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2월 29일부터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우리 시대의 명강의(
바로가기)'에 '권력과 인간'이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7년 넘게 <한중록>을 연구해 온 정 교수는 이 인터넷 연재를 통해 '스테디셀러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역사적 오류가 많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에는 <역사비평>에 <길 잃은 역사대중화-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을 실어 오류의 구체적인 내용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두 학자의 논쟁은 1월에 <한겨레>와 <서울신문>에 한 차례씩 소개됐으나 이후에는 흐지부지 되는 듯했다. (관련기사 :
'13년 스테디셀러'에 포문 역사적 진실 공방 불붙다 <한겨레>,
사도세자 해묵은 논쟁 인문학 열기 달구다 <서울신문>)
그러던 중 지난 9월 30일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저자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 연구위원이다.
이 책은 '현재의 대한민국 집권층이 노론에서 시작돼 친일파로 이어지고 현재에 이르렀다'는 주장과 함께, 이덕일 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한 네 명의 교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책 내용 3분의 2가량을 정병설 교수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공격에 할애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0월에 이주한 연구위원을 인터뷰했다. (관련기사 :
"노론·친일파·뉴라이트는 한뿌리... 서울대 탓도") 지난 10월 30일, 이번에는 반론 인터뷰로 비판의 대상이 된 정병설 교수를 만나봤다.
정병설 교수는 "(내가) <사도세자의 고백>을 '잘못된 사료 해석과 왜곡에 기초한 책이므로 역사서로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자 (이주한 연구위원이)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통해 국문학계를 친일파의 후예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으로 허점을 지적했다고 해서 국어학자들까지 친일식민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절명한 애국지사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정 교수는 이덕일 소장이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사료를 잘못 이해하거나 엉뚱하게 해석한 증거로 ▲ 사도세자가 영조를 따라갔다고 하는 태묘가 태조의 능이 아니라 종묘라는 점 ▲ 온양거둥의 규모가 이덕일 소장의 주장과는 달리 쓸쓸한 규모였다는 점 ▲ 정조가 꿈을 잘 꾸어서 적인 김조순과 사돈을 맺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 정 교수는 <사도세자의 고백>과 같은 책이 대중역사서로 중·고등학생에게도 읽히고, 역사 연구논문에도 인용되는 현실에 대해 "역사학계가 좀 더 분발해 옥석을 제대로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정병설 교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우리말 지켰던 이들이 친일파? 묵과할 수 없었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 교수님을 강하게 비판을 했는데 그동안 대응을 하지 않다가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무턱대고 비난만 퍼붓는 책에는 '무대응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비논리적 주장에 빠져드는 분도 있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서 반론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더욱이 나를 비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보듬고 지키다가 목숨까지 잃은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국어학자들을 친일파로 비난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 노론의 후예가 친일파가 되고 해방 후 집권층이 됐으며, 노론사학이 식민사관으로 그리고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로 이어졌다는 것이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이 책은 이덕일 소장을 비판한 네 학자들에 대한 비난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자칫 잘못 읽으면 현재의 집권층과 주류 사학계를 비판한 책처럼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집권층에 대한 비판도 잘못이긴 하다. 시대착오적이고 과대망상적이다. 지금 집권층 가운데 노론 후예가 누가 있나? 이름을 대보기 바란다. 대통령이 노론 후예인가, 총리가 노론 후예인가? 노론이 친일파가 됐다는데,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노론인가? 내가 보기에는 노론을 포함해 왕족과 양반 등 지배계급 모두가 조선을 망쳤다.
