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만 해봐라, 통일대교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거야."13개월간 최전방의 철책을 지키면서 힘들 때마다 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단순히 버릇이 아니라 일종의 다짐이었다. 다시는 이곳을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고 공휴일도 없고 가족도 볼 수 없고 생필품도 수면시간도 부족한 이곳이 나는 절대로 그립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전역 후 친구가 된 소대원들과 전화 통화를 하거나 술자리를 할 때도 이 다짐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 솔직히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 궁금해!""이자식이, 니가 지금 배가 불러서 그래. 그리워할 곳이 따로 있지." "그런가, 그래도 우리가 죽어라 고생한 곳인데. 지금은 어떤가 생각 안 해봤어?" "……"그래. 솔직히 생각해봤다. 내 후임 말이 맞다. 난 언제부터인가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되고 힘들었던 그때, 내가 지켰던 철책 밖 풍경이 그리웠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민간인 신분인 지금은 절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됐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왠지 더 몸이 달았다.
결국 난 그곳을 가 보기로 했다. 오전 8시 반에 일산 동구인 집에서 출발해 백마역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9시 15분께 문산역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임진강역행 열차표를 새로 끊고 10시에 출발하는 꼬마열차에 몸을 실었다. 도라산역으로 가려면 임진강역에서 별도의 절차를 거친 뒤 새로 차표를 구입해야 했다.
민통선에 들어가는 방법, 연계관광 말고는 없다
중간역인 운천역을 지나 임진각 바로 앞 임진강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임무교대 후에 군생활을 했던 부대 풍경과 진지공사기간에 끙끙대며 삽질로 만들어낸 그때의 진지들이 곳곳에 눈에 보였다. 이제는 옛일이다. 나는 과거가 현재를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아마도 나같이 이전 군부대를 찾는 이가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오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과는 별개로 말이다.
오전 10시 10분에 임진강역에 내렸다. 열차는 임진강역에서 30분 대기하다 오전 10시 40분에 출발한다. 그 시간 동안 헌병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도라산행 차표를 따로 구입한 후 통일촌-도라산 전망대-제3땅굴을 코스로 하는 연계관광 티켓을 사야 했다. 가격은 1만1700원. 국방부와 재향군인회, 파주시가 연계해서 진행하고 있는 이 안보관광 사업은 민간인과 민통선을 이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버스로 민통선을 통과하는 연계관광 티켓 구입 말고는 개인차원에서 별도로 민통선을 통과해 각각의 장소로 갈 방법은 사실상 없다. 기차는 예상외로 너무 한산했다. 나와 가족단위 관광객 4명을 포함에 다섯명 만이 경의선 연계관광을 신청했다.
10시 40분. 기차가 출발했다. 임진각의 모습과 임진강을 지키는 강안 GOP(경계초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을 건너는 기차를 기준으로 동편에는 2000년에 세워진 통일대교가 있다. 지금 임진강을 건너고 있는 이 다리는 경의선 철교로 일명 자유의 다리로 불린다. 통일대교가 생겨나기 전에는 이곳이 유일한 남, 북간의 통로였다.
원래 전쟁 전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었다. 경의선 상행선과 하행선이었는데 전쟁 직후 폭격으로 두 다리가 모두 폭파되었다가 양측의 포로교환을 위해 하행선만이 복구되었다. 이후 지금과 같이 철도가 오갈 수 있게 복원이 완료된 것은 2002년 경의선 철도복구 시범사업이 완료된 이후부터다.
좌석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봤다. 임진강은 겨울이 되면 강의 수위가 급격히 줄어든다. 곳곳에 낀 얼음과 강줄기 곳곳에 솟아있는 바위들이 마치 암초 같다. 이곳의 물결은 언제나 잔잔하지만 또한 언제나 시리고 매섭다. 한이 서린 듯 찌르는 것 같은 냉기가 담겨있다. 여름에도 습한 냉기가 옷 속을 파고들어 8월 밤중에도 오래 서있으면 몸이 덜덜 떨려온다.
고개를 드니 저 너머로 통일대교가 보였다. 2000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한 날 완공된 다리다. 지금은 거의 모든 남북교류가 저 다리를 통해 이뤄진다. 판문점 방면인 구 1번 국도와 개성공단 방면의 신 1번 국도 모두 이 다리를 통과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13개월 동안의 철책 근무를 마치고 임무교대를 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2010년 3월이었다. 마지막으로 통일대교를 건너 내려올 때 바라본 임진강의 모습이 현재와 오버랩됐다.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난 기뻐서 웃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2년 동안 7천 여명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곳
10시 45분께 도라산역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연계관광 버스를 타고 통일촌 매점에 잠시 들렀다. 그 후 곧바로 도라산 전망대로 향했다. 이미 우리 외에도 여섯대의 버스가 그곳에 주차돼 있었다. 백여 명 정도 될 법한 관광객이 저마다 사진을 찍고 망원경으로 북한을 구경했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이곳에서 약 25분간을 머물다 갈 거라고 나에게 말해줬다.
도라산은 개성외곽과 문산 사이에 나있는 넓은 벌판에 홀로 우뚝 솟은 해발 156미터의 산이다. 이곳에 오르면 개성시의 외곽과 문산 읍내, 자유로가 육안으로 다 보인다. 덕분에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 됐다.
북은 문산을 포함해 임진강 하구를 한번에 확보하기 위해서, 남은 개성을 압박하고 서울 북부와 군사분계선의 거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정전협정 협상 기간인 만 2년 동안 모두 7천여 명의 국군과 미 해병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고지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전망대 앞으로 달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강하게 때렸다. 북한의 진봉산 방향에서 논밭을 훑고 불어오는 바람이다. 바람에 냄새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곳에서 부는 바람은 남쪽에서 부는 바람과는 무언가 다르다. 이유는 모르지만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훨씬 차갑고 시리다.
