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은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이 시민들의 변화 요구를 반영해 만든 공동 후보입니다. 야권통합단일후보는 연합과 연대라는 틀을 소중히 하고 발전시키라는 요구와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서울을 만들라는 시민의 요구를 동시에 가진 후보입니다."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등록을 마친 박원순 시민후보의 첫 일성입니다. 민주당 입당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기호 2번 달지 않고는 한국에서 야당이 '이기는 선거'를 만들기 어렵다는 전략가들의 판단이 있었을 텐데, 그는 무소속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도대체 뭘 믿고 이런 길을 잡았을까요?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가 정치에 나서는 까닭 진정으로 그는 시민정치와 시민의 힘을 믿는 것 같습니다. 10월 3일 예상을 뒤집어엎고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쏟아져나온 유모차부대와 '백팩맨'들의 힘을 아는 것 같습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등 야당들의 힘과 일반 유권자들의 '환상적인 결합'이라면 결코 이 선거를 한나라당에게 내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서울시장 선거 '이후' 같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후'에 더 주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전에 걸린 자신의 선거와 당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새 판 짜기를 할 것인가 더 골몰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고, 밖에 텐트를 치고 다른 야당들에게 모두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건 고도의 전략적 판단처럼 보입니다. 말 그대로 '문성근의 제3지대 백지신당론'을 박 후보가 실천하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습니다.
박원순과 랠프 네이더사실 야권연대는 꽤 오래된 야당의 숙제였습니다. 시계를 돌려 2009년 11월로 가보겠습니다. 그해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간 진보언론(<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한겨레> <프레시안>)은 '야당 청문회'를 공동주최했습니다. 왜 했냐고요? 답답해서요.
뭔가 새로운 정치의 비전이 필요한데, 야당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나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당 대표 급을 모두 불러들였죠. 우리, 얘기 좀 하실까요? 하고 말입니다.
나와 주신 분들은 대략 이랬습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천호선 국민참여당 홍보위원장,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당시엔 유시민 대표가 당을 맡기 전이라 천 위원장이 대신 출석한 셈이죠.
4개 진보언론 기자들이 마련한 만큼 송곳 질문과 날선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혹독할 만큼 맵차게 묻고 따졌죠. 상호비방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야권의 연대연합은 시대정신이라는 입장을 모아냈습니다. 다만, 어떻게 통합할 것이냐, 경로와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매체를 통해 연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상호 확인한 정당 관계자들은 이듬해 6월 2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로 상당한 쾌거를 거뒀습니다. 함께 도왔고, 함께 이겼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7·28 은평을 재보선, 올 4·27 재보선에선 각각의 이익을 둘러싸고 잡음이 상당했지요. 패악을 부린다고 욕도 먹고, 상호 비방하는 공중전도 치열했습니다.
이 모습은 야권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에 또 다시 상처를 냈지요. 진보적 유권자들은 또 다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배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볼 것인가, 못내 답답해하는 심경토로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를 도배했습니다.
그러던 때 <진보집권플랜>도 등장했고, <조국현상>도 나왔습니다. 4·27 재보선 당시에는 정치에 무심하기로 유명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출현했습니다. 야권연대의 성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문 이사장은 일생 처음으로 특정정당 후보의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습니다.
