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언제나' 시대의 키워드다. 그러나 청년이 키워드가 '된' 이유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다. 출판사 민음사에서 선정하는 '오늘의 작가상' 역대 수상작을 살펴보면 청년에 대한 사회적 상(像)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1979년(3회) 수상작인 이문열의<사람의 아들>에는 '젊은' 민요섭이 등장한다. 작가는 민요섭을 통해 '신(神)과 종교,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작품에서 '연령변수'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신학대를 중퇴한 젊은 캐릭터'는 조금은 추상적인 그런 고민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대학생에게'만' 이런 특권이 주어져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이런 무거운 주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바로 '젊고 공부 좀 한' 경우 아니겠는가.
가난하지 않아도 방황할 수 있었던 '1980년대의 청춘'
1980년대부터는 20대가 좀 더 구체화된다. 1986년(10회) 수상작인 강석경의<숲속의 방>에는 방황하다가 자살하는 20대 대학생 '소양'이 등장한다. 소양은 가난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전통적 캐릭터가 아니다. 물질 만능주의자인 아버지와 기존질서를 거부하지 못하는 언니(미양)와는 '다르기에' 자살을 택한다.
그냥 아버지와 언니와 '잘' 살면 되지 왜 일탈을 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대학'이라는 변수를 투입해야 한다. 1980년대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만세!"라는 김지하의 시(詩)가 가장 유효한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은 독재정권을 어떻게 전복할까 하는 투쟁의 정치학에 압도되어 데모 외는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이 상황이라면 가난하지 않아도, '속물적 가족'이라는 조건만으로도 청춘은 충분히 방황할 수 있었다.
이 공식은 공지영의<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대학이라는 지위는 오히려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잘못된 부유함에 불과한 제도화된 수단이다. 그런 수단을 가진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시대, 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그랬다.
여전히 강력한 제도적 수단으로서의 '대학생들'
1992년(16회) 수상작인 박일문의<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제목에서부터 1980년대를 계승하겠다는 흔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첫 페이지에 인용한 베트톨트 브레히트(Berolt Brecht)의 동명의 시가 내용을 압축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지금의 20대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상황이 그때는 엄청난 중압감이었다.
1994년(18회) 수상작인 임영태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는다. 제목에서처럼 이들은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다. 제도적 수단을 보유했다고 고민한 1980년대와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실업계고교 출신들로 제도적 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자에 대한 사회적 멸시가 어떠한지를 잘 나타낸다. 이와 함께 역으로 1980년대 대학생들이 '미안해 한' 이유가 잘 드러난다.
제도적 수단이 전혀 의미가 없어진 2000년대 청년들 2000년도 이후 이 서러움의 조건이 달라진다. 제도적 수단을 보유'해도' 변변치 않은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20대의 생활은 잠식당한다.
2003년(27회) 김종은의 <서울특별시>, 2004년(28회) 김주희의 <피터팬 죽이기>, 2006년(30회)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2010년(34회) 김혜나의 <제리>, 2011년(35회) 전석순의 <철수사용설명서> 등의 수상작들에는 청춘남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저마다 무슨 계획이 있지만, 1980년대의 그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리멸렬. 이 단어가 딱이다. 그들은 수단이 없어 휴게소를 털며(서울특별시), 목표 자체가 사라져 그저 책만 읽는 백수(백수생활백서)가 된다.
꿈이 없기에 적나라한 섹스를 무덤덤하게 즐기며(제리), 그러다가 결국 누구는 향균에 삶음 기능이 있는 세탁기가 될 때, 본인은 세탁조차 겨우 하는 제품으로 전락해 버렸다(철수사용설명서). 과거의 소설 속에 등장한 대학은 삶의 의미나 본질을 탐색하는 젊은이들의 '통과제의' 공간으로서 기능을 수행했지만, 현재의 대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해 볼수도 없다. 그래더 더 골 때린다)
소설의 20대들은 상징에 불과한 거지만 이 캐릭터들을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는 사회구조의 통시적 변화는 충분한 리얼리티를 가진다.
문화적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제도적 수단이 도무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회. 이 '안'에 20대가 놓여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청년의 위기'다.
이제 청년들은 대학을 나와도 영어를 잘해도 불안해진다. 이렇게 지속된 불안은 생활과 영혼을 잠식한다. 그렇게 '잉여'가 탄생할 조건은 완벽히 세팅된다. 그렇게 '과거와는 다른' 오늘의 청년이 완성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덕여대학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