나는 이곳에서 근무를 서며 하루하루 하늘의 색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날씨가 단순히 맑음과 흐림, 비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하늘의 색이 파란 정도에 따라 날이 춥고 따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 그것이 맞아 들어가는 때가 많았다.
전망대 너머 북녘 지평선에 깔린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마치 물에 우유를 푼 듯 희미하고 아득하게 보였다. 정수리 위쪽의 하늘은 파란데 지평선은 흐리다. 이런 날은 대개 바람이 사납게 부는 날이다. 군 생활을 할 때에도 찬바람이 저 지평선에서 오는 것이라 나는 확신했었다. 시야가 맑고 하늘이 아주 파란색을 띠면 그 날은 덜 추운 날이었다. 대체적으로 그런 날은 바람이 잔잔하고 초소에 햇볕이 잘 들었다.
도라산은 분단 60년 동안 남북이 보여준 대결과 화합정책을 가장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를 기준으로 좌편으로는 복원된 경의선 철도와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신 1번 국도가 보인다. 가끔 운이 좋으면 개성공단으로 이동하는 남측 화물차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우편으로는 대결의 상징인 기정동과 대성동 철탑을 볼 수 있다. 철탑은 비무장지대 내에 각각 1km간격을 두고 남측 마을인 대성동과 북측 마을인 기정동에 세워졌다. 남북은 냉전이 극에 달한 6,70년대 태극기와 인공기가 달린 철탑의 높이를 경쟁적으로 높였다.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더 높은 철탑을 세웠다.
이 외에도 시야가 확보된 날에는 개성시가지 외곽에 김일성 동상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맞은 편 북측 GP(방어초소)에서 움직이는 인민군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매일 이곳에 오면 가끔 초소 앞에서 볼일을 보거나 자기들끼리 구타를 하는 모습을 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진정 이곳이 좋다면 해볼 법한 시도다.
임진강을 건너 내려왔다, 그때처럼 웃는 얼굴로
사람들이 각자 망원경에 눈을 대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나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동안 이곳이 어딘지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반 가이드 역할을 자청하다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후 제3땅굴을 둘러보고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로 돌아와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하는 문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대기했다.
남은 한 시간을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여유있게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생겼다. 마치 공항과 같았다. 건물 내부에는 공항과 같이 입, 출경 심사대와 동, 식물 검역절차 엑스레이 화물 검사와 금속탐지기가 배치되어 있다. 출경 수속을 다 마친 이들만이 경의선 열차에 탑승하도록 되어있었다. 군시절, 나는 언제나 입경, 출경이라는 단어가 익숙치 않았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또한 서로가 전혀 다른 국가이기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억지스러움이었다.
완공한 지 이제 만 10년이 된 이 최신식 건물은 하루종일 한산했다.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내가 너무 미안할 정도였다. 2008년도 이전에만 해도 그나마 개성공단에 투입될 원자재를 실은 열차가 남북을 오갔다.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박왕자씨가 피격되고 북한이 개성공단 육로를 봉쇄하면서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오가는 화물차와 개성공단 인원들도 이제는 전부 도로로 개성을 찾는다. 안보관광을 오는 몇 백명이 관광객만이 관광코스의 일부로 잠시 이곳을 찾을 뿐이다. 할 일을 잃은 헌병들은 지루한지 연신 하품을 한다. 사람도 없는 건물에 히터만이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국가적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내부에 매점을 관리하고 있던 아주머니도 심심한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남은 시간을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보내기로 했다.
"부대를 여기 나왔다고? 아이고, 여기 육로봉쇄 했을 때면 고생 많이 했겠네. 나도 그때 여기 있었거든. 여기 그래도 사람들이 좀 있던 때가 있었지. 지금은 정말 오는 사람이 없어. 남북간에 왕래가 빨리 활성화돼야지 인근 주민들도 활기가 생기고 좋지. 얼마나 낭비야 이게, 이렇게 비싼 건물 지어놓고 써먹지를 않으니.."대화를 하던 중 헌병 한명이 직접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기차 탑승 시간이라고 했다. 정확히 시간이 15분 남았지만 그냥 군소리 없이 수속을 밟고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하는 문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군 생활을 하던 장소를 직접 찾아간 후의 느낌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얼마 전 졸업한 학교를 다시 구경하러 간 기분 같았다. 전역하면 통일대교 방향으로 오줌도 싸지 않겠다며 이를 갈던 소대원들은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난 김에 친하게 지내던 후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보나마나 주말이라고 날 새고 퍼 자고 있을 터였다. 기차 안 히터바람으로 노곤노곤해진 몸을 의자에 기대며 내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을 뒤집어쓰고 산다. 삶의 한 과정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그 허물을 벗고 새 몸을 만든다. 나는 이미 벗어버린 허물을 뒤집어쓰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나. 맞았다. 나는 그 허물이 이제 다시는 내게 맞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게 위해 이곳에 온 것일 터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추억은 벗어버린 허물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이 추억이 나 혼자만이 만들어낸 추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별 탈 없이 성장해 이 허물을 무사히 벗고 나올 수 있게 한 데에는 착한 소대원들의 덕이 크다. 서로 의지하며 2년간 지내온 소대원들, 그 중에서 전역 날까지 웃으며 날 배웅해준 동생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전망대 사진과 경의선의 모습을 가져가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임진강을 건너 내려왔다. 그때처럼 웃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