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끄럽고요." 멋쩍음, 실수를 표현할 때 쓰는 '부끄럽다'는 말. 사실 그리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진우 기자가 '나꼼수'에서 이 말을 연발하며 한 순간에 '핫'한 관용어가 됐죠. 그래서 정말 '부끄러웠던 기억'들에 대한 얘기를 모아봤습니다. 3차례에 걸쳐 나를 부끄럽게 만든 것들에 대한 기사를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엄마가 차려준 아침상. 이날 이 밥을 먹으며 엄마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상. 이날 이 밥을 먹으며 엄마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박상규

주말, 이불 뒤집어 쓰고 늦잠을 자는데 엄마가 깨운다. 대단한 이유도 아니다. 같이 아침 먹자고 한다. "생태찌개 끓였으니 어여 일어나라"고 살짝 나를 유혹했다. 

세상에나, 아직 오전 9시도 안 됐다. 식탁에는 생태찌개와 생굴(주말 아침부터 생굴을 먹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무나물, 양념간장, 고추볶음, 무국, 김치가 단정하게 차려져 있다. 엄마와 나는 후루룩 짭짭 아침을 먹는다. 몇 술이나 떴을까. 엄마가 식탁에 있던 우편물을 내게 보여준다. 발신인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나라에서 엄마 아버지 찾아 줄란가부다." 엄마는 하얀 명태의 살을 젓가락 푹 찌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명태의 연한 속살을 씹으며 심드렁하게 우편물의 내용을 확인했다. 총 세 장의 문서가 들어 있다. 첫 장 맨 위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 유가족님께'
'6·25 전사자 유가족 DNA 시료채취 안내'

이번엔 생굴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에이, 엄마 잘못 온 거네. 엄마 이름은 '유시자'지, '유가족'이 아니잖아." 엄마는 한 대 칠 듯한 기세로 날 쳐다봤다.

"야, 그 유가족이 사람 이름이냐? 아이고, 무식한 놈!"

우편물은 '유시자' 내 엄마에게 온 게 맞다. 엄마는 6·25 전사자 유가족이다. 엄마는 전쟁고아다. 엄마는 1947년 음력 10월 22일생이다. 바로 그날, 엄마를 낳다가, 엄마의 엄마는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엄마의 생일은, 당신 엄마의 제삿날과 겹친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엄마는 '꼴초'가 됐다

그리고 엄마의 아버지는 네 살 된 딸을 두고 1950년 전쟁터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기에 네 살은 너무 어리다. 그리하여 엄마는 당신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세월은 종종 존재를 이상한 곳에 부려 놓기도 한다. 다가올 시간은 온전히 4살 엄마의 몫이었다. 전쟁고아가 유복하게 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여자라면 험한 삶의 여정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삶을 단어 몇 개로 함축해 표현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산이 강을 넘지 못하듯, 언어는 삶을 포괄할 수 없다. 그럼에도 거칠게 단어 몇 개로 엄마의 지난 시간을 정리하면 이렇다.

전쟁고아, 가난, 중학교 중퇴, 결혼, 이혼, 몇 번의 사랑과 이별, 목욕탕 때밀이부터 식당 노동자까지 밑바닥 인생 전전…

짧은 시간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긴 세월 홀로 지냈다. 그 삶의 어떤 변곡점에서 엄마는 담배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투쟁하며 사느라 입에서 욕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암 수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첫 일성으로 "담배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꼴초'가 됐다. 종종 막내아들인 내가 놀랄 정도로 욕도 잘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엄마 같은 사람이 담배 안 피우면 누가 피우겠나. 세상은 험하고, 일상은 그보다 더 험악한데 어떻게 욕을 안 하고 살 수 있나. 담배와 욕설은, 엄마에게 피곤한 삶을 견디게 해주는 저렴한 진통제였을 것이다.

엄마는 생태찌개 국물을 후루룩 넘기며 "이번에 어떻게든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뭐, 그런 거 있잖나.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이나 과거의 상처 따위를 풀어낼 때, 듣는 상대방이 오히려 당황하게 되는 상황. 나도 찌개 국물을 후루룩 넘기며 엄마에게 몇 가지를 물어봤다.

"아버지 얼굴 기억나?"
"기억 안 나지. 네 살이었는데, 어떻게 기억하냐."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보고 싶고 뭐 그런 감정이 있나?"
"… 몰라, 인마. 빨리 밥이나 먹어."

"꼭 찾고 싶어?"
"몰라! 찾아 준다니까, 그런가부다 하는 거지."

"근데, 엄마의 엄마 묘 어디 있어? 나도 여태 그걸 안 챙겼네."
"피난 갔다 왔는데… 어디에 묻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기억도 안 나지."

25세 청년은 마지막 순간 어린 딸을 떠올렸을까?

