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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9일) 아침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 새벽 눈을 뜬 뒤 예삿날처럼 손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밤새 3개 문자가 도착했다. 그 가운데 작가회 발송 문자를 클릭했다.

시인 김규동 회원 별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1599-3114), 발인 10월1일

 고 김규동 선생
 고 김규동 선생
ⓒ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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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김규동 선생이 끝내 두만강에서 썰매를 타지 못하고 떠나신 게 안타까웠다. 1999년 8월 5일, 나는 봉오동 항일독립전쟁 전적지 답사길에 도문을 들렀다. 거기서 북한 남양이 빤히 보이는 조중국경 두만강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강 건너 산하는 분명 내 나라요, 그곳으로 가는 다리가 있어도 건너지 못하고, 중국인들이 얄팍한 장삿속으로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돈을 내고 올라갔다. 거기서 내 조국 산하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마냥 아프기만 했다.

내가 설핏 본 탓인지는 몰라도 국경지대지만 요란한 경비도 없고, 북한 지역은 인적이 보이지 않는 매우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강 건너 마을에 사는 수많은 동포들이 몇 년째 끼니조차 허덕이고 있다니 마음이 더욱 아렸다.

멀리 중국 도문과 북한 남양을 잇는 철교는 두만강을 가로질렀고, 그 다리 아래로 강물은 민족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쉬엄쉬엄 흘러갔다.

문득 어린 시절 이곳에서 썰매를 탔던 시인 김규동 선생의 <두만강>이 떠올랐다. 선생은 통일의 그 날이 오면,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 놓아 울고 난 뒤에, 흰머리 날리며 그 썰매를 타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시를 썼다. 나는 전망대 위에서 백발 날리는 팔순의 시인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에서 개구쟁이 소년처럼 썰매를 타는 통일의 그날 모습을 그려보았다.

 두만강을 가로지른 조중 국경 철교.  철교 가운데가 국경으로 철교 왼쪽 흰 부분은 중국 땅이고, 검은 부분은 북한 땅이다.
 두만강을 가로지른 조중 국경 철교. 철교 가운데가 국경으로 철교 왼쪽 흰 부분은 중국 땅이고, 검은 부분은 북한 땅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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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만강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 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 놓아 울고 나서
 흰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보련다.
              ― 김규동 〈두만강〉

나는 선생의 간절하고도 소박한 꿈이 당신 생전에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두만강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는 돌아와 그때의 사연을 졸저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항일유적답사기)>에 담아 선생께 우송했다. 그 얼마 뒤 선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김규동 선생이 보내신 편지
 김규동 선생이 보내신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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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金躍淵) 선생

박도 선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특히 두만강에 인접한 지역의 묘사는 옛 생각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저의 졸작을 소개해 주신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올시다.

제 욕심 같아서는 명동학교 설립자요 독립운동가인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조금 소게됐더라면 하는 일입니다.

김약연 선생은 너그럽게 생기신,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일 년에 두어 번 함경도 종성 우리 집에 오셨지요. 약국을 경영하시던 아버님이 김약연 선생님 오실 때는 그때 돈 200원, 혹은 300원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곤 하시는 걸 저는 어릴 때 보고 자랐습니다.

제 아버님은 문익환 목사의 선친 문재린 목사와 명동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돈 없는 사람한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치료하고, 겨우 겨우 먹고살 만큼 돈푼이나 모아놓으면, 너희 아버지는 그 지전을 곱게 인두로 다린 뒤, 흰 수건에 곱게 싸서 무릎을 꿇으시고 김약연 선생님에게 드렸다.

그래서 너희들한테는 된장국이나 조밥만 먹였다. 규동아, 너는 입쌀밥이 그토록 먹고 싶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조밥을 하라는 데 너만 입쌀밥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이와 같은 하소연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이야기를 더러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독립운동이 어느 만큼이나 중하고 급한 것인지를 모르시는 탓으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 2000년 11월 17일 김규동

오늘 아침 김규동 선생의 부음을 받은 뒤, 나는 편지함에서 선생의 옥서를 꺼내 다시 읽고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선생께서 저승의 귀신이 되어 고향 두만강에 가셔서 썰매를 타시라고.

"김규동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옵소서. 그리고 썰매를 지치시다가 익사하더라도 꽁꽁 얼어버린 조국통일의 강도 꼭 녹여 주시옵소서."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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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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