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국가권익위에서 '공직사회 알선·청탁 인식조사'를 했다는데 시민·공직자의 알선·청탁 관행에 대해서 시민 응답자의 84.9%가 심각하다고 하였고 공직자들 역시 21.8%가 심각하다고 답 하였다.
이 조사에서 공직자의 알선·청탁 관행의 원인으로 그 주범을 지방의원과 전직 공직자로 지목하고 있다. 이들이 선출직 단체장 또는 중간 간부들을 압박하여 힘없는 아래 공무원이 부정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공직사회의 최일선 공무원들은 어찌 보면 권력이 없으므로 부패를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자칫 여기에 연루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족히 1년은 된 듯하다. 한동안 조용했지만 잊을 만하면 또 들먹인다.
얼마 전 이 문제로 조직 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래도 잘 버텨냈다. 때문에 지금도 상하 간 소원한 마음은 풀리지 않은 상태다. 이 갈등은 주민의 대표라는 한 시의원으로부터 출발한다.
상가 앞 화단을 없애달라는 시의원 작년에 시내 도로변 아무개상가로부터 민원을 받은 한 시의원이 상가 앞 보도화단에 쥐가 끓고 지저분하고 영업에 지장이 있다 하니 나와서 보고 없애던지 아니면 축소하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 현장에 나가보니 음식물 쓰레기을 이곳에 버리기 때문에 쥐가 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가에서 이곳에 음식물쓰레기를 두지 않는 등 원인을 없애라는 당부와 함께 화단을 옮기거나 없앨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 후 화단 내 쥐구멍을 막고 듬성듬성한 곳에 수목을 촘촘히 심어 다듬었다.
한 해가 지나고 올해 이곳에 도의원 재정건의사업비로 보도정비를 할 계획이니 이 참에 화단도 정비되길 원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차후 보도정비계획에 의거 불가피하게 화단이 축소되거나 제거되어야 된다면 사업단계에서 검토해보자고 했다.
지난달 공사에 들어가기 전 또다시 이 화단의 철거가 거론되었다. 도로정비 부서에 알아보니 도로선형 변경 없이 보도블록만 교체한다는 것이다. 다만 화단관리 부서의 승인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한날 구청 건설과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보도개량 공사관내 동사무소에서 도의원과 시의원, 주민들이 모여 보도공사 관련 간담회를 하는데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시청 녹지관리 부서에서 참석해야 될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면서 그래도 꼭 참석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굳이 할 역할이 없다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국장, 과장을 모시고 출장 중이었는데 해당지역 시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람들 다 모아놓고 기다리는데 왜 안 오나" 하는 것이다. "거기 왜 갑니까? 지금 일 때문에 출장 중입니다" 했더니 과장을 바꾸란다. 과장은 "누군데?" 하고 물었고, 순간 "○○○, ○○○입니다" 하고는 전화를 바꾸어드렸다.
"○○○이라고? '의원님'이라고 해야지!" 전화기를 받아든 과장은 쩔쩔매고 있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전화한 목적과는 상관없이 "뭐 임 계장 이 사람, ○○○, ○○○이라고?" 하면서, '의원님'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은 것을 두고 호통을 쳤다. 수화기를 막지 않고 전화기를 건네면서 했던 말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옆에 앉아 계시던 국장이 상황판단을 하고 "차 돌려라. 지금 바로 간다고 하이소" 하고는 현장 일을 접고 동사무소 회의실로 갔다. 이러한 민원이 있음을 국장은 처음 알았다. 모처럼 모시고 나온 국장님께 누를 끼치지 않겠다고 한 일 때문에 오히려 일이 꼬여 버렸다.
간담회장 입구에서 국장과 과장은 방방 뜨고 있는 그 시의원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는 간담회장에 "과장만 들어오셔요" 하고 잡아끌 듯 과장을 데리고 들어갔다. 30여 분 지나서야 문이 열렸는데 모두들 표정들이 밝았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차로 이동하면서 "어찌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과장은 보도화단 수벽을 좀 낮추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더 낮은 영산홍으로 싹 교체하거나 이도 맘에 안들면 보도정비공사를 할 때 화단 폭을 줄이는 것도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하였다는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내 말실수로 책잡힌 상황에서 과다한 요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밀렸을 것이란 예상이다. 차후 공사 시 민원 제기한 상가 사장의 의견을 들어서 하라는 단서도 붙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상가를 찿아갔다. 종업원들만 있었고, 화단 때문에 시청에서 나왔다고 했다. 10여 분지나 사장이 도착하였다.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물었더니 사장은 "이거 없애면 안 됩니까?" 하길래 저는 웃으며 "그럴 수는 없지요" 하고 답했다.