선거철만 돌아오면 출마권유를 받던 박원순 후보도 민주정부 10년간 단 한 번도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7년 대선 당시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과 함께 대선후보로 거론됐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원순이 정치한다고 하면, 랠프 네이더 생각나지 않아요?"미국의 변호사로서 소비자 운동과 공해추방 환경운동을 했던 NGO 지도자, 랠프 네이더에 자신을 비유했지요. 랠프 네이더는 미국의 환경운동을 이끌다 1996년 녹색당으로 출마해 2000년 미국 선거에서 전국 유효 투표의 2.7%를 얻는 파란을 일으켰고, 녹색당을 제3당의 위치로 올려놓았지요. 불과 수천표 차이로 재검표까지 했던 플로리다 주에서 랠프 네이더가 수만 표를 얻어 결과적으로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로부터 부시 당선의 일등공신이라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이런 인물에 자신을 비유하며 농담할 정도로 그는 정치에 뜻이 없었습니다. 시민운동 열심히 하면, 그게 곧 정치라고 믿던 때지요. 그러나 그가 생각하던 대로 시민운동을 할 수 없게 됐지요. 희망제작소를 통해 일구려던 작은 활동의 씨앗들이 점점 말살됐습니다. 심지어 국정원으로부터 명예훼손소송까지 당했지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바라지만, 우리가 믿던 상식이 MB의 출현과 함께 상식이 아닌 게 돼 버리면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의 한계 앞에 문재인도, 박원순도, 안철수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박원순 좌로 심상정, 우로 손학규 어때?이유는 딱 하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가치와 실현 때문이지요. 정당이 잘했다면, 이들이 왜 정치 일선에 나섰겠나, 더 이상 그런 말은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해 안하겠습니다. 다만, 이들이 정치로 뛰어들어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이제는 정치권도 재지 말고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2 지방선거 때 내세웠던 '반MB'를 넘어, 이제는 대한민국의 구체적 비전과 정책으로 얼토당토않은 기득권과 맞붙어 승부할 수 있는 세력의 재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필요충분조건 앞에 정치권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국민이 바라는 거대한 희망 앞에, 무수한 난제 앞에, 정파의 이익을 내세우며 편 가르기 하면 그것만큼 졸렬해 보이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이런 건 어떨까요? 박원순 후보를 가운데 두고 좌로 심상정, 노회찬, 이정희, 강기갑, 권영길, 우로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이 서는 모습. 우리 1분만 머릿속으로 상상해봅시다. 그림 되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림 '쎄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국민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1987년 양김 분열 이후 지난 24년간 이 그림을 원했을지 모릅니다. 서로 갈라져 싸우기보다는 야권이 하나로 힘을 모아 새로운 정치의 역사를 다시 써주기를,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민의가 제대로 대의되기를, 경제적 대안을, 사회적 대안을, 정치적 대안을 똑바로 만들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박원순 후보가 민주당 밖에 깃발을 꽂고 다 함께 모여 새롭게 판을 짜자고 외치니, 진보정치인들이 너도나도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이날 오전 트위터를 통해 "박원순 후보 무소속으로 후보 등록하셨네요"라며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작은 힘 보태렵니다"라고 나섰지요.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통합연대' 차원에서 박원순 후보를 돕겠다고 밝혔습니다. 심 전 대표는 "(박원순 후보는) 그 누구보다도 서울시민의 시장으로서 자격을 갖춘 분"이라며 "통합연대 차원에서도 저희가 적극적으로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노동당도 강원도에서는 공동정부 약속을 파기했지만 서울시장 선거는 미리 약속한 만큼 선거대책본부에 합류해 적극 돕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민주당의 혁신이 통합의 관건이다사퇴 논란을 빚었던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아예 박원순캠프 선거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았고, 이인영 최고위원은 선거본부장을 맡았습니다. 서울시의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도 적극 나서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의지를 모아낸다면,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통합국면도 오히려 쉽게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 물론 이 문제가 있지요. 만일 민주당 의원들이 다음 주 한나라당과 함께 한미FTA 국회 비준에 나선다면 모든 게 "꽝" 되겠지요.
설마, 또 그러겠어?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지난 4·27 재보선 직후 민주당이 한-EU FTA 비준안 처리를 합의해,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로텐더 홀에서 철야농성하는 걸 봤지요. 당시 이정희 대표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의 내민 손을 무참히도 거절했던 풍경을 기억합니다.
민주당은 이 점을 늘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9년 11월 진보언론들이 주관한 토론 평가 기사의 제목이 뭐였냐면요. 민주당의 혁신이 진보연합의 관건이다! 이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