소론이나 남인이 집권했으면 강한 조선이 됐겠는가? 또 식민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파가 현재의 집권층이라는 주장은 <친일인명사전> 등으로 따져서 가릴 일이다. 무턱대고 '어떤 집단은 모두 친일 후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이 기회를 통해 분명히 할 것은 우리 집안은 노론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면 우리 선조는 노론이나 소론으로 분류할 수 없는 시골사람에 불과했고, 드러나게 친일을 할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다. 또 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쓴 역사서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물론 내 책에서 인용한 일도 거의 없다. 이런 사정은 함께 비난 당한 다른 세 교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다. 이런 네 학자들을 '노론·친일·식민사관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은 '(이덕일 소장을 비판한) 네 학자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식민사관에 찌든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사실 네 명 가운데 한 명만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이고 다른 세 명은 서울대 국문학과·연세대 국문학과·고려대 사학과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국문학계도 식민사관에 찌든 친일파'라며, 그 예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들었다. '일제가 만든 언문철자법을 친일 국어학자들이 베껴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지금 국립국어원과 서울대 국문과에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엄청난 고초를 겪은 선배 학자들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
-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걸려 감옥에까지 가지 않았나?"대한제국 때 국문연구소를 만들고, 국문운동을 시작하자마자 나라가 망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언어 정리가 필요해 언문철자법을 만들 때 일본인 연구자들과 국문연구소 사람들이 가담했다. 그 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었는데 이전 작업들을 모두 참고해서 만들었다. 몇년 새에 언어 현상이 확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1912년의 언문철자법과 1933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유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친일 식민 언어학자라고 하는 것은 너무한 도발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독립운동 혐의를 씌워 검거·투옥한 사건이다. 그때 감옥에 갇힌 수십 명의 국어학자 가운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차디찬 감옥에서 절명하셨다. 이런 분들을 친일파로 몰다니 도대체 자신들은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되묻고 싶다.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이덕일 소장의 논리는 정음연구회 최성철 회장의 논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 소장 주장의 '프레임'은 최 회장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올해 한글날에 이덕일 소장이 한 신문에 쓴 칼럼 '세종의 꾸짖음'은 올 초에 최성철 회장이 한글학회 홈페이지에 올린 '세종성왕의 진노'와 내용과 표현 방식이 거의 같다. 이덕일 소장은 자신이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실은 남의 말을 옮긴 것이고, 그 내용은 세종대왕을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애국지사를 능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덕일 소장이나 최성철 회장, 둘 다 무슨 대단한 애국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말 사랑에 목숨까지 바친 순국 지사들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반역 때문에 죽은 사도세자... '안 미쳤다'는 것은 설득력 없어- <길 잃은 역사대중화>에서 '<사도세자의 고백>이 역사서로서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10년 넘게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인데."그쪽이 말하고자 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덕일 소장의 책은 대중들이 받아들인 책인데 네가 왜 아니라고 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많이 팔린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설이라고 할 수 없다. <사도세자의 고백>에 제시된 논거 중 제대로 된 증거를 갖춘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의 왕릉 행차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덕일 소장은 '영조가 태조의 묘인 태묘(太廟)에 갈 때 여러 번 사도세자와 간 기록이 있다'며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덕일 소장의 사료해독 수준을 보여주는 오류이다. 태묘는 태조의 묘가 아니라 종묘다. 사도세자는 멀리 있는 태조의 능에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동궁과 붙어있는 종묘에 갔던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비판했더니 이주한 연구위원은 '태묘를 종묘로 고쳤는데 이전 책을 가지고 뭐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이덕일 소장은 '지엽말단적인 부분만 문제 삼아 막무가내로 (나를) 학자가 아니라고 몰아붙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태묘를 종묘로 수정했다고 끝나는 단순 오자의 문제가 아니다. 이덕일 소장, 이주한 연구위원의 주장은 <한중록>이 거짓이라며, 왕릉 행차에 여러 번 따라갔다며 증거로 제시한 내용이다.
또한 <사도세자의 고백>에 제시된 사료 해석에는 초보적 수준의 실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령 '사도세자의 온양 거둥(왕의 행차)이 호위 병력만 520명이나 되는 장엄한 행렬이었다'며, '<한중록>에서 쓸쓸한 행렬이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왕의 행차에는 통상 4000명 이상의 호위 군인들이 동원된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행렬이 쓸쓸하고 초라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까지 있다. (내가) 이것을 지적했더니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1000명의 행차였다고 슬그머니 말을 바꾸기도 했다.
