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도가니> 열풍이 뜨겁습니다. 영화 속 안개의 도시 '무진'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제로 광주 인화학교와 인화원이란 청각·언어장애인 시설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4년 이후 지금까지 장애인시설 생활인의 인권 확보와 탈시설을 위해 활동해 온 인권활동가입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제기해 온 인권활동가 입장에서 '도가니 열풍'은 반가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영화 한 편의 위력이 이렇게 크구나! 정말 다행이다! 한편 왜 우린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할까?' 마치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반짝 대응에 열을 올리는 정치권과 언론, 행정당국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아무튼 이 열풍을 타고 반드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통해 탈시설화, 시설생활인 인권확보, 사회복지법인의 민주화와 공공성 확보를 이뤄내야겠지요.
며칠 전 장애인권단체활동가들 간의 메일링 리스트로 미국 국제 발달장애우 협회 전현일 선생님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최근 도가니 열풍과 1970년대 미국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는 글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국제발달장애우협회(IFDD)의 전현일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도가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온 사회를 휩쓰는 것을 보면서, 1970년대의 미국에 있었던 상황과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잠깐 그때 있었던 사태를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문제가 벌어진 곳은 뉴욕주에 있던 발달장애 아동과 거기서 성장한 성인을 수용하는 윌로우브룩(Willowbrook)이라는 대형시설이었습니다. 이 시설은 당초 지을 때 최대 수용인원이 2000명이었는데, 1965년에 이미 6000명 이상이 수용되고 있었습니다. 1965년,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이 비좁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물과 쓰레기 속에서 살고 있고, 그들이 입은 옷은 누더기나 다름이 없고, 사는 환경은 동물원의 짐승들이 사는 곳만도 못하다"고 비평했습니다. 그 후 도나스톤(Donna Stone)이라는 아동 학대에 대항하여 싸워왔던 운동가가 사회복지과를 졸업한 학생인 것처럼 가장하여 그 시설을 방문한 후, 언론사에 자기가 목격한 것을 보고 했습니다. 이 정보를 들은 뉴욕 텔레비전 방송사의 헤랄도 리베라 기자가 당시 일반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시설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일련의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대대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대형 장애인수용시설의 실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주목 받게 되었습니다.1972년 3월, 윌로우브룩에 대한 집단소송이 연방법원에 제기되었고, 1987년 마침에 폐쇄되었습니다. 폐쇄 당시 수용인원은 250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 후 미국 전역에 퍼진 탈시설 운동 그리고 인권법 제정의 강력한 촉매가 되었습니다. 도가니로 인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의 지치지 않는 노력으로 우리나라에도 지적, 발달장애는 물론, 모든 장애가 있는 사람의 인권과 복지에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도가니 열풍' 아동성폭력 문제는 물론 탈시설화도 고민해야미국 윌로우브룩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도가니 사태에 쏠린 여론은 아동성폭력 문제와 사회복지법인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죠.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요. 아주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이번 도가니 사태가 '탈시설 운동'에 대한 전망을 갖게 하는 체험이 되면 좋겠습니다. 장애인생활시설의 신설을 금지하고, 이미 존재하는 대규모 시설 해체를 위한 국가와 지자체 책임이 명시되며, 탈시설-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 정책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대규모 시설 수용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탈시설화 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시설에서 장애인들은 매일 똑같은 시각에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똑같은 시각에 잠을 자야 합니다. 매일 똑같은 시각에 밥을 먹고,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1년 365일 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이곳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정해진 일과가 일 년이 하루처럼, 십년이 하루인 것처럼 반복됩니다. 이것이 시설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의 일상입니다. 여기에 도가니 같은 폭력이 없더라도, 여기에 도가니 같은 끔찍한 상처가 없더라도, 여기에 살아 숨 쉬는 삶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 제3회 '이음여행'이 있었습니다. 시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장애인들의 네트워크 '이음센터'와 제가 몸담고 있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힘을 합쳐 여는 행사입니다. 매번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시설은 어떤 의미인가요?" "감옥", "올가미", "메아리", "동물원", "벽을 지나면 또 다른 벽과 부딪히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곳"(미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곳"(메아리), "너무 외진 곳에 있고 가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구경하러 오는 곳"(동물원)… 장애인 스스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온전한 인격체로 존엄을 누리고, 자유로운 삶을 스스로 계획한다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장애인 대규모 집단 수용' 정책으론 문제 해결할 수 없어도가니 사태를 맞아 힘없고, 가녀린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일상화된 야만에 눈감던 정치권과 행정당국과 언론들이 약속한 듯 호들갑을 떱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의 힘이지요. 그것이 여론의 힘입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그 거대한 '침묵의 도가니'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에게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고 일깨우는 것, 제 주변 활동가들이 10년, 20년 발을 동동 구르며 애써온 일들을 영화 한 편이 해냈으니 제 마음 한편에 자리한 씁쓸함을 어쩌지는 못하지만 참 다행스런 일이지요.
