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손학규 대표와 친하지만, 지난 1년간 불편했습니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 참여당이 잘해보려고 했는데 일이 잘 안 돼, 솔직히 거시기합니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 제 문자도 씹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다 모였습니다. 왜일까요? 누구 때문에? (청중 : 박원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13일 아침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솔직한 말로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화물경차를 개조해 만든 좁다란 유세차 '원순씨의 구석구석 정치카페'에 올라탄 그는 지난 1년여 시간동안 몇 번의 경선과정으로 뻑뻑해진 '관계'에 기름칠을 했습니다.
유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지난 4.27 재보선 김해을 선거를 떠올린 사람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이는 6.2 지방선거 경기지사 선거를, 7.28 은평 재보궐선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삐끗했던 관계자들은 대개 멋쩍게 웃더군요. 제가 다 봤습니다, 헤헤!
스타급 정치인과 운동가 총출연...무대는 작고 소박여하간,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박원순 야권단일후보 선거운동 출정식'에는 유 대표가 언급한 정치인 말고도 한명숙 전 총리, 민주당 정동영, 정세균, 박영선, 박선숙 의원, 진보신당 김혜경 비대위원장, 심상정 전 대표, 이수호 민주노총 지도위원, 남윤인순 혁신과 통합 공동대표 등등 야당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총출동했습니다. 말 그대로 '스타급' 정치인과 운동가들의 총출연이었지요.
이 정도의 출연진이라면 무대도 엄청나게 화려했겠지? 생각하셨다면 완전 오산입니다. 무대는 너무 작았고, 소박했습니다. 과격한 사람들이 보기엔 초라할 정도였지요. 시쳇말로, 야5당과 시민사회 전체가 힘 모아 만든 유세가 고작 이거야? 오랜 세월 당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보기엔 민망한 수준의 작은 무대였죠.
동네 시의원 선거를 해도 1톤 트럭 개조한 유세차, 빵빵한 앰프, 화려한 율동단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데, 박원순 후보는 천만 서울시민 상대로 한 서울시장 선거에 화물경차라니요. 아무래도 박원순 후보는 기존 정치의 공식을 파괴할 작정인 모양이다 생각됐습니다.
캠페인송도 샤방샤방, 율동단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시민 유세'는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대화마당' 콘셉트라고 하니, 평소 우리가 보던 선거와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박원순 선대본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 아이디어냐고. 말 대신 눈짓으로 연설 중인 박 후보를 가리켰습니다. 정말? 확인하고 싶었는데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연설로 대신 설명해주더군요.
"여러분 서울시장 선거 유세차량, 이렇게 아담하고 작은 것 보셨나요? 이렇게 작을 거라고 예상이나 하셨어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박원순 후보의 철학이 담긴 유세차입니다. 이번 선거 기간, 선동하거나 남 비방 없이,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 하지 않고 오직 사람과 교감하는 선거운동을 할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날마다 네거티브 수위를 높이고 맹공을 퍼붓습니다. 선거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 네거티브 공세가 여론에 먹혀들어 13일자 <서울신문>이 보도한 대로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 후보를 3.1%p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네거티브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연설을 좀 들어보실까요?
"힘들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시민들 곁으로 다가가 위로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겠습니다. 지난 1주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거대한 권력을 활용해 항공모함에서 쪽배인 저를 포격했습니다. 그러나 쪽배 박원순,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유세 차량 작게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기업이 만들어 준 이 옷, 앞치마 입고 고통을 안겨준 이명박-오세훈 10년을 깨끗이 설거지하겠습니다. 이 옷을 입고 미래 서울을 요리하겠습니다."그는 이번 선거의 콘셉트를 아무래도 '마음의 정치'로 잡은 것 같습니다. 정치는, 권력은, 늘 탐욕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는 그 정치공식을 깨버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착한 정치'도 먹힌다, 뭐 이런 걸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진심을 다해 공략하면 네거티브 따위는 걱정 없다, 생각한 것일까요?
"정치가 그렇게 쉬워보이냐?"정치전문가들은 이 얘기에 피식 웃습니다. 너무 순진한 것이냐, 아니면 어디 좀 모자란 사람이냐 되묻습니다. 정치가 그렇게 쉬워보이냐 되레 묻습니다. 정치가 '착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정치판인데, 잠깐 한 눈 팔면 누군가 끼여들어 판을 교란시키는 게 정치인데, 그렇게 멍청한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한데, 출정식 현장에 포착된 한 장면이 묘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느닷없이 난입한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일종의 할머니 습격사건이죠. 재개발 문제로 억울한 일을 당한 이 분이 격정을 참지 못한 채, 기자들에게 문건을 뿌리며 눈물을 쏟아내자 박 후보는 그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행사는 '고'해야 하는데, 박 후보는 할머니의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일반 정치행사 같았다면 안전요원들이 투입돼 '제거하듯' 할머니를 밖으로 모셨겠지만, 사람들은 박 후보와 맞잡은 할머니의 손을 좀체 분리하지 못하더군요.
왜 사람들은 그 할머니와 박 후보의 손을 일거에 떼어내지 못했을까요? 상처와 고통의 공감대? MB정부 내내 "대한민국은 시끄러운 나라"라는 식으로 굴욕을 당한 시민들의 연대감? 이런 것들이 모두 복잡하게 얽힌 게 아닌 가 싶습니다.
어쩌면 '안철수와 박원순의 단일화' 드라마에 감동 먹은 국민들이 이제 그만 한국정치도 국민과 제대로 눈을 맞추고, 소통하며, 국민의 뜻에 따라 가기를 바라는 기대가 할머니와 박원순 후보의 맞잡은 '손'에 함축됐다고 보면 과도한 해석일까요?
국민의 마음을 읽고, 똑바로 대의하는 정치를 이제 그만 좀 보고 싶다는 기대, 더 이상 꿈에 그쳐선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