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도 차가운 가을비가 내렸다. 메말랐던 농심을 적셔주는 고마움이자, 본격적으로 겨울을 대비하라는 자연의 알림신호다. 어느덧 오후 햇살이 넘어가면 옷깃을 여미고 헛헛해진 배를 움켜쥐게 된다. 비로소 쨍한 냉면 국물이 아닌, 숟가락 비스름하게 꽂힌 국밥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여러 국밥이 있겠지만 그 중심에 서있는 순댓국은 한편으론 희한한 음식이다. 기어이 그 특유의 향을 못 참아내는 이들에게는 고역이겠지만, 그렇게 도리질을 치던 이들도 나이가 들어가며 슬그머니 곁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동네 어귀 대폿집 노래자락에서 들리던, 얼큰해진 채 비벼대던 아버지의 숨결에서 느껴지던, 혹은 하루해를 정직한 노동으로 넘겼을 이웃에게서 묻어나오던 그 향취들. 순댓국은 정신적 추억뿐 아니라, 뼈마디 혹은 유전자 어느 곳에 파고들었을 일종의 회귀본능이다.
순댓국집이라면 골목에 자리 잡아야 제 맛
길을 걷다 발견하게 되는 수많은 식당들. 바쁜 현대인들은 별다른 선택 없이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 그저 그런 음식을 선택하고, 예상과 별다르지 않은 맛을 느끼고, 바쁘게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선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사이사이 골목길에도 많은 식당들이 숨어있다. 아니 모두들 안다. 알면서도 발길을 쉽게 들여놓지 못할 뿐이다. 각자 제한 된 밥시간에 의무적으로 음식물을 들이켜야만 하는 슬픈 도시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녁시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금은 넉넉해진 시간, 밥만으론 부족한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곳이 국밥집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왠지 골목길 가게로 들어서면 음식 이외에 사연이 말아져 나올 것 같은 고집스런 상상 때문이다.
연신내 지하철역 부근의 아바이 순댓국집은 그런 면에서 매우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 만나게 됐다. 부슬부슬 첫 가을비가 내리던 저녁 무렵, 오가는 수많은 이들을 피해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간 골목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북녘의 맛과 향
약속시간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득권(?)을 부려 일행 다섯을 몰듯이 가게로 밀어 넣고, 차림표부터 살핀다. 종류가 많지 않아 좋다. 모둠과 국밥뿐이다. 가격도 괜찮다. 가장 큰 접시가 2만원 아래다. 삼겹살 1인분에 1만 원을 넘는 물가를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둠접시를 시켜본다. 속을 달래라고 국물이 먼저 나온다. 진한데 부드럽다. 자극적이지 않다. 북녘의 맛이 이런 건가 싶어 지나는 주인에게 물어보니, 돌아가신 함경도 출신 할머니가 하시던 방법 그대로 40여 년째 이어오고 있단다.
밑반찬도 단출하다. 흔히 나오는 마늘·고추·된장 등이 없고, 섞박지 모양의 깍두기와 겉절이김치, 양파 고추장 무침이다. 깍두기와 김치는 젓갈을 과하게 쓰지 않아 담백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양파고추장 무침이 색다르다. 아삭거림 속에 칼칼함이 묻어 나온다.
뒤이어 고기와 아바이순대가 어우러진 접시가 등장한다. 빛깔이 참 곱다. 알고는 먹어야 할 것 같아 다시 주인을 불러 세운다. 살코기·머리고기·혀·오소리감투(위)라고 일러준다. 그 위에 대창과 소창으로 만든 아바이순대와 새끼보가 얹혀있다.
일단 전제를 하자면 고기에서 냄새가 없다. 어떻게 삶았기에 이처럼 부드러울까 싶다. 아바이순대는 고소하고 담백하다. 특히 대창순대가 그렇다. 돼지를 잡으면 한없이 나오는 소창에 비해 50cm 남짓 밖에 없다는 귀한 부분이다. 여기에 선지·찹쌀·배추·우거지·숙주·배춧잎 등 16가지 재료를 넣었다니, 북쪽 식으로 표현하자면 맛이 아니 좋을 수가 없다.
따로국밥만을 파는 특별한 이유?
사진을 몇 장 찍기도 전에 비워버린 접시, 술국을 따로 청해놓길 잘했다. 아까보다 묵직한 국물에 아바이순대와 고기가 그득하다. 특히 큼직하면서 씹기 편한 고기 덩이는 마치 안동국밥에 들어있는 질 좋은 소고기 같다. 고기를 대는 이가 가게의 역사와 함께 한단다. 40년 전 그 사람에게만 받는다는 설명에 이해가 간다.
배가 불러오지만 국밥을 건너뛰자니 허전해 두 그릇만 청해본다. 6천 원, 비싸다고 할 순 없다. 밥이 따로 나온다. 말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차림표를 보니 따로국밥밖에 없다. 죽일 놈의 궁금증이 다시 발생. 그새 어느 정도 말이 트인 주인을 다시 부른다.
"일부 다른 가게들을 보니 밥값을 따로 쳐서 받더라고요. 같은 국에 어차피 말아 먹을 밥인데 어째 좀 그래서…. 그러느니 아예 따로국밥을 기본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원래 국밥은 국에 밥을 한 번 헹궈내 뜨끈하게 말아주는 것을 말했다. 그러다 나이든 분들에게 예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밥을 따로 올려라' 하던 것이 따로국밥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정설. 밥을 따로 낸다는 것이, 결국 가격 인상요소로 이어진 셈이다. 차별적 가격을 없애고, 아예 따로국밥만을 내겠다는 주인의 뜻이 전해진다.
계절갈이에 알맞은 음식은 역시 '국밥'흔히 환절기에 계절을 탄다고 한다. 작게는 입술이 마르고 멍하기도 하다가, 심지어 으슬으슬해지기도 한다. 마음껏 즐긴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옮아가는 증상이다. 사실 큰 약이 없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뿐.
이럴 때 한국인이라면 계절갈이 음식으로 국밥만큼 긴요한 것이 또 있을까. "어~어"하며 훌훌 들이마시는 국밥 한 그릇은 속을 따스하게 해주고 기분을 일신시켜준다. 그릇을 내려놓고 정신이 번쩍 드는 그 느낌이 때론 못 견디게 그립다. 그것이 꼭 순댓국이 아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