상가 사장은 화단을 없애라고 압박하고 사장은 없앨 수 없다면 화단 폭을 반으로 줄이고 상가 입구 쪽 1미터 가량이라도 없애달라고 했다.
안 된다고 했다. 대신 현 상태에서 철재 펜스를 없애고 화단 높이를 최대한 낮추어 보기 좋게 만들어드리겠다는 제안을 했다. 사장은 "왜 자꾸 말이 틀립니까?" 하며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 화단 뒷편 높은 꽃대강을 뽑고 낮은 영산홍을 화단 전체에 심어달라고 했다.
택시를 잡는다든지 차에서 짐을 내린다든지 할 때 화단의 수목을 밟고 드나들 수 있으므로, 낮은 영산홍만 심었을 때는 화단 둘레로 보기 싫은 철제 펜스를 다시 설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듣고 있던 사장은 "그럼 알았어요" 하며 "저쪽 가게에 가서도 의논을 한번 해보세요" 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게에는 사장이 없어 만나지 못하고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일은 커지고 꼬이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 있어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나갈 테니 현장에 있으소" 한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고 물었더니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장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충분히 설득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꼭 나오시려면 누구도 만나지 말고 현장만 보고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시의원의 압박에 공무원들은 '샌드위치' 신세 전화를 끊고 기다리니 과장이 현장을 보고 오셨다.
"임 계장, 마 화단 좀 축소해주면 안 되겠나?""왜요? 누가 또 뭐라 하던가요?"과장은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회의시간, 여러 과장들이 앉아 있는 가운데 우리 과장은 또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앞으로 임 계장은 출장 내보내지 마소" 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라고 과장을 압박했다.
정말 하루 하루, 시간 시간이 갈등의 연속이다. 과장은 "임 계장, 나는 괜찮다. 이 나이에 뭔 욕심이 있것노. 그래도 임 계장이 버텨주니 안심이다. 과장으로서 대들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임 계장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고 말했다. 정말 샌드위치였다. 과장만 바라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시의원이 밀어붙인다 하여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 뒤 과장과 의논하여 그 일대 화단을 정비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갔다. 철제펜스를 철거하고 화단을 하나하나 다듬고 나무를 손질하였다. 첫 번째 화단을 막 다듬고 있는데 양복을 입은 선량이 한 분 가까이 오시더니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하며 명함을 건넨다.
이 지역 도의원이었다. 한창 일하고 있는 화단 가까이 가서는 "이거 내가 하라고 했는데, 뜯고 이만큼 줄일 건데, 그 작업 하죠?" 하며 허리를 구부린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답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뒤에 서 있던 내가 "그거 안 줄입니다. 철제펜스만 제거하고 수벽 키를 낮추면서 보기 좋게 다듬기만 할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때서야 몸을 바로세워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묻는다. "예, 시청 계장입니다" 하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뭐요? 공무원이네. 그럼 내가 도의원이라고 밝혔으면 공무원이라고 말을 해야지!" 하며 언성을 높였다.
시의원, 도의원은 공무원을 막 대하려 들고 "허~참, 공무원이라 했으면 지금처럼 함부로 대하려고 했습니까?" 하니 주춤한다. 이 사람들 공무원은 저네들 밥으로 생각한 지 오래다. 유일하게 공무원만이 저네들에게 "예, 예" 하면서 굽실거리린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다 옆에 나란히 서서 둘 다 격앙된 감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인사하고 헤어지려는 찰라, 뒤에 서 있던 도의원 보좌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마디 "공무원이면 공무원이라 케야지. 도의원님께 그 태도가 뭐요? 잘못했네" 하는 것이다.
모두가 끝난 상황인데 이 사람이 또 뒷불을 지폈다. 이렇게 해서 서로 옥신각신하다 상호 감정이 상한 상태라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한 10분 지났을까?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의원하고 뭔 일이 있었소?" 하고 묻는다. 높으신 도의원도 이렇게 고자질하는 세상이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말단 공무원은 어데다 하소연 할꼬?
권력이 있다는 부류들이 오히려 고자질은 더 잘한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의원님'인 자신의 잘못은 감사실에서 처벌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임종만의 참세상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