정조가 노론 김조순과 사돈 맺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덕일 소장은 '정조가 김조순하고는 혼사를 안 하려고 했는데 꿈을 꾸고 뜻을 바꿨고, 그 꿈을 잘못 해석한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되나? 정조가 총명한 임금이라 주장하면서 바보처럼 좋은 꿈 때문에 판단을 바꾸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영춘옥음기>(김조순이 남긴 기록) 등 다른 기록들을 보면, (정조가) 꿈꾸기 훨씬 전부터 김조순 쪽을 점지한 흔적들이 있다. 정조는 현실적인 이유로 김조순을 간택했을 것이다. <정조실록>에서 꿈 이야기를 한 것은 덕담 정도로 봐야 한다. 게다가 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것을 마치 핵심 이유인 것처럼 사료를 해석했다. 사료를 피상적으로만 읽고 있다는 이야기다. 소설가라면 몰라도 역사가가 사료를 이렇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가 '당쟁' 때문에 희생됐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라면 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가 죽였다는 것인가?"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당쟁이 아니라 반역죄 때문이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미쳐서 한 짓이니까 용서해 주자'는 뜻이었다. 그 사실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때 내린 <폐세자반교>에도 나와 있다. <한중록>에도 반역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맥락을 그렇게 읽을 수 있도록 적혀 있다. 물론 '사도세자가 미쳤다, 미치지 않았다'고 100%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학자로서 판단할 때는 미쳤다고 주장한 기록들의 근거들이 훨씬 합리적으로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료비판을 통해서 볼 때, 미치지 않았다는 기록과 주장들은 설득력이 거의 없다."
대중 역사서의 옥석 가리기에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똑똑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사도세자가 총명했다는 주장을 처음 접하고 놀랐었다."이 견해의 가장 주요한 근거는 정조가 쓴 <사도세자 행장>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행장(전기)을 쓸 때 불리한 것은 싹 빼 모호하게 적어 놨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사랑을 받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만 딱 모아놓은 거다. 그걸 가지고 이은순 선생이 먼저 <한중록>을 비판했고, 이덕일 소장도 그 논지에 따랐다. 문제는 이들 모두 사도세자 행장을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 정조는 결코 사도세자 행장에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정조는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것을 후대 학자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해석한 것이다.
소설이야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니까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영원한 제국>의 사도세자 이야기는 소설가 이인화씨가 어릴 때 동네에서 들은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들었다. 영남 남인들 사이에는 총명한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세자시강원 설서였던 권정침이 중요한 진원이고, 그런 소문을 확산시킨 것은 정조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는 정병설 교수가 가해자 측 기록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만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증거자료에는 눈을 감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그들은 내가 <한중록>을 100% 믿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 작업을 하지도 않았다. 요즘 많이 나오는 대통령 자서전과 견줘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대통령들이 자서전을 왜 썼겠나? 자기변명을 위해 쓴 책이니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겪지 못한 일을 보고 겪은 사람이다. 자서전으로서의 한계는 한계대로 있겠지만 그만큼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한중록> 역시 그런 가치가 있다. 혜경궁은 70년을 궁궐에서 살았고 대왕대비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를 누렸다. 보고 들은 것들이 예사 정보가 아니다. 친정 변호를 위해 썼다는 점을 감안하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중요한 사료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한중록>을 중심에 놓고 다른 사료와 비교 검토하면서 당시의 정치사를 읽어보겠다는 취지로 말하고 글을 썼는데, (내가) <한중록>만 본다고 비판했다. 내 저술에는 <사도세자의 고백>보다 훨씬 많은 사료들이 인용됐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그렇게 비판한 <한중록>을 주로 사용하면서 <영조실록> <정조실록> 정도를 참조했다. 하지만 내 저술은 이것들은 물론이요 <승정원일기> <동궁일기>(사도세자의 동궁일기) <대천록> <현고기> 같은 편찬 사료들, 그 외 서울과 지방 각지에 있는 각종 문서와 심지어 혜경궁 집안의 반대파인 정순왕후 쪽 사람들의 문집까지 살폈다."
- 인터뷰를 마치며 당부하고 싶은 말은?"대중역사서의 문제점에 대해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백 번 양보해도 연구서로 볼 수 없는 책인데도, 일부 역사 논문에서 선행 업적으로 소개·인용되고 있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옥석을 분간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니, 어느 새 그것이 교육계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터무니없는 말들이 정설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학계에서 심도 깊은 연구가 나오고, 냉정한 학문적 비판이 이루어지면 이런 엉터리 저작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