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재학 시절, 이유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두들겨 맞은 기억만큼은 뚜렷하다. 매로 엉덩이를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굳은 피떡에 흰 속옷과 살갗이 엉겨 붙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허벅지에 마치 철길 마냥 두 줄의 시커먼 멍이 드는 건 매 맞은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매 맞으러' 학교에 다녔다.
고2 때인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똑같은 유리창이 이틀을 사이로 거푸 깨진 일이 있었다. 둘 다 교실에서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 벌인 일인데, 처음엔 공부도 못 하는 데다 허구헌날 선생님들로부터 사고뭉치라며 지청구를 듣는 아이가 깨뜨렸고, 이틀 뒤에는 공부 잘하는 반장 아이가 저질렀다.
결과는 판이했다. 깨진 건 위치마저 똑같은 유리창인데, 체벌이 '사람'에 따라 너무나 달랐던 거다. 그 사고뭉치는 예상대로 온갖 꾸지람에 발길질까지 당하며 심하게 맞았지만, 반장에게는 놀랍게도 다음부턴 '터프하게' 놀지 말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지 둘의 차이라면 '문제아'와 '모범생'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땐 어린 마음에 의협심이라는 게 있었던지, 아니면 겁이 없었던지 선생님께 달려가 대뜸 처벌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눈을 부릅뜬 채 따져 물었다. 물론, 순간 뺨에서 별이 번쩍거렸고 그날 난 하도 맞아서 멀쩡히 걸어서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부었고 엉덩이는 피멍이 들었지만, 부모님은 자식이 억울하게 맞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결코 선생님을 탓하지 않으셨다.
교사의 '머리채' 잡은 학생 뉴스 통해 본 교육 현실, 안타깝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케케묵은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건,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교사가 교실 복도에서 학생이 교사의 머리채 잡이까지 하며 벌인, 이른바 '머리채 싸움' 뉴스를 접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언론에선 물 만난 고기 마냥, 교권이 얼마나 실추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며, 체벌을 부활시키고 해당 학생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을 부추기고 있다.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는 이렇다. 해당 여학생이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간 게 발단이 됐다. 교사는 그 아이를 훈계하기 위해 따로 교무실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얼마 후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자 교사는 그 아이를 자신이 수업하는 교실로 데려가 거친 말을 섞어가며 심하게 나무랐다. 이전에도 휴대전화를 통해 동영상을 보는 등 수업태도가 좋지 않다고 수차례 지적당해 온 터였다.
심한 꾸지람에 분개한 아이는 교실을 박차며 나갔고, 이를 막아서던 교사와 언쟁이 오가는 가운데 급기야 '머리채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다른 교실에서 동료 교사들이 달려 나와 싸움을 뜯어 말리면서 이내 마무리되었지만, 이 모든 장면이 복도에 설치된 CCTV를 통해 그대로 녹화되었다.
공교육의 붕괴 위기라는 요즘의 현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벌어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가 더 이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맺어질 수 없는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 그 아이의 패륜적 행위에 대한 일벌백계는 당연한 조처일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엄중한 학교 현실이 그다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분노를 잠시 삭이고, 이를 교사들의 획일적인 생활지도 방식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보면 어떨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패륜아'가 사건이 발생한 그 학교에만 있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만 돼도 흡연과 음주는 조만간 교칙의 단속 조항마저 빼야 할 정도로 보편화된 게 현실이고, 가출과 폭행, 상습 절도로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하는 아이들도 드물지 않다. 기실 그 학생이 교사의 '머리채'만 잡지 않았다면 별 탈 없이 넘어갈 일이었다고 할 정도로 학교의 생활지도가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와 교사의 생활지도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체벌이 불가피하며, 막장 얘들에게는 여전히 몽둥이가 약'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유효하다. 학교가 그런 아이들을 지도할 능력이 부족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여태껏 매라는 손쉬운 대증요법에만 기대온 것이다. 그런 탓에 나아질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시나브로 상황이 악화되는 모양새다.
이른바 '막장' 아이들은 부모와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이자, 정도가 심한 일부 아이들의 경우에는 전문가의 상담과 병원 치료를 필요로 한다. 곧, 학교가 결코 대신해줄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도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이유로 모든 책임과 비난을 학교가 감당해야 한다면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다. 부모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아이를 학교에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이의 그릇된 행동은 온전히 부모와 가족의 책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학년 초 담임과의 상담 때 '오로지 선생님만 믿는다'며 선물 들이밀 게 아니라 자녀 교육의 한 축을 함께 책임지겠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학부모와 교사는 아이를 중심에 놓고 교육에 대해 서로 고민을 나누고 협력하는 관계여야지,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안기고 비난하는 대상일 수는 없다.
