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발전을 거듭해 갈수록 사람들은 옛것을 그리워하게 된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정겨움, 옛 물건에 배인 손때, 오랜 시간 숙성시켜야 제 맛을 내는 옛날 방식의 음식 등, '빠름'이 넘어서지 못한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는 이러한 것들은 지금 시절에 더욱 가치를 발하고 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찾아볼 수 있는 소소하지만 손때 묻은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지금부터 시작한다. <기자 말>대구 여행에서 하나의 테마를 정하라면 복고로의 여행도 빼놓을 수 없다. 대구 반월당 지하철역에 내리면 떡집 골목으로 유명한 염매시장이 펼쳐지는데, 한때는 대구에서 제일 물건 좋기로 유명한 큰 시장이었건만 이제는 도심 한가운데 쓸쓸히 남은 공간으로, 낡은 건물과 비릿한 냄새만이 그 시절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낡고 조그만 전파사에는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전등에 벌써 불을 들여놨고, 그 옆에 구색 맞춰 쪼롬히 바구니를 내다놓은 과일가게에선 최근 들어 수입과일도 제법 보인다. 몇 벌 안 걸린 손님용 옷걸이 뒤로 증기를 내뿜으며 다림질 하는 세탁소 주인은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을 다림질 하는 중이다.
여름이면 웃통을 훌러덩 벗어제낀 남자들이 노상에 앉아 지루해 죽겠단 듯 하품을 해대는 곳. 이제 겨울이 되니 다들 가게 안에 꽁꽁 들어앉아선 금년에 신축한 현대백화점 오색찬란한 간판을 쳐다보며, '그 많은 인파들, 이리도 좀 오면 딱 좋겠구만' 두런거리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또박또박 길을 따라 걸으면 색색가지 떡 모형을 죽 내다놓고 늘어선 떡전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혼수용, 제사용 같이 화려한 것들을 취급하는지라 광주리 그득히 담긴 떡들은 구수하니 입맛을 자극한다.
그럴 때면 어느 떡집 조그만 창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길고양이 놈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녀석의 담타는 솜씨가 너무도 능숙하고 재빠른 것이 한두 번 드나든 게 아니다. 떡 쪼가리 한입 베어 물고 어딘가의 제 식구들 나눠주려는 속셈인지도 모르겠으니, 그놈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기겠건만, 혹여나 주인이 놔둔 극약에 된통 고생이나 안 할런가 심히 걱정이다.
떡 냄새에 섞여 찌짐 냄새도 진동을 한다. 머리조차 제대로 빗지 않은 아낙이 질척하게 반죽한 밀가루를, 방금 씻어 물 뚝뚝 흐르는 정구지(부추)에다 척척 묻혀서 넓적한 판 위에 털썩 쏟아 붓고 지글지글 지져낸 찌짐. 그 자리에서 훌훌 불어가며 먹어야 제 맛인 이런 음식은 시장 구경의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길에 뚝하니 서 있는 커다란 솥에선 허연 김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데, 가게 안에서 정신없이 설거지 하던 또 다른 여자 하나가 창으로 손만 내민 채 국자로 솥 안을 휘휘 젓는 풍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비릿한 냄새가 스윽 피어나는 것이, 보나마나 돼지머리국 임에 틀림없다. 이 길의 단골 노인들은 이 맛이 그리워 하루가 멀다 찾아들고, 이들을 위해 음식 가격은 오를 줄을 모른다.
떡으로 유명하다지만 송이버섯 가게도 많다. 곁들여서 송이 음식이나 분식도 판다. 인근 금융플라자나 백화점 직원들이 저렴한 점심을 위해 들르는 분식점에는 오뎅볶음밥 같은 별난 메뉴도 있다. 종일 백화점 앞에서 오들거리며 털부츠 팔던 직원은 문이 부서져라 들어와선 "이모, 다 차리놨능교?" 해대기 바쁘다. 주인이 얼른 한 그릇 대령하면 코를 박은 채 먹어치우고, 난로 위 결명자차 한 사발 퍼마신 뒤 다시 추위 속으로 돈 벌러 나간다.
시장통 한 켠에 멋모르고 들어선 것 같은 최신식 커피숍에는 때 아니게 노인들이 한 가득이다.
"으흐흐, 지랄들 한다. 와 캐쌌노?" 등산복 차림의 십여 명 노인들은 산행 후 목을 축이러 왔는지, 딱 두 테이블 있던 것을 그러모아선 허허 이야기꽃에 정신이 없다. 아가씨 손님들 앞에서 자리도 못 내준 주인이 어쩔까 저쩔까 발을 동동 구르건 말건.
이제 약전 골목을 지나서 진골목이다. 그 한가운데 위치한 미도다방. 1970년대 분위기를 간직한 채 시간을 거슬러 가는 도심 속의 작은 섬 같은 곳. 삐걱 하며 문을 여니 별스럽게 오늘은 손님이 제법이다. 50, 60대뿐 아니라 20대 젊은이들도 군데군데 틀어 앉은 모습이 어느 집 명절날 대청마루 풍경 같다. 혼자 시집 읽던 노인 하나는 낯선 객의 출현에 "어흠" 하며 자세 가다듬더니 더욱 열심히 독서 삼매경에 들어간다.
등나무 의자와 낡은 소파, 촌스럽지만 정겨운 자부동(방석이라 하면 느낌이 안 온다), 카운터 뒤에는 태극기도 걸린 것이 옛날 다방 '딱' 맞다.
언제 세탁한 건지 묻고 싶은 옛날식 레이스 암막 커튼, 이가 숭숭 빠져나간 프림통과 설탕통엔 촌스러운 글씨체로 가게 이름이 빼뚜름이 박혀 있어 더욱 정겹고, 넓게 퍼진 회갑잔치 한복 입은 마담은 손님 객석을 순회하며 노인들 얘기 참견하랴 바쁘고, 나이 60은 됨직한 종업원에게 "김양아! 쌍화차!" 외치는 소리는 생뚱맞지만 재미있다. 음악 같은 건 틀지도 않지만 누구 하나 불평도 없이 이 공간을 이야기로 가득 가득 채우고만 있다.
맹인, 농사꾼, 교수, 문학가 등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마담과 종업원들은 각종 크고 작은 자리에 몸담은 손님은 무조건 '회장님'이란 존칭을 써서 으쓱하게 해주고, 그 외에는 "어머, 오빠"라고 친근하게 맞이한다. 이삼천 원짜리 차 한 잔 시키고도 옛날 과자를 수북이 먹을 수 있는 것도 특이하다. 알 수 없는 객을 향해 재수 없단 듯 혀를 차던 마담과 종업원은 노트북 위를 내달리는 손을 보자 슬며시 다정한 말도 건넨다.
"차가 다 식어서 우짜노? 뎁혀줄 테니 마시고 일 하이소오." 덧붙이는 글 | 염매시장을 다녀온 날은 11월 25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