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꽃은 선거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홈페이지에 뜨는 문구다. D-로 되어 있는 오늘 26일은 투표날이다. 이번 재보궐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포털 머리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투표함에서 눈 떼지 못하는 청와대'
'오늘 밤 투표함 열리면 한국 정치가 요동친다' 이렇게 중요한 10·26 선거에 대해 선거를 주관하는 선관위는 투표를 하라고 권장하는 것인지, 하지 말라고 훼방을 놓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규정이 너무나 까다롭기 때문이다.
아니 까다로운 게 아니라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 맞나. 도대체 국민을 뭘로 아는지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문구가 하나 둘이 아니다.
'처벌됨, 벌금에 처함, 금지됨, 불가,불가, 불가, 불가, 불가...'
미국 선거와 비교되네
지난 2008년 11월 4일, 미국 대선을 취재했던 나는 현장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주는 '투표했어요' 스티커를 받았다. 물론 내가 투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투표장에서 취재를 마치고 나오니 밖에 서 있던 관계자가 수고했다며 손등에 이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당시 이 스티커를 받은 사람은 시내 어디에선가 무슨 음료수인지, 간단한 음식인지를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다음은 선관위의 <공지사항>에 나오는 선거일의 투표인증샷에 대한 10문10답이다. 투표와 관련된 선관위의 무서운 엄벌 조항은 2탄까지 있다. SNS선거운동 가능범위 10문10답(2탄)
- 투표인증샷을 올리는 사람에게 서적·CD제공, 음식값·상품할인 공연 무료입장 등의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거나 그 약속을 트위터에 올리면 처벌받나?
"정당이나 후보자와 연계하여 하거나, 후보자거주·출신지역 등 선거구민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특정 연령층이나 특정 집단·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는 불가."
- 투표지 인증샷 할 수 있나. "투표지를 촬영하면 공개 여부를 불문하고 처벌된다. 기표하지 아니한 투표용지 촬영도 금지된다."
- 투표소 안에서 투표 인증샷 찍을 수 있는가. "투표소의 질서를 해하는 행위로 불가하다. 투표소 앞에서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투표인증샷을 찍는 것은 가능하다."
투표지 인증샷을 찍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선관위는 친절하게도 '투표소 질서를 해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투표장에서 자유롭게 의사 표현하는 미국
미국은 어떤가. 선관위가 해석하는 '투표소 질서를 해하는 행위'를 마구 허용하고 있다. 심지어 카메라를 준비해 온 한 대학생은 자신의 생애 첫 투표 장면을 찍어달라고 투표 관계자, 말하자면 선관위 직원에게 촬영까지 부탁하고 있었다.
처음 투표에 참가한다는 신문방송학 전공 3학년 앤사 에딤(20). 그녀는 사진 촬영을 마친 뒤 내게 오바마를 찍은 투표 용지를 보여주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가 외치는 희망과 변화가 실현되면 좋겠어요."
투표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나는 현장에서 전자 투표와 종이 투표하는 장면을 모두 촬영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정치 무관심과 관련해 한 대학생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봤다.
"대학 내에도 투표장이 설치되었으면 좋겠어요."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대학 내에 투표장이 설치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수업이 없는 빈 시간을 이용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학교측에서는 스쿨 버스를 이용하여 학생들을 연신 투표장으로 실어 날랐다.
선거 당일에도 선거 운동하는 미국
[선관위 10문 10답 가운데] 선거일에 특히 유의할 사항은?
선거일 당일에는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되므로 누구든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으므로 이점 특별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람.
투표는 평온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야 하므로 투표소 내외에서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모두 금지되므로 자제하시기 바람.
당시 대통령 선거일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공립학교는 휴교를 했다.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학생들은 투표장에 나와 자원봉사자로 활약했다. 이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샘플 투표용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후보자의 이름이 들어간 표지판을 들고 선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투표를 독려하는 게 선관위 책무 아닌가
물론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을 수는 없다. 두 나라 민주주의 역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관위는 국민들의 투표를 독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게 하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규제를 최소화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데 선관위가 <공지사항>으로 올려놓은 <10문 10답> 1탄, 2탄을 읽어보면 참 무섭다. 여차하면 벌금 물고 전과자가 될 것 같은 분위기다. <10문 10답>이 유권자에 대한 협박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처벌됨, 벌금에 처함, 금지됨, 불가 불가 불가 불가...'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를 치르는데 이렇게 겁을 줘서야, 원.
"법이 지켜지는 가운데 평온한 분위기에서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투표권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를 당부드림"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관위의 역할이다. 선관위는 선거 독려가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인지 궁금하다.
듣자하니 지난 번 8·24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는 선관위가 서울시에 주소를 둔 수도권 근무자의 주민투표권 행사 보장을 위해 정부 기관은 물론 인천시·경기도까지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투표권이 있는 공무원, 공기업 직원 등이 투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 달라"고.
그렇게까지 열렬히 투표를 독려했던 선관위. 선관위의 '두 얼굴'을 지켜보는 게 참으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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