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중력법칙인 만유인력의 법칙이 'Universal Law of Gravitation'을 옮긴 말이라는 것을 내가 처음 안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그전까지는 만유인력의 '만유(萬有)'가 무슨 뜻인지 별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그 뜻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만유란 한자말 그대로 '어디에나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대학교에서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뜻을 적극적으로 살려 '보편인력의 법칙'이라고 했으면 좀 더 이해가 쉽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뉴턴의 중력법칙은 누구나 다 알 듯이 두 물체 사이에는 각각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굳이 '만유(Universal)'라는 말이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뉴턴 이전의 자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행성이나 별이 운동하는 천상계와 인간이 사는 지상계에는 서로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 천상계는 완벽한 조화와 질서가 구현되는 세계로서 행성은 완전한 원운동을 스스로 하고 있다. 반면 지상계는 부조화와 무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로서 운동이 일어나려면 그 원인이 되는 기동자가 물체를 끝없이 밀어주어야만 한다.
뉴턴은 사과 같은 물체를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땅에 떨어지지만 점점 더 세게 던지면 마침내 사과가 달처럼 지구 주변을 돌게 될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렇게 되면 지상계의 사과가 갑자기 천상계의 행성이 되어 버린다. 뉴턴은 이런 추론으로부터 천상계와 지상계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상을 아우르는 하나의 보편적인 운동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정리한 것이 바로 'Universal Law'이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그것이 천상의 물체이든 지상의 물체이든 그 종류에 상관없이 언제나 보편적으로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다.
근대과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뉴턴 이래의 과학자들이 자연의 '보편법칙'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현상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뉴턴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의 모든 과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긴다.
"이명박 후보를 낙선시킬 의도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 이런 까닭에 내 주변의 과학자들은 현실 생활 속의 법률(Law)도 자연의 법칙(Law)마냥 보편적이고 불편부당하고 또 엄격하게 적용될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이공계 출신이 융통성이 없고 사회성이 모자란다는 핀잔을 듣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때문이다. 이공계인들은 대체로 법칙이나 원칙이 정해지면 그것이 곧이곧대로 꼭 지켜져야만 한다고 고집부리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연현상과는 대단히 다르기 때문에 그 모든 법률이 자연법칙마냥 기계적으로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면 법률이 최대한 보편적이고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흘려들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8조법을 만들었고 왕조차도 법전에 의하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통치할 수 없었던 왕조를 500년도 넘게 이어오지 않았던가.
안타깝게도 이런 바람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법이 보편적이고 공정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그렇고, "법은 만인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어느 정치인의 일갈도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재벌 총수들은 죄를 짓고도 실형을 살지 않으며 심한 경우 유죄판결을 받지도 않는다. 법질서 수호의 선봉에 서야 할 검찰이 오히려 앞장서서 스폰서나 뒷돈을 받고도 처벌받지 않는다. 힘 있는 정치인들은 설령 감옥에 가더라도 머지않아 사면된다.
최근 <나는 꼼수다>로 유명한 정봉주 전 국회의원이 BBK 사건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어 법집행의 보편성과 공정성이 다시 한번 전 사회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정봉주 전 의원은 지난 대선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른바 BBK 주가조작사건과 관련해 이명박 후보를 낙선시킬 의도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를 받고 1, 2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대법원 판결은 지금까지 계속 미루어져 오다가 최근 12월 22일로 선고일이 지정되었다.
