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10월 31일), 전북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다녀왔다. 조상들이 사용하던 농기구가 전시된 야외 전시장을 지나 입구에서 전북대학교 '새만금 조사단' 일행(6명)을 만났다. 그들에게 전시관을 둘러본 소감을 묻자, 조사단 단장 이정근(54)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새만금 역사를 조사하러 나왔다가 잠시 들렀어요. 2002년 비안도 해역, 2003년 8월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 해역, 2006년 야미도 해역 등에서 발굴된 해저유물을 보면서 느낀 점은 설명 내용을 중학생 수준에 맞추면 좋겠다는 것과 아직도 보충해야 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교수는 "조선시대 군산창이 있던 수덕산 부근을 조사하러 가느라 근대생활관과 기획전시실을 둘러보지 못했다"라며 "국비를 지원받아 공사해서 그런지 전주 역사박물관보다 더 잘 만들어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해방되던 해(1945년) 촬영한 대형 항공사진이 발길을 잡았다. 지금은 고층 건물이 빡빡하게 들어선 수송동과 나운동이 허허벌판이었고, 고향 동네 째보선창과 모교 건물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잠시 추억의 뒤안길로 여행을 떠나게 했다.
유물과 자료로 보는 군산의 발자취
박물관 1층 해양물류역사관은 고조선 건국(BC 2333)부터 선사·삼한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을 거쳐 새만금 간척사업 육로가 연결되던 2006년까지 발굴된 국보급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최근에 발굴된 석기시대 유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도시로만 알았던 군산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수문 역할을 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해양물류 중심지였음을 실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고려 제32대 우왕 6년(1380년) 8월. 대규모 왜구 함대를 최무선(1326~1395) 장군이 최초로 화약을 개발하여 물리쳤던 '진포대첩' 전시관 앞에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 지배자였던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장군이 기억에서 멀리 사라져가고 있으며 훌륭한 문화 콘텐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세금(세곡)을 개경과 한양으로 운반하던 조운선(漕運船)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여 배에 올라 선장이 된 기분으로 설치해놓은 시뮬레이션을 작동하며 조운선 운항을 3차원적으로 느껴보기도 했다. 조운선은 18세기 말 <각선도보>에 실린 기록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제작(1/3 크기)했다고 한다.
조선 초(1487년)에는 지금의 박물관 인근(옥구현 북면)에 군산창이 설치되고, 1500년대에는 호남의 중심 조창이 된다. 군산창은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개 읍의 세곡을 보관해서, '칠읍해창'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운선과 수많은 장삿배 및 어선이 왕래하던 군산창과 군산포는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군산창과 군산포, 죽성포(째보선창), 경포 등을 중심으로 객주들 활동도 커졌다.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며 금융업도 겸했던 객주들은 군산이 개항하던 1899년 일제의 세력을 막아내고자 '영흥사'를 설립하지만, 일제의 미곡 수탈 전진기지가 되면서 조선 객주는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객주 상회사(영흥사)가 근대적 상업회사로 발전을 못 하고 사라지거나 일제식민지 체계로 편입된 이유는 국권을 상실해가는 혼란기에 일반 객주와 특권을 누리는 객주 사이에 일어났던 적잖은 다툼과 분쟁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길을 오랫동안 멈추게 했던 '근대생활관'
'1930년대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로 1930년대 군산 원도심권에 실존했던 건물 11채를 실체처럼 복원해 놓은 근대생활관(3층)은 발길을 오랫동안 멈추게 했다. 진열장의 과자와 성냥, 등잔, 유기그릇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코흘리개 시절 친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미곡취인거래소(미두장) 건물 앞에 서는 순간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 하바꾼으로 전락한 정주사가 젊은이들에게 봉변당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미곡취인거래소는 취급하는 곡식이 주로 쌀과 콩이어서 '미두장'으로 불렸으며 1932년 구 조선은행 부근에 설립되어 1940년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당시 미두 열풍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쌀 시세는 요즘의 주식시장과 비슷한 구조로 하루에 17회씩 변동했으며,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지였던 일본 오사카 시세를 전화로 전달받아 공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욕심을 내고 덤벼든 조선 갑부들은 정보와 자본이 일본인보다 부족하여 대부분 돈을 잃고 하바꾼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군산 원도심권은 개항(1899) 후 내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을 말한다. 시청, 법원, 검찰청, 우체국, 경찰서, 금융기관 등 주요 관공서가 들어선 원도심권은 일제가 격자형으로 조성했으며, 1970년대에는 물류유통의 중심 지역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기생을 취하려면 평양 부윤, 권세를 누리려면 한성 부윤, 돈방석에 앉으려면 군산 부윤'이라는 말이 회자되던 일제강점기(1920~1940) '군산'은 전남 '광주'보다 먼저 부(府)가 되었고, 시(市) 승격도 광주와 같은 해(1949년)에 이루어질 정도로 활기찬 도시였다.