그러자면 부모가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야 한다. 예컨대, 정작 살아가는 데에 별 쓸모가 없는 지식을 몇 개 더 얻겠다고 밤늦도록 교실에 잡아두는 건, 부모와 자녀와의 건강한 관계를 끊어내는 짓이다. 하루에 밥 한 끼조차 함께 먹을 수 없다면 그걸 어찌 한 가족이라 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커가는 과정에서 자녀의 성격과 행동 변화를 되레 부모가 교사에게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분하기보다 어떻든 우리 교사들이 먼저 노력해보자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자녀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맞벌이 부부가 엄청나게 늘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현실은 아이들을 '방치'라는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그런 까닭에 형편이 어려운 맞벌이 가정일수록 학교에 더욱 더 의존할 수밖에 없고, 아이와 관련된 모든 '사고'에 학교가 무한책임을 떠안게 되는 구조다.
학교와 교사에 모든 책임을 묻기 전에 우선 부모가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정부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간 대화가 많은 화목한 가정에서 '막장' 아이는 절대 나올 수 없다. 또한, 단언컨대, 아무리 유능한 교사라도 부모의 역할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든 우리 교사들이 먼저 노력해보자. 학생이 감히 스승의 '머리채'를 잡았다고 공분하기보다는 기존의 생활지도 방식을 고민해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과문한 탓인지, 학교마다 '수준별 수업'이라며 학생 개인의 학습 능력 차이에 맞춘 개별지도 방식이 도입됐다는 얘기는 흔해도, 개인의 성격 차이를 고려한 개별 생활지도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설 교육기관은 물론, 정부와 교육청, 나아가 교육방송(EBS)까지 나서서 수업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연수와 프로그램을 수강하도록 부추기지만, 교사들의 상담능력을 높이기 위한 연수는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그나마 개설돼도 학교마다 비치된 상담교사가 정기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꼭지로 여길 뿐이다. 교육청도, 학교장도, 심지어 학부모조차도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주기보다는 점수를 올려주는 사람이 유능한 교사라는 편견은 그렇게 확대 재생산된다.
'머리채'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복도마다 설치된 CCTV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채'보다 복도마다 CCTV가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마저도 1년 365일 아무렇지도 않게 녹화된다는 건 다분히 인권 침해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로 교무실에 CCTV를 설치한다면 교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CCTV를 복도마다 설치하는 것을 대다수의 교사들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둔감했다는 걸 보여준다. 아니라면 CCTV를 통해 학교생활 중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할 정도로 절실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그건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학교 내 곳곳에 설치된 CCTV는 교사들 스스로 자신이 요즘 아이들과 소통할 능력이 부족함을 드러낸 것이자, 거칠게 말하자면, 자신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간수'임을 고백한 셈이 된다. '교육은 마음의 일'일진대, 교사와 학생 사이에 '기계'가 개입되면 상호 교감은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현실에 눈 감은 채, 들끓는 여론에 편승해 일부 교사들이 앞장서 교권이 실추된 건 체벌이 금지됐기 때문이라는 등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펴는 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비행'이 여론의 먹잇감이 되어 오르내릴 때마다 그게 모두 '학생인권조례' 탓이라며 발끈하는 교사들이 이번 사건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소통능력 부족을 감추고 슬그머니 뒤로 숨으려는 비겁한 행태다.
앞서 말한 고2 시절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매 맞은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지만, 그 선생님을 마음속에서 오래전에 용서했다. 당시 그분으로 인해 그토록 저주했던 교사라는 직업을 얄궂게도 갖게 된 후, 솔직히 맨 먼저 그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분은 왜 나를 그렇게 때려야만 했을까?"
아무리 20여 년 전이라지만 매질이 나쁘다는 걸 모르셨을 리는 없다. 매를 때리면서 그분의 마음 역시 편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 선생님에게는 학생이었던 나를 타이르고 설득해낼 능력이 부족했던 거다. 대학 다닐 때도, 교사가 된 후에도 아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그렇게 교사 '노릇'을 해 오셨던 거다.
여론의 뭇매에 편승해 엄벌을 외치기 전에, 그 아이의 모습이 우리 기성세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반성이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겠는가. 패륜적 행위는 미워도 그 아이 자체를 미워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아이도 우리 사회가, 우리 학교가 어떻든 보듬고 가야 할 소중한 존재이기에.
수업시간 시작종이 울렸다. 아이들을 만나러 터벅터벅 교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정말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