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여섯 번째, 이번엔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전국의 시민기자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나온 기사 중에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있다.
"전라도 출신이라 쪽팔려...본적 숨긴 적도"라는 제목의 글이다. '호남에 대한 편견, 제발 그만 좀'이라는 부제를 단 이 글을 읽으면서 난 자연스레 내 고향 집안 어른들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이 어른들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그에 앞서 한 마디 하겠다. 앞서 말한 글에 달린 댓글 중에 '이제 지역감정이 사라지고 있는데 왜 다시 들춰내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공감한다. 확실히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 지역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 바람직하다. 그런 상황에서 새삼 전라도가 어떠니, 경상도가 어떠니 하는 말 자체가 상처를 다시 끄집어 내는 일일 수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그럴 수 있다. 내 글이 상처를 도지게 한다면 그건 글을 잘 못 쓴 내 탓이다. 내 의도는 지역감정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내가 겪은 일을 통해 드러내고 이 편견을 함께 던져 보자는 것이다. 부디 내 의도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내가 왜 백제 사람을 사위로 맞겠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친척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그래, 사위는 어디 사람인가?"하고 친정아버지께 물으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고는 "당연히 우리 사람이지"라고 한 뒤 고집 센 어투를 한층 더하며 "내가 왜 백제 사람을 사위로 삼겠나?"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 사람'은 전라도 사람을 뜻한다. 역사에서 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걸쳐 있건만 내 아버지는 '백제=전라도', '신라=경상도'란 단순 구분법에 기초해 가끔 '백제 사람', '신라 사람'이란 말을 하시곤 했다.
도대체 어디에 살기에 그러느냐고? 내 윗대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이래 줄곧 우리 집안은 경상남도 거창군 덕유산 자락에 살아왔다. 나 역시 거창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집이 있는 마을은 해발고도만도 680m에 달한다. 강줄기가 시작되는 첫 마을이며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대처로 나가는 길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다 자라 생각해 보니 어찌 그리 좁은 곳에 자리 잡고 사셨을까 싶다. '신라 사람'이라는 내 남편은 대구 사람이다(대구라 하지만 태어난 후 어린 시절을 잠깐 보낸 뒤 서울로 왔으니 '유사품'이라고나 할까).
아버지는 왜 '백제 사람을 사위로 맞겠느냐'고 할 정도로 호남 사람을 싫어하게 되셨을까?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평소 너무도 싹싹하게 잘 대해 주던 전라도 출신 사람이 이집 저집에서 돈을 꾸고는 하루아침에 집을 버려두고 도망을 쳤는데 아버지도 피해 당사자였으며 이 일은 가난한 시골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건 대구 분인 내 시아버지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시아버지 역시 평소 잘 대해 주던 전라도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기꾼에 전라도 사람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유독 '전라도 사기꾼' 이야기가 많았다. 이런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교사가 잘못한 일이 알려졌을 때 그 교사가 전교조 교사라면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닌가 싶다.
빨치산이 드셌던 곳, 그런데 그 빨치산이...아버지가 전라도를 싫어하는 또다른 이유는 뜻밖에도 '빨치산'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로 우리 마을이 있는 덕유산 자락에는 빨치산이 자주 출몰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 아시는 분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생전 아버지가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셨기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하시기를 빨치산들이 아버지가 잘 아는 분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구덩이를 파라하고 돌팔매질로 죽이고는 대충 묻었는데 그 빨치산 중에 안면이 있는 전라도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주동했다는 것이다.
난리 와중에 나온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그럴 사정이 있었는지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전라도 사람이 주동해 사람을 죽였다'고 믿었다.
좌우익 대립이 빚어낸 비극의 땅 '거창'
나는 돈 떼어간 사람이 부추긴 가난에 따른 피해의식과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못된 무리'에 대한 두려움에 한자리를 내주고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현대사를 공부할 때는 우리 사회를 보는 눈과 역사관에 대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극렬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지역감정까지 가세한 가운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로 살아야 했던 민초로서 고향 어른들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뒤틀린 지역감정의 매듭을 풀어 드리지는 못하고 '신라 사람'(?)을 사위로 맞게 하는 안도감만 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지인의 사연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사건도 거창에서 일어났다. 내가 거창 출신이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떠올린다. 한국전쟁 기간 거창의 최남단 신원면에서 국군이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이 끔찍한 사건은 거창 사람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몇 년 전 여름휴가를 고향으로 갔다가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거창 사건 역사관에 다녀온 뒤 건네준 자료집을 보고 난 깜짝 놀랐다. 무려 719명이 희생되었고 그 중 359명이 어린이었다고 한다. 빨치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총부리에 쓰러져 간 여리고 어린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간단하게 아버지 지인은 좌익에게, 희생된 거창사람들은 우익에게 당했다고 말해도 될까? 여하튼 내게 있어 거창은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이 빚어낸 비극의 땅이다. 거기에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호남에 대한 편견까지. 거창하게 말해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다 이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곳에서 난 자랐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가파른 산골짜기 만큼이나 골 파인 아버지 이마의 주름, 이쪽저쪽을 갈라 놓지 않고는 우리나라를 설명하지 못하던 집안 어르신들 등 고향이라는 푸근하고 편안하며 정겨운 이미지에 겹쳐지는 삶의 무게에서 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고향을 떠올리면 이육사 시인이 고국과 고향의 초여름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광복을 고대하며 쓴 시 '청포도'가 생각난다. 내 고향도 그런 포근한 시절이 있었기를, 그리고 앞으로는 계속 그러기를 바라면서. 문득 이육사의 '청포도'를 감상하고 싶다. 북한 오영성 작가의 작품 '풍년든 포도원에서'와 함께.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