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깨친 것이 없어 수미산 주인집으로 머슴 살러 갈거여!
102세에 돌아가신 도천 큰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열반송이라는 것을 이래저래 적지 않게 읽거나 들어 봤지만 지금껏 들었던 어떤 열반송 보다 뭔가가 가슴에 진득하게 와 닿습니다.
지난 9월 28일, 수미산 주인집으로 머슴 살러 갈 거라며 홀연히 세연을 접은 도천 큰스님의 영결식이 있는 지리산 구례 화엄사를 다녀왔습니다. 도천 큰스님은 법랍 83세, 세수 102 세로 입적을 하셨으니 살아 온 세월만으로도 한 세기의 증인이기도 하셨습니다.
도천 큰스님은 '일꾼 스님'
사람들이 말하는 도천 큰스님은 일꾼 스님입니다. 왜 그렇게 일만 하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힘이 드니까 수행이 되고, 수행이 되니까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도천 큰스님에게 있어서 일은 수행이며 기도였을지도 모릅니다.
풍문처럼 들리던 도천 큰스님 이야기에는 일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젊어서의 모습은 지게꾼이었고, 막 노동자였습니다. 젊어서만 그런 게 아니라 90이 넘은 연세에도 일을 하고 계신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7년여 전인 2003년 여름, 도천 스님이 수행하고 계시는 대둔산 태고사를 찾아 갔었습니다.
땀 뻘뻘 흘리며 찾아간 태고사는 비지땀을 흘리며 다시 찾아가도 충분히 좋아 할 만큼 전망과 경치가 좋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가 뵈었던 도천 큰스님의 첫 모습은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시키려는 듯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상의는 흰색 러닝셔츠만 입으신 채 '어이~ 어이~' 하며 소리를 지르고 계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바위투성이에 종각을 세우는 일을 지시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83년간 그렇게 일만 하셨던 스님께서 깨친 것이 없어 수미산 주인집으로 다시 머슴 살러 갈 거라고 말씀 하셨다니 깨우쳤네 하며 도인 행세하는 출가수행자, 얄팍한 지식이나 권력을 배경으로 거들먹거리는 자들을 향한 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강산도 빨리 바뀐다
갑작스레 뚝 떨어진 아침기온을 실감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이젠 '4, 5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로 바뀌어야 할듯합니다. 대전에서 화엄사가 있는 구례까지 가는 길이 공사 중이던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몇 년 사이에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전주까지 가고, 전주서 부터는 국도를 이용해 남원을 지나 구례까지 갔었는데 정확히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은 따라 가다보니 구례화엄사IC가 나옵니다.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려 화엄사에 도착하니 마침 아침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립니다. 은근히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기대하면서도 혹시라도 못 얻어먹으면 아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를 걱정하고 있던 차라서 그런지 여느 때 들었던 목탁소리보다 반갑게 들립니다.
산사에서 먹는 아침밥은 또 다른 별미입니다. 뚝딱 아침을 먹고 둘러보니 영결식장은 대웅전과 각황전 아래 마당에 준비되고 있고, 연화대는 화엄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있는 부도전 건너 주차장 공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대형 주차장이었던 곳에 황토를 깔고 그 위에 만들어 놓은 연화대는 규모가 소담합니다. 숯을 넣고 나무를 쌓은 후 멍석을 덮고 그 위를 흰색 천으로 다시 덮어 갈무리한 연화대입니다.
날이 밝으니 여기저기서 왔다는 조문객들로 화엄사 경내가 붐비기 시작합니다. 하기야 법랍이 83년이나 되고, 상좌에서 증손상좌까지로 대를 이은 스님 제자가 200명 가까이 되니 전국 어느 곳이라고 큰스님의 제자가 없겠습니까.
10시가 되니 범종을 5번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영결식이 시작됩니다. 스님의 법구는 영결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식단 뒤에 모셔졌습니다. 12명이 멜 수 있도록 나무로 짠 상여틀에 생화로 포장을 한 스님의 법구가 다소곳하게 올려져있습니다.
