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길은 설렘이 있다.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본다는 의미와도 같다. 새로운 것에는 호기심이 있고,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여행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거기에는 호기심이 있고 궁금증이 가득하다. 이와는 별개로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고 나면 별것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2일 합천을 거쳐 거창으로 떠난 여행이 이와 같다고나 할까. 그동안 합천, 거창으로 떠난 몇 번의 여행에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거의 다 경험하였기에.
관광버스에서 술 마시고 춤추며, 술기운에 젖어 맘껏 춤추는 관광을 경험한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10년을 훨씬 넘은, 너무 오래 된 탓이리라. 버스 안에 서서, 춤추고 하는 행위가 지금은 엄연한 불법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단체 관광은 이런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 또한, 불법 여부를 떠나 한 번쯤 그런 관광을 가고 싶은 것도 가끔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차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곳에서, 그 지역의 문화와 풍광을 조용히 즐기는 여행이 좋다.
아주 오래 전, 관광버스로 단체로 와 봤던 합천댐. 그때 기억이나, 지금 본 기억이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 작은 배 하나가 엔진소리를 내며 잠자는 호수를 깨우고 있다. 기지개 켜듯, 물살을 일으키는 호수. 벌겋게 황토색 살을 드러낸 작은 섬이 외로워 보인다. 나무라도 좀 심겨져 있었다면 덜 외롭지 않았을까.
1089번 지방도를 따라 굽이굽이 합천호수를 돌고 돈다. 작은 다리에 멈춰 섰다. 낚시질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탄, 작은 배 하나가 넓은 호수를 점령했다. 휴식도 취할 겸, 차에서 내려 한참을 지켜봤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길가에 선 가로수는 잎을 다 떨어뜨렸다. 제철을 잊었는지, 몇 장 남지 않은 검붉은 단풍잎만이 여행자에게 손짓을 한다. 나를 좀 봐 달라는 모습이다. 붉은 단풍 너머 뒤편으로 보이는 호수는 앞서 본 호수처럼 조용하고 평온하다.
59번 국도와 연결되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신원면 방향을 경유해서 거창으로 갈 수 있지만, 봉산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는 생각에. 역시 코스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굽이진 길을 돌아가는 내내, 호수가 나의 눈을 즐겁게 해 준 동무가 돼 주었기 때문. 많은 비가 내리지 않은 탓인지, 호수는 물이 많이 빠져 있는 상태다.
거창하지도 않은, 아담한 사찰 송계사여행길의 끝은 거창 송계사. 덕유산맥의 한 자락인 북상면 계곡 끝자락에 있다. 그렇게 큰 사찰도 아니요, 많은 불자들이 찾는 대형 사찰도 아니다. 그저, 제자리에서 찾아오는 불자들을 조용히, 반갑게 맞이해 주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그런 절이다. 신라 문무왕 7년(667년)에 창건한 절로, 전통사찰 제57호로 등록돼 있다.
거창사람도 아닌 사람이 거창에 다다르자, 거창하게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거창사과'. 아마도 초등학교 때 '사회와부도'라는 과목을 제대로(?) 공부한 탓에 사과가 연상 되었을까. 길가 주변 사과밭은 거의 수확을 마친 상태로, 사과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는 거의 볼 수가 없다. 사과 잎사귀조차도 다 떨어져 버린 늦가을 풍경이다. 북상면을 지나자 길목에 붉디붉은 탐스러운 사과가 여행자를 멈추게 한다.
그런데 사과나무가 사과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가 언덕에 있다. 그것도 붉은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서. 차에서 잠시 내려 낮은 언덕을 올라 사진을 찍고 내려서려는데, 땅에 떨어진 몇 개의 사과가 눈에 띈다. 영점 영 몇 초, 잠시 동안 떨어진 사과를 주워 갈까 생각했지만, 다시 영점 영 몇 초 사이 그 생각을 포기했다. 절에 기도하러 가면서 이렇게 작은 탐욕에 잠시나마 젖어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불자는 삼독을 경계해야 함은 물론이다. 욕심내고, 성내고 그리고 어리석음을.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덕유산 수리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사의 말사다. 원효와 의상 두 고승이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세웠는데 그 하나가 송계암이다. 임진왜란 때 5개 암자 모두 전소되는 등 숱한 역사를 안고 있는 송계사.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일주문, 합장 기도하고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모습의 전각이 있다. 극락보전 현판과 글씨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황금색 글씨도 아니요, 화려하게 조각된 현판도 아니다.
돌 거북 입에서 흘러나오는 덕유산 산수를 쪽박에 한 모금 떴다. 보시하는 마음으로 쭉 들이켜니, 부처가 따로 없다. 언덕 위로 보이는 대웅전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풍경이 우는 소리는 더욱 처량하다. 대웅전 법당엔 목탁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도 잠시 그 소리에 빠져 들었다. 분명, 사람에 관한 소리. 재를 올리는 소리며, 염불을 왼다. 법당 입구 신발을 벗은 놓은 것을 보니 재를 지내는 게 분명하다.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절에 다니면서부터 너무나도 잘 아는 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합장 기도했다.
절터 뒤로 난 산길을 따라 올랐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하루하루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사색에 잠기게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 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는 삼성각이 하늘에 걸려있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사찰 당우 중 하나로 보통 불전 뒤에 자리하고 있다.
넓지 않은 절터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외딴 산속,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절이 외로워 보인다. 산과 하늘에 각각 하나씩 걸린 잘 익은 감. 언제까지 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거리는 시래기는 춥고 긴 겨울이 다가옴을 알려준다. 불심을 가득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송계사 입구 들머리에 수북이 쌓인 낙엽 밟는 소리가 머리를 맑게 한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울음소리를 내는 풍경소리와도 같이.
거창들녘은 가을걷이를 끝냈다. 넓은 들판에는 볏단을 세워 놓은 모습도 보이고, 볏짚을 포장한 하얀 비닐포대도 널려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소의 먹이다. 잎사귀와 줄기는 시들었지만,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추밭. 그 고추밭이 이 가을이 다 지나가고 있음을 여행자에게 알려 주고 있다. 지금까지 봐 왔던 합천, 거창여행. 이번 여행은 그간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거제지역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뉴스앤거제 그리고 제 블로그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