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는 국가지정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로서 문화재보호법 제44조에 따라 문화재구역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징수된 입장료는 사찰의 소중한 문화재를 유지·보수하는 데 쓰여지고 있습니다."지리산 천은사에서 발행한 '문화재구역입장료' 입장권에 적힌 글입니다.
지난 12일, 10월 말에 가려던 지리산행을 차일피일 미루다 드디어 떠났습니다. 여수에서 구례 버스터미널까지는 자가용으로 이동했고, 성삼재까지는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버스가 화엄사 주차장을 돌아 천은사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가 그나마 붙어 있던 낙엽을 싹 쓸어갔습니다. 창밖 풍경이 황량합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이윽고 천은사 입구에 도착합니다.
큰 문 옆에 조그만 매표소가 보입니다. 2006년 말까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꼬박꼬박 돈을 걷던 곳입니다. 웬일인지 그곳에 버스가 얌전히 멈춥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같은 조끼를 걸치고 버스에 오릅니다. 그들은 입장료를 받겠으니 돈을 준비하랍니다. 황당합니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승객들은 저항 없고 돈 걷는 사람은 당연한 듯 돈 챙겼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사람은 천은사에서 '문화재구역입장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던 분들입니다. 천은사 소유의 땅을 지나기 때문에 '문화재구역입장료'를 내야 한답니다. 참고로 문화재보호법에는 '문화재구역입장료'라는 말은 없고 '문화재관람료'라는 표현은 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지리산을 자가용으로 다녀온 터라, 구례 쪽 매표소에서 돈을 받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쾌한 기분 때문에 가능하면 구례 쪽에서 성삼재를 오르지 않고, 남원까지 먼 길을 돌아 지리산을 오르곤 했지요.
그날 저는 버스까지 올라와 통행료를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 기대는 단박에 깨졌죠. 두 분은 착실히 버스 안으로 들어와 일일이 돈을 걷더군요.
승객들은 모두 황당해 하면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주섬주섬 돈을 꺼냅니다. 돈 걷는 사람도 당연한 듯 승객들이 내민 돈을 착실히 챙겨 버스를 내립니다. 얄밉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천은사 기왓장도 못보고 버스는 곧장 성삼재로...
버스가 다시 움직입니다. 제 마음속에 궁금증과 화가 치밉니다. 도대체 입장료 받는 근거가 뭘까요? 입장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화재보호법 제49조가 돈을 걷는 근거네요. 법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제49조(관람료의 징수) ①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 또는 보유자는 그 문화재를 공개하는 경우 관람자로부터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다. 다만, 관리단체가 지정된 경우에는 관리단체가 징수권자가 된다. ② 제1항에 따른 관람료는 해당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 보유자 또는 관리단체가 정한다."(<문화재 보호법> 중)법이 그렇다니 억울하지만 꾹 참습니다. 마땅히 하소연 할 곳도 없고요. 그래도 돈을 냈으니 '천은사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며 절 입구라도 구경시켜 주려니' 생각했습니다. 버스가 움직이는 길을 유심히 지켜봤죠.
제 생각은 헛된 꿈이었습니다. 버스는 곧장 성삼재로 향하더군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주차장이라도 들러 돈을 걷는 명분만 세웠어도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그런 수고도 없습니다.
천은사 경내는 모두 문화재 구역, 이곳에 들어오면 입장료 내라
산에서 내려와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지 천은사에 물었습니다. 종무소 직원인 김동만씨는 "천은사 경내는 절을 포함해, 소유한 땅 모두가 문화재 구역이므로 들어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861번 지방도로(구례에서 성삼재 지나 남원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넘는 도로)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861번 지방도로가 나기 전, 이 길은 임도와 군사 작전용 도로였습니다. 번듯한 포장도 없는, 그야말로 산길이었죠. 천은사 경내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고요. 참고로 현재 천은사 소유 땅은 구례 쪽 매표소부터 성삼재 휴게소 못 미쳐 시암재 밑까지 10km에 이릅니다.
즉, 지리산 구례방면 남쪽 산기슭 대부분이 천은사 소유라는 말입니다. 그곳에 정부가 임도와 군사 작전도로를 마음대로 냈습니다. 그러더니 지난 1988년 정부는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길 위에 아스팔트를 씌웠답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이 땅을 사면 안 될까?
