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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울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것은 여러분도 잘 알지요. 그러니까 평소처럼 개울 다리를 지게 작대기로 투덕투덕 짚으면서 건너다 그만 다리에서 떨어졌지 뭡니까? 그때 지나가던 땡중만 아니었으면….

아무튼 그때 그 땡중 덕분에 겨우 목숨은 구했는데 이 중이 하는 말이 공양미 삼백 석이면 제 눈을 뜰 수 있다지 뭡니까? 그만 그 말에 혹해서 약속을 한 것이 죄였지요. 그렇게 느닷없이 한 약속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딸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청이가 그 추운 바닷물에 빠졌잖아요. 요즘처럼 가볍고 들고 다니기 편한 흰지팡이가 있었다면 개울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심청 이야기는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언제부터 시각장애인들이 흰지팡이를 들고 다녔느냐? 그게 말이죠.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해서 이후 영국과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상륙한 뒤 전 세계 시각장애인의 보행 도구로 표준화되었습니다.

1931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개최된 국제라이온스대회에서 흰지팡이의 기준이 설정되었으며 그 후 미국의 페오리아시에서 개최된 라이온스클럽대회에서 "페오리아시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흰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흰지팡이에 대한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하네요(자료출처 :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홈페이지(http://www.kbuwel.or.kr).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상징

 국립창극단이 공연한 <심청전>의 한 장면.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대목.
국립창극단이 공연한 <심청전>의 한 장면.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대목. ⓒ 국립극장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도로교통법에 흰지팡이에 대한 규정이 처음 마련됐습니다. 현재 도로교통법 11조를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도로를 보행할 때는 흰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고, 같은 법 48조에는 "모든 차의 운전자는 어린이나 유아가 보호자 없이 걷고 있거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흰색 지팡이를 가지고 걷고 있을 때에는 일시 정지하거나 서행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운전하시는 분들, 흰지팡이 보면 그 자리에 서거나 천천히 운전해주세요.

지금이야 흰지팡이가 재료도 좋고 가볍기도 하지만 아직도 나무를 깎아 만든 흰지팡이를 사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 땅에 사는 시각장애인들은 스텐레스 재질이나 비행기 만드는데 쓰이는 듀랄루민 같은 가볍고 강한 재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텐트 폴대같이 안에 고무줄이 있어서 착착 접을 수 있는 것을 많이 사용하는데 몇 년 전에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에서 안테나형으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흰지팡이도 나와서 아주 편합니다.

어떤 것은 흰지팡이 안에 초음파 발신장치가 있어서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진동으로 알려 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 많이 좋아졌지요.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걸음을 걸을 때 보조도구로만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니까 조심해주세요"라거나 "나는 당신의 친절이 필요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한 거죠. 일종의 시각장애인의 상징인거죠.

그래서 1980년 세계시각장애인연맹(WBU)은 10월 15일을 '흰지팡이의 날'로 정하고 "흰지팡이는 동정이나 무능의 상징이 아니라 자립과 성취의 상징이다. 전 세계의 시각장애인 기관과 정부는 이날을 기해 시각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행사와 일반인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0월 15일을 전후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한시련) 및 각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흰지팡이의 날 행사를 벌이고 있지요. 올해 서울의 경우 10월 27일 '서울숲' 야외무대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그날 이 심봉사도 간만에 숲에서 좋은 공기도 쐬고 노래도 한 곡조 뽑으렵니다. 그러다 혹시 압니까? 1등이라도 해서 선물이라도 타게 되면 우리 청이에게 오랜만에 아빠 노릇 한번 하게 될는지….

막 잡아끌지 마세요... 시각장애인 안내는 이렇게

사실 말이죠. 나같이 전혀 안 보여서 흰지팡이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편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시각장애인인 줄 알고 도와주는 일이 많거든요. 그런데 조금 보여서 흰지팡이 안 들고 다니는 사람이 길 물어보려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째려보곤 하지요.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시각장애인들이 그런 하소연 많이들 합니다. 아예 안 보이는 사람만 시각장애인인 게 아니고 저시력인도 시각장애인이죠. 그러니 잔뜩 눈을 찌푸리고 있거나 행동이 이상하게 굼떠 보이는 사람이 길을 물어보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말고 '저 사람도 시각장애인이구나' 하면서 친절히 대해주세요.

