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아니, 당신은 여전히 꿈을 꾸나요? 아니, 제가 이런 질문을 해도 되나요?" 이것은 꿈만 먹고 사는 몽상가의 철모르는 질문이 아니다. 어느 중학교 1학년생은 "CEO가 돼서 떼돈을 버는 것"이 꿈이라고 답했다. 꿈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 속에는 한국사회의 '지극히 현실적인' 좌표가 그려져 있다. 거울처럼 우리의 '꿈'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대학입시를 위한 성적 매기기 교육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을 고민할 시간을 빼앗았다. 대학생이 된 그 아이들은 '밥 먹고 사는 것'이 꿈이 되었다. 이제 꿈을 가진 청춘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희귀한(?) 세 청춘이 있다. 그들의 꿈 이야기로 우리의 현실을 비춰봤다.
[청년①] 출판일 꿈꾸던 그, 열악한 여행사를 택하다
염병마괭이(필명·29·이하 마괭)씨는 2008년, 지방에 있는 D대학을 졸업했다. 장학금을 받았지만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2년을 휴학하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학자금 대출 빚이 마괭씨를 계속 따라다녔고, 그 때문에 은행에서 '신용불량자' 소릴 들어야 했다. 철학과 문헌정보학을 복수전공한 그는 출판 쪽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용 불량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이 급해진 마괭씨는 첫 회사로 여행사를 택했다.
여행사는 월급이 적고 업무가 많았다. 수당 없는 연장근무의 연속이었다. 이런 이유로 직원이 자주 바뀐 탓인지, 새로운 직원에게 애초에 정을 주지 않는 회사 분위기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출판사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과한 업무량에 월급은 적었다. 월급 110만 원을 받았다. 학자금 대출금 40만 원, 월세 30만 원을 내고 나면 겨우 생활을 유지할 돈만 남는다. 업무도 그가 애초에 하고자 한 일과 관련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고민이 커진다. 계속 이 회사를 다닐 것이냐, 말 것이냐. 회사를 그만둔다 해도 뾰족한 대안은 없잖아? 마괭씨는 일단 사표를 냈다. 당연히 믿는 구석이나, 여유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가족들에게 회사를 그만 둔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버거워진 그는 본의 아니게 당분간 가족과 연락을 끊어야 했다.
또 청춘의 소통을 막는 그 놈의 '가난'이런 경험들 속에서 마괭씨의 꿈이 구체화됐다. 자신처럼 딜레마에 처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것. 그동안 미디어에서 수도 없이 88만원세대가 처한 상황을 그려냈지만 "제대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는 매체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미디어들은 88만원세대들의 진짜 입장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추리닝, 삼디다스로 상징되는 루저의 이미지로만 '소비' 되는 식이었다. 장기하가 루저들의 대통령으로 각광 받았지만 장기하는 서울대 출신에 키도 크고 멋지다. 진짜 현실이 다뤄진 적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항상 추리닝을 입고 다니지도, 삼디다스를 신고 다니지도 않는다.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한다. 하지만 '루저'다. 이게 현실이다." 마괭씨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인들과 함께 웹진 청춘지 <월간염병>을 꾸렸다. 청춘의 이야기를 청춘들 스스로 재밌게 풀어보고 싶었다. 구성원은 7명.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1명, 나머지는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면서 월세 마련에 바쁜 청춘들이다. 다들 '물심양면'으로 빠듯한 상황에서 '짬'을 내 회의를 하고, 주제를 정하고, 글과 사진을 모아 <월간염병> 사이트에 올린다.
처음에 마괭씨는 <월간염병>으로 수익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성원 모두 알아서 밥벌이를 하면서 자유롭게 글을 써 올리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욕심 없는 열정은, 구성원이 다 같이 모여 회의 한번 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자 점점 막막한 벽에 부딪혔다.
그렇다. 우리네 청춘들은 너무 바쁘다. 회사 다니는 청춘은 야근 때문에 바쁘고, 취업 준비하는 청춘은 공부하며 아르바이트 하느라 바쁘다. 마괭씨도 주중엔 MBC에서 계약직으로 영상분류작업을 하고, 주말엔 도서관 사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쓸 만한 '마음의 여유'가 도저히 생성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MBC 정규직직원은 회식에서 비정규직에게 러브샷을 시키는 등의 '감정 노동'을 강요했다.
