 길게 가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승규씨)

자료 수집 과정에서 접한 수많은 멘토들의 증언에 따르면,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은 바로 멘토 자신이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이 가을, 나의 시간과 열정을 조금 떼어 다음 세대 누군가에게 멘토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떨까?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한 명의 아이라도 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일. 이 계절이 가기 전에 그 소중한 첫 만남이 시작되길 기대해 본다. 케임처럼. 

 행사 마지막에 다 함께 찰깍!
행사 마지막에 다 함께 찰깍! ⓒ 김승규


#입양#멘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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