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아합과 이세벨이 벌인 사건이 등장한다. 아합은 북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이고, 이세벨은 그의 안 사람이다. 둘은 정략적인 혼인을 맺었고, 어느 정도 찰덕궁합이 될 즈음에, 불량배를 동원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버린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성모독죄'에 있었다.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했다는 증언을 불량배들이 꾸며서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돌로 쳐 죽인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왕이 그 포도원을 집어 삼켰던 것이다. 모두가 이세벨이 꼼수로 벌인 일이었다.
이은의 <박회장의 그림창고>속에 등장하는 박회장과 그의 간부인 이사벨이 꼭 그런 이미지를 지녔다. 이 책은 재벌그룹의 오너가 비자금 조성과 정치자원 후원금을 위해 미술품 거래로 돈 세탁 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평범한 시민과 전직 방송기자의 활약을 담고 있다. 모두가 꾸민 이야기지만 정말로 그럴듯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미용실을 꾸리고 있는 소미는 사채업자가 빌려 준 3천만 원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며 시달린다. 그를 알게 된 친구 진구가 그녀의 남동생과 함께 짜고서 '뻑치기'하다 돈과 유명 그림 한 점을 훔쳐서 달아난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소설이 재밌는 것은 짜임새 있는 구성력과 등장 인물들의 개성력 넘치는 묘미를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재벌그룹의 오너로 등장하는 박노수 회장과 그녀의 간부인 이사벨, 그들의 돈세탁 자금을 어느 정도만 빼돌리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그걸 전부 폭로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치밀한 플롯이 돋보인다. 더욱이 미술품과 관련된 비자금 세탁 방법도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고, 미술품 경매 방법도 적절하게 알려준다.
"재벌 그룹에서 미술관을 짓거나, 재벌 회장 부인이나 딸들이 미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미술은 그들의 품격을 단번에 계급적 차원으로 부상시켜 그들이 일반인들과 전혀 다른 인간임을 새삼 강조해준다. 또 돈밖에 모른다는 속물 이미지를 고상하고 우아하게 바꿔주는 '정신적 명품'의 역할도 한다. 한 마디로 상류에 의한, 상류만을 위한, 상류사회의 환경을 조성하려는 그들의 최종적인 코팅의 산물인 것이다."(본문 내용, 31쪽)이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재벌그룹들이 돈세탁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분식회계, 탈세, 무자료거래, 장부조작, 다단계인수합병, 부동산 자전거래, 주식가치 부풀리기, 조가조작 등등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와 같은 검은 돈들을 흰 돈으로 바꾸기 위해 또 수표 바꿔치기라든지 대포통장, 차명계좌, 양도성예금증서, 불법해외부동산 매임, 유령회사 만들기 등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위험하니까 결국 미술품 구입으로 옮겨 탄다고 이 책에서 밝혀준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티치아노나 카라바조와 같은 거장들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적인 예술가로만 안다. 하지만 당시 왕실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인류 문화에 길이 남을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천재적인 예술가이기 이전에 후원자의 후원을 듬뿍 받아내는 천재적인 정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본문내용, 155쪽)아합과 이세벨처럼, 박회장과 그의 간부인 이사벨이 떵떵거리는 장면이다. 박회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먹여 살린 일등공신이 대기업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고, 이사벨도 대기업과 같은 큰 손들이 그림을 사주었기에 유명한 명화가 탄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건 미술(Art)에 M(Money)을 더해 또 다른 정치 시장(Mart)을 만든 꼴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쓴 이은은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언론사 기자나 검찰의 입장에서 쓴 글은 아니라고 밝힌다. 한 마디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나 '진짜 실체'를 폭로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유인 즉 미술품과 관련해 터진 사건들이 대부분 무혐의 판정을 받았고, 또 미술계를 아는 사람들은 그걸 수사하기가 어려운 걸 안다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알지 않을까? 미술시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지막까지 통제하지 못하는 최대의 방패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