그런데 여러분, 시각장애인한테 길 안내해주는 건 좋은데 막 잡아끌지 좀 마세요. 어떤 사람은 내가 길 물어보면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거나 흰지팡이를 잡고는 그대로 끌고 가곤 하는데, 이러면 우리 시각장애인들 엄청 스트레스 받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도 기술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먼저 당사자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의사를 물어보세요. 시각장애인들은 익숙한 곳에서는 혼자서도 잘 가거든요. 괜히 그럴 때 도와준답시고 막 끌고가면 나중에 자기가 어디있는지 모르게 되고 그러면 아주 많이 당황하게 되거든요.

안내를 하려면 먼저 "어떤 방법으로 안내하면 편할까요?"라고 물어봐주세요. 당사자마다 안내를 받을 때 편한 방법이 모두 다르거든요. 보통은 안내하는 사람이 시각장애인 왼편에 서고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나 어깨를 시각장애인이 잡게 하는 것이 편합니다. 이렇게 하면 시각장애인은 안내를 받으면서 자신의 흰지팡이로 평소와 같이 길의 장애물 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또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제발 자기가 누군지 알려 주세요. 그냥 "안녕하세요?" 요렇게만 하면 아는 사람은 알 수 있지만 '이 사람 누구지?'라면서 헷갈릴 수 있어요. 그렇다고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뭣하고 말이죠. 또 식당 같은데 가서 아무런 정보 제공 없이 "뭐 먹을래?" 이렇게 물어오면 아주 난처합니다. 그 식당이 뭐하는 식당인지 알아야 주문을 하든지 말든지 하죠. 자기는 메뉴판 쳐다보니까 뭐가 있는지 알지만 시각장애인은 모르거든요.

또 메뉴를 읽어줄 때 제발 가격도 읽어주세요. 나같이 가난한 사람은 메뉴의 종류보다 가격에 더 관심이 많거든요. 이건 우리 청이도 잘 못 고치더라고요. 돈은 자기가 낸다고 아무거나 먹으라고 하지만 애비 입장에 그럴 수 있나요 딸이 살 때일수록 제일 싼 거 먹어야 하는데 가격을 모르니, 원….

 배우 김하늘이 시각장애인 역할을 맡은 영화 <블라인드>
배우 김하늘이 시각장애인 역할을 맡은 영화 <블라인드> ⓒ 문와쳐

나도 <진보집권플랜>이나 <닥치고 정치> 읽고 싶다우

우리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압니까? 그게 말이죠. 돌아다니는 것과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돌아다니는 것은 요즘에야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으니 사람들한테 길 물어가며 조금 고생하면 해결은 되는데, 정보 습득은 이게 그리 어려워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내가 이래 뵈도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렇지만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왜냐? 책이 없기 때문이죠.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점자를 아는 사람은 점자책을 읽거나 점자로된 파일을 기계(점자단말기 : 점자파일을 넣으면 점자로 표시되는 장치)를 이용해서 읽을 수가 있지요. 나처럼 점자를 모르면 책을 녹음해 둔 테이프(음성도서)를 이용할 수도 있고 요즘엔 시디에 담아 페이지나 목록별로 이동이 가능한 전자음성도서(데이지도서)를 통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텍스트 파일이나 아래아한글 파일로 된 문서가 있으면 컴퓨터를 통해서 읽을 수도 있고 말이죠. 컴퓨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우리 시각장애인도 컴퓨터를 할 수 있다오. 또 요즘엔 책 목서리에 가로 세로 1㎝ 크기의 2차원 바코드에 책 내용을 넣어놓고 그걸 스캔해서 읽는 기계도 나와 있고, 그냥 스캐너 위에 보통 책을 올려놓으면 자동으로 읽어 주는 기계도 나와 있기는 합니다(아직 인식율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그림이나 표가 없는 도서의 경우 80~85% 인식 가능. 표나 그림이 많으면 인식율은 현저히 떨어짐).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라우. 예를 들면요, 일본의 토쿄도립중앙도서관에는 약 160만 권의 책이 있는데 이 도서관에서 가지고 있는 시각장애인 도서는 겨우 5천 권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용 도서 컨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요.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책이 거의 없어요. 초중고 교과서는 어찌어찌 구할 수 있기는 한데, 대학 교재는 거의 없는 실정이고 초중고생도 교과서 말고 참고서나 문제집는 거의 없지요. 일반 교양 도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이야기만 해도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넘게 해도 시간 모자라니 그만두렵니다. 어쨌든 우리도 책 많이 볼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져야 돼요.