하지만 이번 열풍이 가라앉기 전에 무엇보다 정부의 탈시설화 정책선언을 받아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욕심일까요? 한편으론 이 열풍이 가라앉을 때 즈음 또 다시 2007년 사회복지법인 공공화를 가로 막았던 한나라당과 한기총 등이 지금과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사회복지법인 투명성 인권 강화 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회복지법인의 투명화, 말이 좋지요, 하지만 그네들에겐 의지가 없습니다. 더욱이 기존 대규모 시설을 해체할 의지는 더더욱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근거없는 불신이 아닙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네들이 보여준 모습을 그저 잠시 떠올려보기만 해도 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의 깨인 의식이 필요하고, 좀 더 넓고, 깊은 시야가 필요합니다.
전현일 선생님이 말씀하시듯, 또 서구 복지국가들의 선례에서 보듯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가녀린 아이들에 대한 성폭행 사건에 대한 분노만은 아닙니다. '항거불능'을 엄격히 해석해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항소법원에 대한 비판만은 아닙니다. 장애인이 스스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유,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삶,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장애인'과 '정상인'으로 분리된 삶이 아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규모 시설 수용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합니다. 그 일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정부가 강력한 시설화 정책에 대한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복지부는 이 문제를 원점에서 풀 것 같지 않습니다. 보건복지부가 만든다는 사회복지법인 투명성 인권 강화 위원회에 시민단체 및 장애인 인권단체 관계자도 포함된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실질적인 전문가인 단체와 조직, 활동가들은 해당 위원회에서 빠져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시설인권상황에 대한 조사를 또다시 진행하겠다는 것이 복지부의 대응수준이니 참 답답한 현실입니다.
이미 수차례 조사되고 알려진 내용을 취합하고, 원점에서 문제를 해결할 정책대안을 모색해야 할 복지부가 7년 이상 이 문제를 제기해 온 사람들에게 위원회 참여조차 제안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탈시설위원회가 아닌 투명성위원회라는 위원회 명칭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제안할 탈시설화의 요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입니다.
탈시설정책위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탈시설정책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월례세미나를 개최하는 데, 지난 3월에는 김동호 전 복지부 장애인권익과장이 발제자로 와서 정부의 장애인시설정책에 대해 발제를 했었습니다. 그가 재임기간에 추진되었던 몇몇 시설 개선 정책에 대한 발제 후 토론이 이어졌는데요. 그 와중에 그는 "우리나라에 시설 개혁 정책은 있었지만, 탈시설화정책은 아직까지 없었던 게 맞다"고 시인했습니다. 탈시설정책위원회는 2004년 이후 지금까지 장애 당사자와 가족, 활동가, 실천가, 변호사와 의사 등 전문가, 학자들이 모여 시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연구하고 실천해 온 자발적 시민위원회입니다.
영화 <도가니>가 몰고 온 이 열기가 탈시설화의 물꼬를 트길 간절히 바랍니다. 더불어 시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대규모 집단 수용 정책은 아무리 안전장치를 만들어도, 법인을 민주화하고 공공화해도, 절대 인권이 보장될 수 없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박숙경씨는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시민교육 전담교수로 장애인권운동을 해왔으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와 탈시설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서비스 신청권 확대 운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