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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뒤집긴 쉽지 않다. 상식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폭력은 나쁘다'라는 말도 그렇다. 어떤 상황이든 폭력은 절대로 행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폭력을 통해 보이지 않던 더 큰 폭력을 '폭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 불복종'이 도덕적으로 권장되는 대응방식일지는 몰라도, 이것만을 따라서는 잘못된 구조를 영원히 뒤집을 수 없다.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폭력'은 때에 따라 필수적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은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폭력이 일어나는 이유와 맥락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가시적 폭력'이란 말로 이를 갈파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을 비난하면 그 폭력을 야기한 구조적 폭력 즉 근본적 원인, 비가시적 폭력을 은폐한다고 본 것이다.

한미FTA 비준동의안 과정에서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터트린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루탄이 국회에서 터진 것 자체만 보면 누가 봐도 엄연한 '테러행위'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폭력으로 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여당의 일방적 의결이란 '민주주의 테러' 행위에 맞선 것이다. 구조적·비가시적 폭력에 맞서 이를 극적으로 드러낸 '가시적 폭력'으로 보는 게 맞다.

이 '가시적 폭력'은 필요악이 아니라 절대선이다. 이를 통해서만 구조적 폭력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폭력 불복종' 방식으로는 다수 여당의 일방적 독주를 막을 수 없다. 되레 이 상황에서 '비폭력'은 '잠재적 동조'와 비견할만하다. 투표라는 민주주의 행위를 하긴 하나 법안 심의도 심의위에서 이뤄지지 않고, 국민적 합의도 제대로 안 된 통상 조약을 소수 대의제 의원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상황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 불합리함을 전하지 않는다면 '동조자'가 될 뿐이다. 결국 김 의원은 '최루탄 투척'이란 극단적인 폭력을 써 '민주주의 테러'라는 폭력을 알렸다. 이런 폭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는 '선'이다.

'모든 폭력'을 매도하면 비가시적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현재 구조는 더욱 공고화될 것이다. 현재 구조 속 기득권층은 어떤 폭력이 일어나 구조가 변화되길 바라지 않는다. 소요·폭력 그 자체가 드러내는 '현실의 모습'을 어떻게든 은폐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프랑스 외곽에서 일어난 이민자 폭동은 이민자가 배제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응축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폭력이 없었다면, 프랑스에서 이민자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2011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에 테러를 가한 국회의 행태를 은폐하기 위해 '폭력의 상식'을 적극 이용한다. 그 어떤 폭력도 '반 사회적 테러'라고 낙인찍으면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논리와 행위만이 가능할테니 말이다. 그 '상식선'에서의 행위는 구조적 폭력을 결코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김선동 의원이 드러낸 '구조적 폭력'에 대한 논의다. 왜 그가 이런 극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고, '진정한 테러는 민주주의에 가해졌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한미FTA 비준 방식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는다. 그저 김 의원의 '테러'가 국회 최초의 사건이라며 그 사안 자체만을 비난하고 있다. 진보언론역시 최루탄 폭력의 배경을 차분히 분석해 '구조적 폭력'을 천착하지 않는다. 언론들이 '폭력은 나쁘다'란 상식에 갇힌 탓이다.

여기에 '폭력의 상식'을 깨야 할 이유가 있다. 선한 폭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낼 때 우리 사회는 더 성숙해질 수 있다. 김 의원의 폭력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긴선동 의원#최루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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