검찰이 정 전 의원을 기소한 내용은 네 가지로, ① 정 전 의원이 김경준의 변호사였던 박수종의 갑작스런 사임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이명박 후보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해 기사로 나간 것이 허위사실유포이고 ② 현재 대통령실 총무기획관인 김백준이 BBK 부회장이라고 주장한 것이 허위사실유포이고 ③ MB와 김경준이 2001년 4월 18일 이후에도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허위사실유포이며 ④ BBK의 실소유관계를 보여주는 김경준의 또 다른 메모가 있다는 주장이 허위사실유포라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며 드는 '세 가지 의문'
각 항에 대해 정 전 의원은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증거가 있다고 하는 반면 검찰은 그 증거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소하여 1, 2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상황이다. 검찰의 기소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그 이전에 나는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면서 세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BBK 사건의 본질은 실소유주가 누구인가, 과연 MB가 BBK의 실소유주이고 주가조작에 연루되었는가 하는 점인데, 네 가지 항목 모두 직접적으로는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검찰이 정봉주 의원을 기소한 내용은 적어도 선거법의 취지나 BBK 사건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사실관계 확인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이는 네 가지 항목 중에서 MB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항은 ③항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①항의 경우는 박수종 변호사 사임에 관한 허위사실 혐의여서 특정후보를 낙선시킬 목적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멀어 보인다. ③항의 경우도 MB와 김경준이 몇 월 며칠 이후 결별했는가 아닌가의 다툼을 다루고 있지 직접적으로 범죄사실에 연루되었는지와는 그 자체로 무관하다(4월 18일이 중요한 이유는 BBK 주가조작이 그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후보자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하는데 기소된 내용 자체는 아무리 봐도 후보자와의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관련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와 연관해서 둘째로, 이런 사안들로 징역 1년을 선고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치른 숱한 선거에서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댄 정치인에 대해서는 왜 이보다 더한 형량이 선고되지 않았는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법 집행의 보편성과 형평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도곡동 땅과 BBK의 실소유주가 MB이고 그가 주가조작에 연루되었다고 최초로, 그것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한나라당 내부 경선 때 박근혜 후보 측이었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BBK 사건을 알게 된 원인제공자가 박근혜 후보캠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캠프에서 BBK 의혹을 직접 제기했던 그 누구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정도의 의혹 제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합리적인 의심의 범주에 들거나 후보검증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한나라당에서 제기했던 이른바 '김경준 기획입국설'이 조작된 편지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고 그 조작사건에 MB의 동서가 깊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허위사실인 '기획입국설'을 유포한 한나라당에 그 책임을 묻는 사정당국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례들에 비하면 정봉주 전 의원이 이상의 내용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대단히 가혹한 처사라고 할 만하다.
셋째, 검찰의 기소내용이 사실이라면 BBK 주가조작 사건에서 허위사실유포와 관련해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은 MB 자신이다. 이미 보도된 바에 따르면 MB는 '허위로' BBK 명함을 파서 돌렸고 '허위로' BBK가 자신의 회사라고 숱한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대학생들에게 소개한 셈이다. 아마도 BBK에 투자한 사람들 중에는 이름도 생소한 김경준보다 한국의 유명 정치인인 이명박을 보고 돈을 맡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MB의 30년 지기라는 이장춘 전 대사조차도 MB에게서 직접 BBK 명함을 받고 실제 MB가 BBK 회장이라고 생각했을 정도가 아닌가. 자기가 설립하지도 소유하지도 않은 남의 회사를 자기 회사라고 속여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데 대해서는 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일까? 박근혜의 말마따나 BBK 사건은 "5500명의 투자자에게 천 억대의 피해를 입혔고 피해 본 사람이 자살까지 했던 사건"이다. 만약 정봉주가 유죄라면, MB는 '허위로' 그 최초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더 큰 법적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윗분들에게만 보이는 '법의 눈물'... 법치의 위엄 지켜지길
진실은 한두 가지 증거가 없어진다고 해서 그 실체가 없어지지 않는다. 진실한 사건이 현실에 남긴 증거와 흔적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거짓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을 더욱 더 무리하게 왜곡해야만 하고 그 때문에 결국에는 만천하에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일 의혹이 터지고 매일 그게 아니라고 변명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BBK 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돌아보면서 과연 MB가 BBK의 실소유주라는 주장이 전자와 후자 중 어디에 해당할 것인가, 혹은 MB가 BBK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은 또 전자와 후자 중 어디에 해당할 것인가 다시 한번 따져보게 된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힘 있는 사람들은 법이 없어도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많다. 돈 많고 권세 높은 어르신들은 하다못해 사법체계 자체를 뒤틀어서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은 법과 공권력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언제나 힘 있는 사람들의 핍박의 대상이며 가장 엄격한 법집행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국민들의 바람은 법집행을 좀 덜 엄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기보다, 없는 사람에게 엄격하게 적용되는 딱 그만큼만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엄하게 적용해달라는, 혹은 '윗분'들에게 '법의 눈물'을 보이는 딱 그만큼만 약자에게도 법의 관용을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법전을 만들어서 거기에 기초해 사회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법치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Law'의 보편성은 자연법칙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법치에서도 꼭 지켜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Law'가 'Law'라는 그 이름에 걸맞은 지위와 위엄을 가질 수 있다.
혹시 대한민국의 법은 천상계와 지상계에 완전히 다르게 적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봉주 전 의원의 대법원 판결을 눈앞에 둔 오늘, 나는 나의 이런 의혹이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종필 기자의 트위터 계정은 @ststnigh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