올림픽을 맞아 관광객들이 지리산에 쉽게 접근하도록 하고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민심을 추스른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그런데 황당한 일은 도로를 만들면서 천은사 쪽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응당 치러야 할 대가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군사작전 펼치듯 일방적인 행정을 한 겁니다. 그렇게 억울한 사정을 안고 861번 지방도로는 태어났습니다. 천은사 쪽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이 억울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길 막고 문화재 볼 생각 없는 등산객에게 '문화재구역입장료'를 걷으니, 마치 생떼 쓰는 일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 때문인지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 구례 쪽으로 오다 보면 매표소에서 승강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들어진 도로를 연필 자국 지우개로 지우듯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보상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전남도청에 확인해 본 결과 현재 이 도로는 '지방도 미불 용지'로 구분돼 있답니다. 관청이 땅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시기를 놓친 겁니다. 결국 지금은 땅을 사려 해도 살 수 없는 상태가 된 겁니다.
이제 그 땅은 소유자가 팔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야만 팔릴 수 있습니다. 곤혹스럽습니다. 조계종은 도로에 편입된 땅을 팔 생각이 없으니 말이죠. 무슨 이유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물었지만 확실한 대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결국, 861번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천은사 소유 땅을 지나가는 대가로 기약 없이 돈을 내야 합니다. 정부가 막무가내로 만든 도로 때문에, 그리고 땅 팔 생각이 없는 조계종 때문에 애꿎은 국민들만 마음 상하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람료 제도개선협의회', 의미 없이 끝나이런 잡음을 의식했는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지난 2007년 2월, 몇몇 국회의원들이 현재 매표소 위치를 천은사 입구로 옮겨 문화재 관람을 원하는 사람만 돈 받도록 법을 고치려 했지요.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관련 법 개정이 조계종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구례군청과 전라남도를 비롯한 관계 기관에는 불만 가득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폭주하는 민원 때문인지 이번엔 정부가 나섰습니다. 정부는 2008년 '문화재관람료 제도개선협의회'를 만들어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했지요. 그러나 회의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계종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답니다.
"첫째, 2006년 문화재관람료 징수액 수준이 110억 원인데 이를 정부가 지원할 것. 둘째 징수한 관람료는 조계종에서 포괄적으로 사용토록 인정할 것. 셋째, 불교문화재 보존을 위한 근본적 대책을 우선 논의하고 재정 지원을 대폭 늘릴 것. 넷째, 국립공원에 편입된 사찰 토지보상금 1680억 원을 지급할 것."(<문화재관람료 관련 대응방안 검토 보고> 발췌)2008년 한해, 34만5천 명이 여길 지나갔다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회의는 무산된 후 모두가 자포자기 하던 때에 환경부가 나섰습니다. 지난 4월 환경부는 '공원문화유산지구지정'이 가능하도록 '자연공원법'을 개정했습니다.
지난 10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 개정안 내용을 잠깐 들여다보면, 법 제 18조는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관청이 다양한 용도의 지구를 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천은사처럼 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을 '공원문화유산지구'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같은 법 제 37조는 사찰의 주지는 공원관리청과 협의해서 '공원문화유산지구'에 입장하는 사람에게 입장료를 징수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이 경우 입장료를 징수하는 사찰은 문화재보호법 제49조에 따른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구례군청 정영훈씨는 "결국, 천은사는 '문화재관람료'를 받든지 아니면 '공원문화유산지구' 지정에 따른 입장료를 받든지 둘 중 유리한 쪽을 택하면 되는 것"이라며 "용도지구 지정에 따른 입장료 징수는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한 후 모양새만 바꾼 새로운 형태의 입장료 징수는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환경부가 나섰지만 그동안 꼬인 실타래가 쉽게 풀리지는 않겠습니다.
기억할 점은 그 결정을 하는 동안에도 지리산을 찾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구례군청 자료를 보니, 2008년 한 해 동안 34만5천 명이 그 길을 지나갔더군요.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천은사 매표소를 통과합니다. 군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에는 줄기차게 불만 가득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군청 담당자는 입장료 징수와 관련된 불만 섞인 전화 받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랍니다.
조계종과 정부가 서로 한발씩 물러섰으면 좋겠습니다. 이 도로를 이용하는 많은 이들 위해 양보와 타협의 미덕을 보여 줬으면 합니다. 매번 매표소 앞에서 승강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보려니 고통스럽습니다.
조계종은 무소유의 미덕을 보이고 정부는 과거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 안 될까요? 861번 지방도로를 떠올릴 때마다 만날 길 없는 평행선을 보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매표소 앞에서는 티격태격 큰 소리가 오갈 겁니다. '무슨 근거로 도로를 막고, 돈을 받느냐'며 말이죠. 하루빨리 일이 해결돼 편안한 마음으로 지리산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