"이런 것들(업무 외 잡무, 감정노동)의 존재를 이 사회는 부정한다. 이걸 다 노동으로 인정하면 돈을 더 많이 줘야 한다. 우리 윗세대는 회사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았지만, 그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100만 원 정도 받는다. 만약 내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았으면 주말 알바를 할 필요도 없었고, 주말 알바를 안 했으면 주말에라도 글을 쓸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청년②] '내 길'이라 여겨왔던 공무원, 내 길이 아니었네
유정인(가명·26)씨는 서울에 있는 K대 행정학과에 재학중이며,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느라 휴학을 많이 했다. 정인씨는 어렸을 때부터 지극히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고 공부도 잘했다. 자연스럽게 성적에 맞는 대학과 진로를 당연하게 여겼다. 대한민국 모든 부모님이 바라는 안정적인 공무원을 자신의 꿈으로 생각했다.
3년이라는 시간을 공무원 시험에 투자했지만, 높은 경쟁률에 부합해야 하는 공부 양에 비해, 정인씨는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내 길'이라 여겨왔던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깊은 확신이 없는 채로, 억지로 공부하고 있는 스스로를 느꼈기 때문이다. "3년이라는 내 시간을 투자했다"는 보상심리와 "여기서 그만두면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정인씨는 큰 혼란에 부딪혔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억눌러왔던 자신의 꿈을 다시 생각해 냈다.
정인씨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음료'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커피를 남달리 좋아했다. 좋은 커피를 마시는 것도 즐겼지만, 커피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각종 커피전문 체인점에서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무원 준비를 할 때도 정인씨의 '진짜 꿈'은 "언젠가 내 카페를 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그의 '멘토'는 공무원 생활을 하는 선배가 아니라, 학교 후문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 H의 사장님이었다.
착한 딸은 반드시 '화이트칼라'여야 할까
하지만 커피와 관련된 그의 관심과 열정은 취미이자 아르바이트, 혹은 먼 훗날의 일 정도로 꾹꾹 눌러둬야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거나, 체인점에서 일하면서 매장 매니저로 승진해 관련된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 길목에서 "대기업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까?" 고민 중이다. 부모님의 기대와 주위의 시선, 그리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적은 임금 때문이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4년제 대학'을 나와서 적은 돈을 받고 서비스직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님께 공무원 시험 준비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에도 그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정인씨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지방대, 전문대 출신이 취업에 있어서 차별을 받을 때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대학 나왔다'는 것 또한 한 개인에게 벗어나기 어려운 하나의 굴레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보다, 출신 집단의 적당한 범위에서 "남들의 기대치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리스타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100ℓ짜리 쓰레기봉투 나르고, 우유박스채로 나르고 해야 한다"면서 커피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에 비해 실제로 커피종사자들에게는 육체노동이 기본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적당한 대우가 있다면 고민 하지 않을 것이다.
정규직으로 큰 체인점에 입사하면 주 5~6일 9시간 근무하고, 120만~150만 원 정도를 받는다. 한 달에 4~5회 정도만 쉴 수 있다. 3년 정도 일해서 매장의 매니저가 되면 160만~200만 원 정도를 받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정인씨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깨달았다. 자신의 '적성'은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고 겪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커피, 음료에 대한 책을 읽고 유명한 카페에 찾아가서 다양한 커피의 향과 맛을 분석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즐겁다. 하지만 서비스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저임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아직 고민이다.
"나는 당연히 '화이트칼라(사무직)'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적성은 '블루칼라(육체노동)'였다. 내가 어릴 때 얕잡아 봤던 게 사실 내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블루칼라가 대우 받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서, 청년들이 안 간다, 안 간다, TV에서 말한다. 이걸 우리 탓만으로 돌리는 거 웃긴 일이다."[청년③] 흙만 만지면서 살고 싶지만, 배가 고프다
소예진(가명·25)씨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아이였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은 그림 그리기였는데, 엄마는 미술학원에 보내주지 않으셨다. 고3 때, 어느 대학을 가든지 전공은 "내가 원하는 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꽤 늦은 선택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첫 고집'이었다.
