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무등산 산133번지. 광주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무등산 길 한쪽에 '충민사'라는 곳이 있다. '충민사'는 조선시대의 무관 전상의(1575~1627) 장군을 기리는 현대식 사당이다.
1985년 건립된 충민사는 풍광이 무척 좋은 고갯마루에 있다. 주차장을 지나, 죽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부속 건물들이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삼문, 내산문, 정려각, 유품 전시실 등이 있고 가장 안쪽에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서의 틀을 갖췄다. 나름대로 웅장한 규모다.
충민사를 지나 차로 조금만 더 가면 조선의 유명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사당 충장사에 닿을 수 있다. 김덕령 장군은 워낙 이름난 의병장인데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대적으로 건립됐기에 이미 광주의 명소가 됐다. 충장사는 어린 유치원생들부터 현장학습을 나온 초·중·고등학생, 가족단위 또는 단체 참배객들로 연일 만원을 이룬다.
하지만 충민사는 지역민들에게 조차 존재감이 없어, 이곳을 찾는 발길은 뜸했다. 유명한 충장사의 지척에 있어 주목을 받을 만한 데도 말이다. 설혹 전상의 장군의 사당이 충민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이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어? 저기가 전두환 조상이라는 그 전모라는 그 사람 사당이구만! 근데 어느 시대 사람이야?"광주시민에게 외면 받는 충민사
충민사는 도립공원관리공단 내 문화유적이다. 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드넓은 사당 전경은 한눈에 봐도 웅장하고 질서정연하다. 잘 정비돼 있는데다가 유품전시실 같은 곳은 장군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최신식 설비까지 갖춰져 있다. 공무원이 파견 나와 상주하고, 국가 시설에 걸맞은 관리와 보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사당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마당이랑 너른 잔디밭도 항상 잘 가꾸어져 있다.
하지만 충민사는 초라했다. 참배객들 발길을 받지 못하는 사당은 을씨년스러웠다. 관리인만 서성일 뿐, 참배객의 발걸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당 안쪽에 모셔져 있는 장군의 영정은 당당한 기상을 담고 있음에도 무척 쓸쓸해 보였다. 적잖은 시설규모에 따르는 관리비용과 상주하는 공무원들 인건비 등을 감안하면, 지어만 놓고 찾지 않는 공공시설에 대한 세금낭비가 안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곤 했다.
무등산 산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충민사. 하지만 건립된 지 25년 가량이 지났지만, 충민사는 광주시민들에게 외면당한 채 문화유적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충과 의를 주요 덕목 삼고 산다는 호남 사람들이 전씨 성을 지닌 한 장수의 사당을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무등산 산장유원지로 향하는 드라이브 족이나, '무등산 옛길'을 종주하는 등산객들도 깔끔하게 잘 정비돼 있는 충민사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참배는 그렇다 치고, 주차장에 잠시 쉬어가는 차량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차량 한 대 볼 수 없다. 그냥 모르고 지나친다기보다는 애써 외면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지금은 많이 나아져, 시민들의 발길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어떤 전씨와 또 다른 전씨충민사에 전향돼 있는 전상의 장군은 어떤 인물일까.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에 활약한 훌륭한 무관이었다. 선조 36년, 29세에 무과급제한 후 훈련원 주부, 변방의 만호, 첨사 등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에 회답사로 파견돼 정유재란 당시 끌려간 150여 명의 동포들을 무사히 귀국시킨 업적을 남겼다. 이듬해 그는 내금위 어모장군으로 임명돼 왕을 밀착 경호하는 중요한 직책까지 맡게 됐다. 그러던 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는 반정의 중심 세력인 서인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천군수로 좌천됐다.
그후 광해군이 가까스로 유지해오던 중립외교의 틀은 깨지고, 인조의 서인세력들은 친명배금으로 일관했다. 결국 후금은 대대적인 병력으로 조선을 공격했다. 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상의 장군은 안주성에서 청군을 맞아 청천강에 배수진을 쳤다. 전세는 턱없이 불리했다. 고작 몇 백의 군사로 수만 명의 청나라 군사를 상대해야 했다.
