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첫날(9월 16일), 바다만 보이는 선상여행은 지루할 것이라던 우려는 기우였다. 오후 5시 승선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쐬다가 만난 사람들과 밤 11시가 넘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동방명주호는 주로 서민이 이용하는 배여서 그런지 사람 냄새가 풍겼다. 하룻밤 정도 기차에서 지내는 장거리침대 열차가 '여행의 백미'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과 함께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선상여행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쫀득쫀득한 북한산 명태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던 승객들과 헤어져 객실로 오는데 선상 카페는 아직도 시끌시끌했다. 안내소에 카메라용 배터리 충전기를 맡기고 방으로 오니까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술자리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행 중에 처음 만난 중고교 동창이 들어오더니 뜨거운 물이 담긴 컵라면을 하나 주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출출해서 뭘 먹을까? 고민하던 참인데 고마웠다. 여행하면서 먹는 컵라면은 맛도 맛이지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일행들 오기 전에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실내에 에어컨이 작동하니까 몸이 더욱 가뿐했다. 메모장을 정리하고 책을 읽다 자려고 커튼을 치고 머리맡에 달린 등을 켜니까 한 평도 안 되는 잠자리가 호화여객선 부럽지 않았다.
눈이 피곤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니까 새벽 5시 20분(중국시각 4시 20분)이었다. 2층과 아래층 침대에서 코 고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박자가 엉망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떠오르게 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잠자는 사람들을 깨울 수는 없는 일.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안내소에서 충전기를 찾아 갑판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바람이 차가웠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져
30분쯤 지나니까 어둠 속으로 물고기 비늘 같은 하얀 물결이 하나둘 보였다. 옛날 뱃사람들은 잔잔하던 바다에 하얀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 '흰 꽃이 피었다!'라고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옛날 뱃사람들도 감성이 풍부하고 멋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쪽 하늘은 차츰 검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회색 구름이 수평선을 덮은 것처럼 보였다. 바다의 새벽하늘은 또 다른 멋을 연출하고 있었다. 신비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일출을 보려는 승객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갑판으로 모여들었다.
6시 18분, 황금빛깔의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기도하는 승객도 있었다. 5분쯤 지나니까 태양이 완전히 형체를 드러냈다. 누군가 "일출이 저렇게 예쁘게 이뤄지는 것을 보기는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는데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출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상서로운 기운이 몸에 감돌면서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하루 내내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았다.
일출을 보고서야 시계를 한 시간 늦추었다. 중국이 한국보다 한 시간 늦기 때문. 아침 식사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라고 했다. 식사 메뉴는 순두부 김치찌개. 가격은 전날 저녁과 같은 5000원이었다.
배가 중국 단동(丹東) 동항에 입항하는 시각도 알려주었다. 중국 시각으로 아침 8시 40분, 하선 예정시각은 9시란다. 중국측 수속 강화로 하선이 천천히 이루어지므로 승객들은 승무원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객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객실에 들렀다가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안내실 앞은 식권을 사려는 승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집에서 준비해왔는지 음식을 펼쳐놓고 먹는 승객도 많았다. 추석명절 끝이어서 그런지 떡, 송편, 부침개 등이 보였다. 아침을 컵라면으로 대신하는 승객도 있었다.
전날 저녁은 뷔페식에 셀프였는데 아침은 한식이었다. 반찬은 깍두기와 고사리나물, 두부 부침, 생선 튀김도 한 조각 곁들여 나왔다. 순두부는 보이지 않고 김치만 보이는 순두부 김치찌개. 그래도 국물은 개운하고 시원해서 실망스럽진 않았다.
말의 안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섬 '마안도'(馬鞍島)
아침을 먹고 갑판으로 나갔다. 하늘은 일출의 여운으로 붉은색이 가시지 않았다. 길게 이어진 산등성이가 그림처럼 아슴하게 다가왔다. 북녘땅이었다. 갯벌과 작은 섬도 보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을 보노라니 가슴 한편에 아련함 같은 게 느껴졌다.
파도와 힘겹게 싸우는 작은 배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단동에 살면서 한때 어부였다는 임씨 아저씨(64)는 "이곳은 압록강 하구로 바다에 막대를 박아 그물을 쳐놓고 꽃게와 조개를 잡는 북한 배들인데 날씨가 안 좋으니끼니 조업을 중단하고 쉬는 모양입네다"라고 말했다.
갯벌은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금강 하류 갯벌은 어렸을 때 놀이터였기 때문. 그래서 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까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임씨는 '비단섬'(緋緞島)으로 불리는 '신도'(薪島) 주민이라고 귀띔했다.
임씨는 "비단섬 왼쪽에 있는 작은 섬은 '마안도'(馬鞍島)로, 역시 북한 영토이며,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섬"이라고 했다. 마안도는 섬 모양이 말의 안장을 닮은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비단섬은 비단 원료가 되는 질 좋은 갈대가 무성해서 붙여졌단다.
한반도 최서단은 평안북도 '마안도'
흥미를 끄는 것은 평안북도 신도군에 속한 마안도가 한반도 최서단지역이라는 것. 순간 동쪽 끝 독도가 떠오르면서 마안도가 다시 보였다. 그런데 한국 교과서 지리부도에는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로 나와 있다. 북한과 한국이 마안도가 속한 군(郡)을 다르게 표시한 것도 분단의 아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신도군에 속한 섬들은 대부분 중국에 가깝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에 의하면 1960년대 들어 중국에서 발간된 지도에 비단섬을 중국 땅으로 표시한 게 종종 보였으나 최근 중국 단동시가 발간한 압록강 일대 관광지도에는 한자로 '신도' 표기와 함께 '조(朝)'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이 또한 제2의 독도 문제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북녘땅 감상에 빠져 있는데 곧 단동 동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순간, '우리나라는 여행할 때 목적지 도착 10분 전부터 내릴 준비를 하지만, 중국은 1시간 전부터 수선을 떤다'는 얘기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육지가 가까워지니까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 북한이 쉽게 구별되었다. 중국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북한은 굴뚝조차 보이지 않아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50분. 하선 준비를 해야겠기에 객실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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