시각장애인 위한다며 '왕따'시키는 사회

그래도 요즘은 세상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양한 방면에서 우리 같은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려고 애쓴 여러분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우, 시각장애인 위한다며 자꾸 왕따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흔히 말하는 '시각장애인 전용'이 그거죠. 왜 자꾸 전용을 만드는지….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아까 내가 시각장애인도 컴퓨터를 쓸 수 있다고 말했지요. 스크린리더라고 하는 프로그램 덕분이에요. 이걸 쓰면 컴퓨터 화면의 글씨를 음성으로 읽어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엑스비전(Xvision)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센스리더'라고 하는 제품이 있어요. 그 회사 사장도 시각장애인인데 그 사람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이거 이용해서 인터넷도 하고 책도 읽고 지금 나처럼 이렇게 여러분께 넋두리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인터넷 홈페이지는 시각장애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워요. 뭔 놈의 화면이 그리 화려한지. 플래시에 배너에, 암튼 그런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시각장애인을 위한다며 시각장애인용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어요. 거기까지는 좋은데 시각장애인용 홈페이지는 컨텐츠가 너무 부실해요. 공영방송인 KBS도 MBC도 마찬가지입니다.

 KBS 누리집 갈무리
KBS 누리집 갈무리 ⓒ 한국방송

 KBS 시각장애인용 누리집 갈무리
KBS 시각장애인용 누리집 갈무리 ⓒ 한국방송

여러분도 이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장애인용 누리집과 시각장애인용 누리집은 컨텐츠의 양에서 절대적으로 다르죠? 방송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짓은 국회도 하고 대법원도 해요. 그냥 '웹표준'만 지키면 되는데 말이죠. 세계적으로 웹표준이 있어요. 'W3C'라는 건데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한국형 웹표준지침'이란게 있어요. 뭐 대단한 거 아니예요. 여러분이 '구글(google.com)'과 '네이버(naver.com)'를 비교해 보세요. 네이버가 조금 더 화려하고 구글이 좀 단순하죠. 구글은 시각장애인들이 거의 모두 접근이 가능해요.

인터넷만 그런게 아니예요. 방송통신위원회가 시각장애인을 위한다며 보급하는 화면해설 수신기라는 것이 있어요. 화면해설 방송이 나오는 기기이죠. 이 기기에는 스크린이 없어요. 그러니 시각장애인만 이용하겠지요. 우리 청이가 놀러 오면 청이는 거실에서 큰 텔레비전 보고 이 애비는 골방에서 화면해설 수신기 들어야 해요. 왜 이래야 되지요? 그냥 보통 텔레비전에 화면해설 기능 달면 되잖아요(관련기사 : 시각장애인들, 화면해설 수신기 별로 안 좋아해요).

은행에 가면 시각장애인 전용 자동지급기가 있고 시각장애인용 전용 핸드폰이 있어요. 마치 임대주택 지어놓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벽으로 갈라놓는 꼴이죠. 더불어 살자고요. 그냥 같은 물건 쓰면서 같은 생각 하면서 서로 몸 부딪히며 뒹굴며 살면 안 되나요?

벽을 만드는 것도, 벽을 허무는 것도 사람이다

에고, 여러분. 이 노인네의 넋두리가 길었죠? 흰지팡이의 날이라고 이 늙은이가 너무 주책을 떨었나 봐요. 장애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에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이 만들어질 때, 그것이 진짜 장애가 되는 거지요. 꼬마들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낮은 곳에 버튼을 만들어주는 노력, 그런 게 중요하지요.

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이주노동자든 시골사람이든 누구에게나 그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벽은 분명히 사람이 만들었고 그 벽을 허무는 것도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고, 뺑덕에미가 올 시간이네요. 이 여편네 방청소 안 했다고 또 구박하겠구먼. 전 여기서 인사드릴랍니다.

- 2011년 10월 15일 흰지팡이의 날 아침에 심청 애비

덧붙이는 글 | * 신경호 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 이 기사는 일본 전문 뉴스 JPnews(http://jpnews.kr)에도 송고됩니다.



#흰지팡이#시각장애#웹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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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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