동료 장수들마저 일찌감치 패배를 인정하고 죽음을 택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직 전상의 장군만이 끝까지 결사항전했다. 당시 안주성 백상루 전투는 매우 처절했다고 한다. 끝내 성이 함락되자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록 적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5일 동안의 항전한 덕분에 조정은 군사를 정비할 말미를 얻게 됐다. 전상의 장군은 김덕령 장군이나 고경명 장군, 최경회 장군들처럼 널리 알려진 장수는 아니지만 훌륭한 장수였다.
학살범이 다시 돌아와 조상을 기린다니...나라를 위해 순국한 조상의 넋을 기리고, 참배하는 일은 후세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시민들은 충민사에 집단적 거부 반응을 보여 왔던 것일까. 1982년 사당이 착공되던 시점부터 충민사와 시민들과의 불화는 시작됐다. 그 불화의 중심에는 12·12 군사반란의 주모자이자 5·18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이 있었다.
사당 건립과 관련해 알려진 내용은 이렇다. 당시에는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제 선조를 들춰내 격에 맞지 않는 호화로운 사당을 짓고, 아까운 국가 예산을 퍼붓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불과 얼마 전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그 도시에, 학살의 주범이 자신의 조상 사당을 짓겠다고 하니…. 당연히 시민들 시선이 고왔을 리는 없다.
사당 준공식에 전두환의 최측근이자 학살 공범인 장세동이 내려와 축사를 하는가 하면, 사당 정문 앞에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감히 어디라고, 전경환이 공덕비를!'이라며 분노한 시민들은 전경환 공덕비를 부수는 등 강하게 항의했다.
그럼 전경환 공덕비는 왜 그곳에 생겼을까. 그 당시 전경환은 전상의 장군의 유품을 소지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충민사에는 그 유품 중 일부가 전시돼있는데, 전경환 공덕비는 전상의 장군의 유품을 발굴한 전경환의 공덕을 칭송하고자 세워졌던 것. 충민사는 훌륭한 충신을 모신 사당이 아닌, '전두환이 제 조상을 떠받들기 위해 요망한 짓거리로 꾸며 놓은 망측한 곳'으로 시민들 사이에 각인돼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여과 없이 믿었다.
1985년, 우여곡절 끝에 충민사가 완공됐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전상의 장군이라는 인물은 사실 생소했다. 또한 전씨 성을 가진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 유독 탄력을 받기 시작한 전상의 장군의 현창 사업은 시민들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장세동의 축사와 전경환 공덕비는 시민들의 잔잔한 의구심에 분노의 불을 당기는 꼴이 됐다.
그로부터 25년 여의 세월이 흐르도록 국비가 투입되고, 공무원들의 지속적인 관리에도 충민사와 전상의 장군은 시민들의 끊임없는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바로 옆 충장사 김덕령 장군의 넋은 사후에 충분히 위로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상의 장군은 전두환 조상이 아니란다지난 12월 5일 나는 충민사의 유적정화사업을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이아무개씨와 어렵게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충민사 건립 관련, 그가 말하는 당시 상황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전경환이 유품을 기증한 것 말고는 사당 건립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세동 축사도 사실무근이고, 전경환 공덕비 문제도 많이 부풀려졌다고 말했다. 사당 건립과정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공덕비에 새기는 것은 문화재 사업 특성상 의례적인 절차였다고 했다. 그 수많은 사람 명단 가운데 유품을 기증한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시민들 항의가 잇따르자 유적사업회 측에서 자체적으로 그 비를 치웠다고 했다.
또 하나, '전두환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무명의 조상을 부각하기 위해 호화로운 사당 건립을 추진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전상의 장군의 본관은 '천안'이고, 전두환 본관은 '완산'이다. '모진 놈 옆에 있다 날벼락 맞는다'고 했던가. 전상의 장군도 전두환이라 '불리는' 후손 하나 때문에 긴 세월 굴욕을 겼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전두환이 전상의 장군을 제 조상인줄 알고 충민사 건립에 그토록 열을 올렸다면, 전두환 일가는 본관 계보도 제대로 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12·12 군사반란을 모의하고, 동포를 향해 살인을 자행하던 그때부터 전두환은 누구의 후손도, 조상도, 동포도 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가 전두환 정권 시절이 아닌, 다른 때에 건립됐다면 이런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전두환의 학살에서 이어진 비극이라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