예진씨는 지방에 있는 S대 공예학부에 들어갔다. 2학년이 돼서 전공을 정할 때, 동기 대다수는 금속공예과를 선택했다. 그나마 취업이 잘되는 전공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예진씨도 금속공예를 전공하려 했지만 4학년 선배들의 졸업전시회에서 도자 조형물들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왠지 모르게 '흙'이라는 재료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거냐"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대학원까지 가서 도예를 공부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부모님께 늘 죄송했지만 그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때껏 "살아오면서 이런 적(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흙으로 작업하면서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그 꿈은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던 소녀를 당당한 '고집쟁이'로 만들었다.
"흙이라는 재료가 좋다. 내 마음이 조금만 다급해도 흙은 갈라진다. 흙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그 동안 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게 무한하다. 내 상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필요한 건 작업할 공간과 시간이다. 작년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에서 입선해 지원받은 600만 원으로 마련한 가마도 있지만, 놓을 공간이 없어 아직 찾아오지도 못했다. 예진씨는 현재 작업할 공간이 생길 날을 꿈꾸면서, 복지사단법인에서 지체장애인들이 생산하는 도예품을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규직이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지만, 자주 야근을 하고 종종 토요일에도 회사에 가서 일해야 한다. '시간 외 수당'을 합쳐야만 월급 130만~14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100만 원 월급에서 40시간을 더 일해야만 한다.
작업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예진씨가 작업을 할 수 없는 환경은 그에게 무척이나 갑갑하고 힘겨운 상황이다. 그는 휴식과 데이트를 포기하고 주말에 아는 선배의 작업실에 가서 작업을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급박한 시간 안에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또 그 다음날 회사에서 쉬지 못한 피곤함을 감당해내는 일은 단지 '열정'만으론 버거운 것이었다.
꿈을 가지고 있는 청춘의 별들은 시리게 빛난다
저마다의 꿈을 지탱하기 위해서 최소한 요구할 것이 있느냐고 잠시나마 기분 좋아질 질문을 해봤다. 소예진씨는 "지금처럼 130만 원 월급에 야근과 주말 출근만이라도 없으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유정인씨는 "체인점 매니저가 됐을 때 220만 원 정도의 월급에 30~40대가 돼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이면 자신의 꿈을 지킬 수 있을 거라 말한다. 마괭씨의 대답 또한 소박하지만 아득하다.
"주말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월세를 낼 수 있고, 4대 보험이 되고, 친구들과 맥주 한잔 할 때 부담 없이 더치페이 할 수 있을 정도를 원한다. 우리는 엄청난 연봉을 원하는 게 아니다. 엄청난 삶이 아니라 그저 보통의 삶을 요구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피터지게 노력해도 힘든 걸까."이들 꿈이 너무 큰 것일까, 우리사회의 꿈이 너무 작은 것일까. 정인씨는 말했다. "기업에서 조금만 덜 욕심 부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경쟁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좀 재밌게 '상생'의 경쟁을 할 수 있지 않냐"고. 그리고 정인씨는 청춘과 꿈의 관계를 '별'에 비유했다.
"소위 편안하게 잘 산다고 여겨지지만 꿈이 없는 사람들은 빛이 흐린 회색별 같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반짝반짝거린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런데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시리게 반짝인다. 별이 온도가 높아지면 흰 빛을 띠는 것처럼 말이다. 슬프게 빛난다." 우리는 꿈이 없거나, 꿈을 버텨내기 힘들다. 경제적 팍팍함이, 노동의 고단함이 모두의 꿈을 가난하게 만든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잘 참아 견디라는 말이나, 청춘의 아픔을 위로하는 콘서트보다, 이들의 실질적인 짐을 덜어주길 요구한다. 저녁과 주말은 쉬게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주기를 요구한다. 누군가의 욕심을 조금 줄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꿈을 지키고 서있는 몇몇의 청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