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1961년 5·16 쿠데타 집단이 정권 장악에 성공하자 북한의 대남 정보공작기관도 아연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일단 남한에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 대북 정책기조가 장면 정부에 비해 강경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도영을 제치고 실권자가 된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신상명세를 본 그들은 다시 한번 긴장했다. 옛 남로당의 조선경비대 프락치 출신 아닌가. 대남공작 총수격인 로동당 부위원장 겸 연락국장 이효순은 박정희에 대한 인적 정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인력을 총동원했다.
박정희는 대구 구미 출신, 일제 때 소학교 교사,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만주군 소대장, 광복군 합류, 조선경비대 장교로 남로당 지하조직책을 맡았다. 그의 형 박상희도 남로당 조직원으로 1946년 10월 영남지방 민중봉기 때 구미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진압경찰에 피살됐다.
북한의 대남 정보공작기관이 결정적으로 놀란 것은 박정희가 남로당 조선경비대 지하조직원으로 입당할 때 보증인이 당시 북한 정권의 고위 간부였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전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 박정희와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대남공작 총수 이효순은 무릎을 쳤다. 박정희가 전향하면서 남로당의 군내 지하조직에 막대한 희생을 안겨 준 장본인이지만 그래도 이용할 수 있는 끈은 충분히 된다고 판단했다. 황태성이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친구며 동지였다는 보고자료도 남아 있었다.
황태성이라면 확실한 사회주의자로 일제 때부터 해방 직후까지 영남지방 좌익계열의 중심인물이었다. 큰아들 황경옥은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사회주의자로 1949년 대구 지하항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처형당했다. 차남 황기옥은 세브란스 의대 재학 중 월북해 평양 의대를 졸업했다.
이효순은 수상 김일성에게 황태성과 새로이 남한 실권자가 된 박정희의 인연을 소상히 보고한다. 이효순은 얼마 전 남한의 영관급을 단장으로 한 장교단이 서해의 북한 지역 용매도에 들어와 비밀접촉을 요청하고 돌아간 일이 있음을 밝혔다. 의도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남쪽이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일성은 남로당 출신 중에서 남한의 집권세력과 인연이 닿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지금 남반부 실권자가 된 박정희를 어렸을 때 지도했던 동무가 황태성 전 무역성 부상입네다. 박정희의 형과 절친했습니다.""그래 지금 황태성 동지는 무얼 하고 있지요?" "몸이 안 좋아서, 무역성 부상을 하다가 1955년도 9월에 퇴직하고 그 후 쭉 요양 중입네다. 폐가 안 좋아서 한 쪽 것을 떼어내는 수술을 한 모양입네다." "그래 갖고야 어디 어려운 사업을 할 수 있겠나." "본인이 의지만 있으면야 뭐 …. 워낙 남반부에 객관적 여건이 좋은 동무입네다. 지금도 거기에 친척이 있고 옛날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꽤 있고요." 이효순은 지금의 남한 정권을 볼 때 황태성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황태성의 건강 상태가 걱정되긴 했다. 김일성과 이효순은 황태성을 불러 면담하기로 했다.
"인연 깊은 남한 실권자 만나 평화통일 설득하겠다" 황태성은 김일성과 이효순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사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열정을 보였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길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제가 가서 인연이 있는 그 사람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수상 동지의 뜻을 박정희에게 전하고 대타협을 이끌어 내면 평화통일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협력하면서 평화통일을 하루 빨리 이룩하자고 설득하겠습니다." 황태성은 경북 상주 태생으로 일제 치하에서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다닌 인텔리였다. 제일고보 4학년 때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해 퇴학처분을 받았고 연희전문에서도 2학년 때 퇴학으로 쫓겨났다. 일제 치하에서 내내 항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그는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이던 신간회의 김천지역 책임자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의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다가 왜경에 검거돼 2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영남지방 좌익계열의 중심역할을 했다. 1946년 10월 대구지방 민중봉기를 주동하다가 경찰의 검거를 피해 지하로 숨었고 1년 뒤 월북했다. 이때 고향 친구이자 동지인 박정희의 둘째 형 박상희는 진압 경찰에 피살된다.
황태성은 일찍이 친구 박상희에게 자신의 여동생의 친구인 신여성 조귀〇을 중매해줬고 결혼을 성사시킨다. 조귀〇은 황태성의 여동생과 함께 일제하 민족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회원이었다. 박상희는 황태성의 말만 듣고 맞선도 보지 않은 채 결혼을 승낙할 만큼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박정희 남로당 가입 때 보증인, 신변위험 걱정 안해
청소년 시절 박정희는 열 살 위인 황태성을 형보다 더 따랐다. 매년 설마다 세배를 다녔다. 박정희에겐 자신의 고민과 신상문제에 대해 조언해 줄 때 지적 깊이가 느껴지는 황태성이 인생의 멘토였다. 대구사범에 진학할 때 황태성에게 찾아가 의논했고 후에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도 그와 깊이 상의했다.
황태성은 보통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할 법한 군관학교 지원에 대해서도 박정희를 격려해 주었다. 박정희가 1946년 10월 영남 민중봉기를 전후해서 남로당에 가입할 때도 황태성이 보증을 서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황태성은 남한의 실권자가 된 박정희를 찾아가면 뜻대로 대타협이 이루어지진 않더라도 최소한 신변 위험은 없으리라 판단했다. 박정희뿐 아니라 그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도 황태성이 중매한 박상희와 조귀〇 부부의 사위였다.
1947년 9월 월북한 황태성은 19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북한의 권력층에 진입한다. 이후 그는 상업성 관리국장에 이어 무역성 부상과 무역상 서리까지 지냈다. 북한 상업성과 무역성의 핵심 자리를 거친 경제통이었다.
