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하나를 생각해봐, 내가 그 숫자를 알아 맞춰 볼게."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생각한 숫자를 알아내려면 상대방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설령 상대가 자신이 생각한 숫자를 정확히 맞추더라도 그저 우연의 일치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두번 세번 연달아서 자신의 생각을 알아낸다면 그때는 호기심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물론 상대방은 어떻게 그 숫자를 알게 되었는지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할까. 존 버든의 2010년 작품 <658, 우연히>에 등장하는 인물 마크 멜러리는 어느날 낯선 사람으로부터 황당한 편지를 한 통 받는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X.아리브디스'라는 희한한 필명을 사용한다. 아리브디스는 편지에서 멜러리에게 '숫자를 하나 생각한 후에 편지봉투 안에 함께 넣은 작은 봉투를 열어보라'고 요구한다. 멜러리는 '658'이라는 숫자를 떠올리고나서 작은 봉투를 연다. 그러자 그 안에서 '네가 658을 생각할 줄 알고 있었다'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가 나온다.
희생자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살인범멜러리는 혼란을 느낀다. 자신이 떠올린 숫자 658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숫자다. 대학입학이나 졸업연도 혹은 생일이나 주소 등 자신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그냥 떠올린 숫자일 뿐이다. 아리브디스는 마치 조롱하듯이 숫자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일정 액수의 돈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요구한다.
조금 기분 나쁘지만, 이런 편지를 보내는 행위가 심각한 범죄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아리브디스는 그 이후에도 협박조의 시를 써서 멜러리에게 보낸다. 결국 멜러리는 고민 끝에 전직 뉴욕형사이자 자신의 대학친구인 데이브 거니를 찾아가서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놓고 조언을 구한다.
거니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멜러리는 그 조언을 듣지 않는다. 경찰을 신용하지 못하는 데다가, 경찰이 쑤시고 다니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거라고 믿는다. 협박조의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경찰들이 얼마나 적극적인 수사를 펼칠지도 의문이다. 경찰들은 뉴욕에서 판을 치는 온갖 종류의 강력범죄를 상대하기에도 벅찰텐데.
거니는 멜러리의 이야기를 듣고 왠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거니는 형사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연쇄살인범과 정신이상자들을 상대해온 경험이 있다. 그 경험으로 보건대 아리브디스라는 작자도 얼마든지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도 멜러리는 경찰에 신고할 마음이 없고, 거니의 머릿속에서는 범인이 벌이는 숫자게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거니의 직감은 이 사건이 끔찍한 연쇄살인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아리브디스는 어떻게 멜러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을까, 아리브디스는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
범인이 벌이는 숫자트릭의 정체첫 번째 의문이 트릭에 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의문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잘 만든 범죄소설이 그렇듯이 <658, 우연히>도 역시 이 두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뒤섞여 있다. 작품 속에서 범죄심리학자는 연쇄살인범의 동기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동기는 다섯 가지로 나뉘어질지 몰라도 연쇄살인범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살인을 통해서 엄청난 내적 긴장을 해소하고, 살인을 통해서 권력과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바로 허점이 있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작업이다. 살인으로 긴장을 해소한다는 것은, 마약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약물에 중독되듯이 점점 더 살인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생기고 범인은 거기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 혼란 속에서 범인은 실수를 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형사에게 꼬리를 밟히기 마련이다.
아리브디스는 이런 일반론에서 약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너무도 완벽하게 범죄현장을 조작하는 아리브디스에게서는 좀처럼 허점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아리브디스는 편지만 가지고 희생자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고단수의 능력을 지녔다. 살면서 연쇄살인범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아리브디스 같은 살인범이라면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다.
덧붙이는 글 | <658, 우연히> 존 버든 지음 / 이진 옮김. 비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