 엄마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편물에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전화를 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엄마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편물에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전화를 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박상규

엄마는 괜히 '쿨'한 척이다. 마음은 이미 '핫'하게 달아오른 게 분명하다. 그 '핫'의 정체는 바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지만 유골이라도 꼭 찾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이미 국방부, 육군본부 등 여기저기에 전화를 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우편물 봉투에 남아 있다. 그런데도 괜히 나한테 쿨한 척이다.

아침을 먹고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코밑까지 땡겼다. 따뜻했다. 그리고 아늑했다. 엄마는 마당으로 나갔다. 분명 담배를 피울 거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이야길 했으니, 초겨울 서리보다 더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싸해진 가슴을 다독일 것이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오래도록 누워 있었다. 실타래 풀듯이 천천히 생각해봤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할머니가 돼서 찾는 그 마음은 도대체 뭘까. 엄마는 올해 65세다. 당신을 할머니라 부르는 손주가 네 명이다.

그리고 네 살 딸을 두고 전쟁터로 향해야만 했던 그 남자, 나의 외할아버지를 생각해봤다. 1950년 그때 그는 25살이었다. 세상에나, 지금의 나랑 띠동갑이다. 그 어린(?) 청년, 전쟁터로 가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당신의 딸이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포탄 파편 튀는 전선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끝내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에 고향에 두고 온 네 살 딸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처럼 전쟁터에서 침 마구 튀기며 "내 핑계 대지마!"를 외칠 줄 아는 남자였을까, 아니면 장동건처럼 적진을 마구 휘저으며 무공훈장 한 다섯 개쯤 왼쪽 가슴에 주렁주렁 단 용맹한 '국군아저씨'였을까.

아니다. 외할아버지의 피를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지금의 내 생김새를 봤을 때, 그는 절대 원빈, 장동건과는 닮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팩트일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감으로 때려 맞출 수 있는 팩트가 무수히 많다.

4세 꼬마가 65세 할머니로... 그동안 '조국'은 뭘 했나

 엄마의 DNA 정보가 담긴 우편물. 과연 이 DNA는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연결해줄까?
엄마의 DNA 정보가 담긴 우편물. 과연 이 DNA는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와 엄마를 연결해줄까? ⓒ 박상규

며칠 뒤 엄마는 보건소에서 DNA 시료를 채취했다. 엄마의 DNA 정보는 밀봉됐다. 이번엔 발신인이 엄마고, 수취인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다. 이걸 보내는 건 내 몫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조국을 믿기 시작했다. 내게 "착불로 보내면 되고, 그러면 국가에서 다 비용 지불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일종의 간절함 때문이다. 사람은 두 가지 순간에 극적으로 변한다. 코너에 몰렸거나, 뭔가를 간절히 원하거나.

난 엄마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착불로 보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냥 우체국에서 내 돈 내고 빠른 등기로 보냈다. 고작 2000원 정도 나왔다.

엄마의 DNA 시료를 보낸 날, 서울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우체국에서 나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종종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을 한다. "상규야, 착불로 보냈지?" 그렇게 했다고 대충 긍정했다.

이젠, 기다리는 게 일이다. 설령, 기다림의 끝자락에 허무함이 웅크리고 있다해도 어쩔 수 없다. 엇갈린 인연 또한 운명이니까. 엄마의 기대감과 기다림 이면에는 닿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안타깝게도, 동전의 양면처럼 둘은 같이 가는 거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다시 아침을 먹으며 엄마는 "DNA 검사하고 결과 나오는 게 오래 걸리나 부지? 어째 국방부에서 아무 말이 없네. 찾으면 바로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라고 말했다. '쿨한 척'은 간 데 없고, 이번엔 간절함 같은 게 느껴졌다. 이번엔 내가 엄마 눈을 보지 않고, 애써 무심하게 말했다.

"큰 기대하지 마. 엄마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겠어? 못 찾을 수도 있어. 그리고 사방이 전쟁터였을 텐데, 어디에 어떻게 묻힌지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거 시간 오래 걸릴 거야. 괜히 기대했다가 상심하지 마."

말이 심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얼마 뒤 엄마는 수저를 내려 놓으며 "60년을 기다렸는데, 그거 못 기다리겠냐?"고 말했다. 그리곤 또 담배를 챙겨 마당으로 나갔다.

만약… 엄마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생존해 환하게 웃으며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엄마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4살 딸을 두고 전쟁터로 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그 25살 청년, 도대체 어느 차가운 땅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20대 중반에서 삶이 멈춰버린 그 청년의 유골이 돌아오는 모습을 그려본다. 65세가 된 딸은 '청년'의 무척 늦은 귀향을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다.

국방부가 엄마에게 보내온 우편물에는 자랑하듯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고 크게 적혀 있다. 입만 열면 '조국' '애국' '안보' 등의 담론을 들이대는 사람들, 4살 꼬마가 65세 할머니가 될 때까지, 뭐 하다가 이제와 저런 '자랑질'일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리고…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넌? 네 엄마의 부모님이 어디에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지금까지 뭐 하면서 살았니?"


#유해발굴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