금융회사들의 인사 이동만으로도 군산이 얼마나 푼푼했던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도 중앙은행들은 군산과 전남 광주 지점장을 동급으로 취급하였고, 당사자들도 교환 근무 정도로 받아들였다. 광주지점장이 군산지점장으로 발령받으면 축하인사를 받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얘기가 되겠다.
화교가 운영하던 잡화상 홍풍행(鴻豊行)은 1962년 화폐개혁 당시 안방 장판에서 곰팡이 낀 지폐가 가마니로 쏟아져 나와 신권으로 바꾸지 못하고 버렸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훗날 헛소문으로 밝혀졌지만, 정부의 외환거래규제정책으로 화교들이 한국 금융기관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홍풍행이 있던 '영동'은 군산부 설립(1910년)과 함께 사가예마찌(영정)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상권은 조선인이 쥐고 있었으며, 특히 개성상인 다수가 포목 도매상을 경영하고 있어 '송방골목'으로도 불렸다. 그 속에는 화교가 경영하는 비단집과 철물점도 있었다. 100년 전 도로와 골목이 그대로 존재하는 영동은 이제 낭만이 흐르는 추억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할머니 방문객이 손녀와 함께 지나가는 모습은 기름진 옥토를 일제에 빼앗기고 빈민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던 개복동, 창성동 산동네를 떠오르게 했다. 수저까지 전쟁물자 공출로 빼앗기고 콩깻묵과 피죽으로 목숨을 겨우 연명했던 당시 조선인들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1934년 9월 30일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군산의 토막집 거주자는 경성(서울)에 이어 2위이고, 인구 대비 전국에서 1위였다고 한다. 산동네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조선 빈민들은 내항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을 보며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으리라.
군산은 생활면에서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뚜렷이 차이가 났다. 일인들이 사는 영화동, 월명동 등은 도로, 상하수도 정비가 잘 되었으나 조선인이 사는 지역은 도로가 협소하고 하수도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이렇게 불합리한 도시 구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경성고무와 고무신의 추억
한국인 사업가 이만수(1891~1964)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을 인수해서 설립(1932년)한 경성고무의 '만월'(滿月)표 전문판매업소(형제 고무신 상점)도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동그라미 안에 '滿月'이 새겨진 만월표 고무신은 군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 특매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이던 1960년대에는 여종업원 3천여 명이 밤일을 해가며 하루 한 켤레씩 생산해낼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10대 여종업원이 대부분이었으며, 작사자가 불분명한 노래 '고무공장 처녀'가 총각들 사이에 유행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경성고무 월급날이 째보선창에 고깃배가 들어오는 음력 조금하고 겹치면 군산 시내가 흥청거렸다. 극장들은 프로와 관계없이 연일 만원을 이루었고, 재래시장은 물론 잡화상, 옷가게, 빵집, 이·미용실 등도 명절 대목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질퍽이는 길을 가다가 고무신에 진흙과 물이 들어와 자꾸 미끄러지면 아예 벗어서 손에 쥐고 학교를 오갔고, 싸우다가 밀리면 꼬나들고 무기로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갯벌에서 짱뚱어를 잡아 담아오기도 했고, 개울에서 배로 띄우고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려 어머니에게 된통 혼났던 기억도 새롭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비가 오면 버릴까 봐 신고 나가지 못했으며, 잠을 자면서도 가슴에 품고 잘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헌신발과 바뀌지 않도록 표시해서 신고 다녔고, 찢어지면 실로 꿰매 신을 정도였으니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일제와 함께 들어온 고무신은 근대 문명의 산물로 '신발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생활을 변화시켰다. 사람의 발이 대중교통수단이었던 시절에는 군산에서 전주만 가려 해도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10켤레 이상 준비해야 했으니 신발의 혁명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추억여행. 손님과의 약속이 있어 형제고무신 상점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내항과 부잔교, 인력거 차방, 야마구찌 술 도매상, 군산좌(군산극장), 영명학교, 군산역, 임피역 등 남은 건물과 기획전시관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오려니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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