식순에 따라 영결식이 진행 됩니다. 영결식장을 가든 메운 불자들이 둔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어떤 사람은 스님과의 사별을 아파합니다.
영결식을 마치니 연화대가 마련되어 있는 다비장으로 스님의 법구를 옮기는 이운행렬이 이어집니다. 펄럭이는 만장에 화엄사 계곡이 오방색으로 넘실댑니다. 펄럭이는 만장에 애달픈 마음, 사별의 아픔, 깨우침의 글, 애틋하고 구구절절한 글귀가 요렇게 조렇게 앉아 껄껄 거리고 있습니다.
영결식장을 출발해 걸음 없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스님의 법구가 일주문으로 나섭니다. 영결식장을 출발하며 대웅전과 각황전을 향해 이미 3번씩의 절을 드렸건만 일주문을 나서며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인사를 다시 한 번 더 올립니다. 졸졸 거리며 흐르고 있는 물줄기를 따라 스님의 법구가 다비장으로 이운되고, 다비장으로 이운 된 스님의 법구는 연화대로 모셔집니다.
스님의 법구를 모신 연화대에 불을 붙입니다. 대나무로 기다랗게 만든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수북하게 앉아있는 연화대에 불을 붙이니 희뿌연 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냅니다.
종잡을 수 없게 이리저리 부는 바람을 타고 산발이라도 한 듯 뿌연 연기를 이리저리 뿜어댑니다. 불을 붙인지 3시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불꽃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자욱합니다.
화엄사 연화대 역시 열기를 내부에 가두는 속불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열원이 될 숯과 나무를 쌓고, 그 위를 덮은 멍석에 물을 계속 뿌려줘 열기를 안으로 가두니 속에서는 불이 훨훨 타고 있을지라도 겉으로는 불꽃이 보이지 않는 그런 방식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니 물 뿌리기를 중단합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다며 물 뿌리기를 중단시켰다고 하였습니다. 물 뿌리기를 중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니 멍석 사이 여기저기서 열기들이 기웃거립니다. 기웃거리던 열기들은 어느새 벌건 불꽃이 되어 멍석 밖으로 날름거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정근, 당연한 도리
거화를 한지 4시간이 지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비장에서조차 들리지 않았던 '나무아미타불'정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정근하던 스님이 지칠 때쯤이면 다른 스님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나무아미타불을 이어갑니다. 스님들이 쉬지 않으니 스님들 뒤에 앉아 있는 불자들도 멈추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힘들어하니 스님 한 분이 신도들을 도닥거리며 힘을 복 돋아줍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언제까지 할 예정인지가 궁금해 조금 전 신도들을 도닥거리던 스님께 '나무아미타불을 언제까지 할 것인지'를 여쭤봤습니다.
스님은 도천 큰스님이 맏상좌로 정묵 스님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시더니, '나무아미타불 정근? 그거 계속할겁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최소한이며 당연한 도리라고 말씀하시니 잃어버렸던 뭔가를 되찾은 듯 야릇한 기쁨마저 가슴에입니다.
인간 백 년 산다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100년을 더 사신 도천 큰스님께서는 동진출가하여 83년을 출가수행자로 사셨으니 근심 걱정도 적었을 거며, 잠든 시간도 분명 적었을 겁니다.
범부의 일생이었다면 단 사십도 안 되는 삶이었겠지만 도천 큰스님의 일생은 제할 것 다 제하더라도 7, 80년 이상은 되리라 생각됩니다. 이승에서 사시는 백 년 동안, 7,80년 이상 머슴처럼 수행하시고도 얻지 못한 깨달음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이승에서 머슴살이로 받은 새경이 출가수행자로서의 고단함 이었다면 수미산에서의 새경은 꼭 깨달음으로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깨달음 새경 많이 받아 크게 깨달은 선지식으로 다시 오시어 상품상생 누리시길 기원하며 다비장을 뒤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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