1961년 8월 초 남한에 밀사로 가기로 한 황태성은 그후 한달 가까이 평양시 서구에 있는 로동당 연락부 아지트에서 당 기술간부로부터 남파활동에 필요한 기술교육과 교양학습을 받는다. 교육이 끝난 후 그는 8월 말 평양을 출발, 개성에서 호송원의 안내로 임진강을 건너 문산 방면의 야산을 타고 8월 30일 밤 우이동에 도착했다. 이어 산에서 내려와 합승차 편으로 서울 중심부로 들어왔다.
서해 첩보부대 북한 측 비밀접촉...쿠데타 안착 시간 벌기 그러는 사이 서해의 북한 지역 용매도와 불당포에서는 남북 군사정보 당국 간에 비밀접촉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한의 수석대표 강성국 중령과 보좌관 김석순 대위 등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북한 지역에 들어가 회담을 했다. 의제는 남북 간의 경제교류, 문화교류, 인사교류 등이었다.
두어 차례 회담을 했을 때 북한 쪽 실무책임자가 김석순 대위에게 다가와 귀띔했다.
"우리 당 연락부에서 남쪽에 특사를 내려보낼 겁네다. 특사는 남과 북의 최고위층이 믿을 만한 간부급이지요. 내각 부상까지 지낸 이 분이야요." 그는 김석순에게 황태성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김석순이 이 같은 정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에 김종필은 "그때 남북 장교들의 접촉은 첩보부대에서 정보수집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보고는 받았지만 무게있게 추진된 남북회담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서해상의 대북 비밀접촉이 첩보부대 HID가 벌인 대북 공작의 일환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쿠데타 정권이 안착할 때까지 북한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것이 '첩보극'의 목적이었다. 남북관계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순수하지 않게 이용하는 박정희 정권의 행태가 여기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남한 첩보부대의 그 대북접촉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황태성을 밀사로 내려보내게 한 상당한 동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황태성이 서울에 도착한 후 맨 먼저 찾아간 사람은 동양통신사 사장이던 김성곤. 김성곤은 대구 출신 유지들의 중심인물로 황태성과도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IPI 총회 참석차 해외 출장 중이었다.
그러자 황태성은 돈암동 태극당 뒤에 있던 최고회의의장 공관으로 박정희를 직접 찾아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했다. 이어 청파동의 김종필 자택 앞에도 가보았으나 중앙정보부장인 그의 집도 경비가 심해서 포기해야 했다.
조카딸 시켜 편지 전달...가장 유력한 통로
이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기 위한 다음의 접촉 대상은 중앙대 강사로 있는 김민하(후에 중앙대 총장, 교총 회장,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김민하의 선친은 황태성의 고향 김천에서 양조장을 하며 바로 옆집에 살던 친구 김원출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민하는 황태성이 대구로 이사한 뒤 그의 집에서 대구여중 교사이던 누이와 함께 기거하기도 했다.
중앙대학교로 찾아가 만난 김민하에게 황태성은 북에 사는 그의 둘째 형의 소식을 전하고 남북 평화통일 협상이 자신의 임무임을 밝힌다. 황태성이 김민하를 만난 이유는 누이동생의 딸 임미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북에서 김민하의 결혼식 사진을 보았다. 김민하의 결혼 사진은 처음 도쿄에 거주하는
그의 큰형 김재하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북에 사는
그의 둘째 형에게 보내졌다. 사진 속에는 황태성의 조카딸 임미정과 그 남편 권상능이 함께 있었다. 김민하의 신부는 권상능의 누이동생이었다.
황태성은 김민하에게 조카딸 임미정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누이동생인 임미정의 어머니가 바로 자신이 박상희에게 중매해 준 조귀〇의 친구였다. 그 조귀〇이 박정희의 둘째 형수며 김종필의 장모여서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통로로 지목한 것이다.
황태성의 부탁으로 임미정은 남편 권상능과 함께 구미에 사는 어머니의 친구 조귀〇을 찾아간다. 갑자기 황태성의 편지를 전해 받은 조귀〇은 매우 놀란다. 임미정 부부는 조귀〇에게 털어놓았다.
"이런 일을 저희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지금 저의 외삼촌(황태성)이 기다리고 있으니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좌익계로 처형 당한 장남의 딸과 신원 숨기고 만나 그러나 조귀〇은 당황스러웠다. 시동생인 박정희와 사위인 김종필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그 내부에서 터진 반혁명 사건 등 권력투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더구나 과거 좌익운동을 하던 남편이 비운에 타계한 경험을 가진 조귀〇은 신경이 곤두섰다.
잘못하다간 박정희와 김종필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조귀〇은 서울로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임미정 부부는 주소를 남기면서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돌아왔다.
황태성은 김민하의 집에 머무르면서 소중한 '귀향'생활을 했다. 큰아들 황경옥의 외동딸이 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동덕여중 1학년에 다니고 있음을 알게 됐다. 황태성은 조카사위 권상능과 함께 동덕여중에 찾아간다.
그는 손녀에게 시골 친할아버지의 친구라며 신원을 감추고 손을 잡아준다. 영화와도 같은 민족분단의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황태성은 또 친지들과 함께 영화 '상록수'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기 민족운동을 하던 조선의 청년지식인들이 시련에 부닥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1961년 10월 20일, 임미정 부부가 조귀◯을 만나고 온 지 일주일 쯤 된 날이다. 흑석동 김민하의 집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집에 있던 황태성을 연행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1963년 9월 중앙정보부의 황태성 사건 수사 결과 발표, 관련자들의 인터뷰 등 증언, 국회 속기록 등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