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아비뇽 공연 관람이 시작되었습니다. 참, 아비뇽 공연이라고 해서 작품들이 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프 공연은 어떤 미학적 기준이나 제한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 양태가 천차만별이지요. 즉, 시간과 돈이 아까운 공연들도 분명히 있습니다(많습니다). 작고 열악한 공연장과 적당한 공연시간을 맞추기 위해 다수의 연극들은 모노드라마나 2,3인극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무용공연들도 힙합댄스라는 유행적 경향을 띠거나, 플라멩고, 탱고 등의 대중적 성격을 보이는 작품도 있구요. 그래서 연극 애호관객들은 인-공연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인-공연의 티켓을 구하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축제 본부의 티켓 게시판에 가보면 티켓을 구한다는 메모와 함께 판다는 메모도 심심치 않게 올라옵니다. 인터넷 예매에 실패했더라도, 축제 현장에서 이런 식으로 티켓을 구한다면, 인-공연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오프 공연에서 좋은 작품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축제기간 아비뇽을 방문했던 주불 한국문화원의 최준호 원장(전)의 설명이 매우 유용한 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공연 중에서 '작품'을 고르기보다 먼저 '극장'을 고르라는 것. 아비뇽의 다수 공연장은 상업적인 연극을 주로 올립니다. 그 가운데 예술적이고 완성도 있는 작품만을 취하는 공연장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할 극장이 그 대표적인 공간이고, 제가 발견한 폼미어 극장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었습니다.
이 극장에서 제가 선택한 공연은 <4.48 사이코시스>입니다.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다가 자살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감한 작가 사라케인의 유작이지요. 새벽 4시 48분,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 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이 드는 작가의 길고 긴 사연이 독백의 형태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공연은 모노드라마로 진행됩니다. 무대는 시종일관 '어둠'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배우 또한 그 전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만, 무대 전면에 영상이 투사되는 막이 있습니다. 반쯤 가려진 막 뒤에선 배우는 '목소리' 만으로 여러 가지 성격을 형상화합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기 몸의 부분들을 세세하게 훑어 내려가는데, 이에 따라 몸의 면면이 확대되어 영상에 펼쳐집니다. 마치 내시경처럼 말이지요.
관객들은 흘러나오는 여인의 독백을 듣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눈앞에 크게 펼쳐진 신체의 부분들을 약간은 조심스럽고 약간은 불편하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질환의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은 흔들리는 카메라가 주는 리얼한 감각과 아픔을 참아내는 듯 호소하는 목소리와 어울려 그 다층적 심리를 입체화하였습니다. 끝까지 절제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전달했던 공연은 자칫 난해하고 관념적일 수 있는 작품을 세련되게 표현해주었습니다. 이 역시도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습니다.
다음에 본 공연은 빈센트 맥케인 Vincent Macaigne 의 <햄릿> 이었습니다. 작품이 상연되었던 공간은 수도원(Cloitre Des Carmes) 이었는데, 그 안뜰에 무대와 객석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Au moins j'aurai laisse un beau cadavre" 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는데, "적어도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게 될 것이므로..." 라는 정도로 풀이하면 되겠지요.
극장에 들어서니 공연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수십명의 관객들이 무대를 가득 메우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춤까지 곁들여서 함께 웃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무대는 덴마크와 영국의 국기가 나란히 걸린 파티장 테이블을 배경으로 하는 1층과 쇼윈도의 유리창처럼 전면을 노출시킨 하얀색 컨테이너 무대가 있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 무대의 중앙에는 작은 크기의 묘지 풀장이 있었구요.
서곡이 웅장하게 흘러나오면서 왕과 왕비의 결혼식 장면으로 공연은 시작됩니다. 2층에 마련된 컨테이너의 블라인드 막이 올라가면서 현란한 불빛의 조명으로 강렬한 오프닝을 알리게 됩니다. 고백하건데 조금은 창피하고 난감한 장면이 발생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햄릿>의 캐릭터들은 그 강렬한 개성 때문에 외국 공연이라 할지라도, 햄릿과, 클로디어스, 폴로니어스와 레어티스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허나 이 공연은 초반부터 누가 햄릿이고, 누가 아닌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초장부터 모든 남자 등장인물들은 등장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사연을 토해 냅니다. 마이크를 쥔 인물이 햄릿인가 싶으면, 이내 모두가 마이크에 대고 자기 사연을 쏟아내고, 상대역 또한 지지 않고 언성을 높여 말싸움을 벌이다가 이내 몸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초반부터 정신없고 혼란스런 난장판이 되는 것이지요. 증오의 대상을 향해 복수의 칼을 품고, 너무도 냉정하게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가면서도 한편으로 광기를 가눌 수 없는 인물이 제가 알고 있던 '햄릿'이라면, 맥캐인의 '햄릿'은 애초부터 드러내놓고 광기와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장난스런 유머와 현란한 색감을 곁들여서요.
햄릿은 바나나 복장을 한 삼촌과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다 물속으로 빠져들고, 우위를 점한 바나나맨은 관객을 선동하여 박수를 받더니, 다시 풀에 뛰어들어 햄릿과 수중전을 벌입니다. 이들은 툭하면 서로를 죽이려고 주먹질을 해대고, 목을 조르고, 총을 쏘고, 상대를 잡기위해 뛰어다닙니다. 남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여자들끼리도 머리채를 잡고 싸우며, 폴로니어스는 오필리어의 머리채를 잡고 위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상대의 발길질에 쫓겨 도망간 줄 알았던 햄릿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전기톱을 들고 들어와 위협을 하고 거의 옷이 벗겨지다시피 한 바나나맨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납니다.
이 공연은 작년 서울 연극올림픽의 초청작이었던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무대 중앙의 풀장이라든지, 거칠고 야만스럽게 분한 햄릿이라든지 하는 점이 그렇습니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 역시도 몇 년 전 아비뇽의 초청작품이었지요.) 빈센트 멕케인의 햄릿은 어쩌면 그보다 더 나아가 마치 햄릿의 무대를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어슬렁대는 존재들의 결투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2막에서 벌어지는 햄릿의 극중극은 기존의 역할을 가지고 등장했던 인물들이, 이를 다시 재연하는 방식으로 그 역할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햄릿의 꿈속에서 보이스카우트가 되어버린 클로디어스는 얌전한 아이를 연기하고, 원작의 햄릿에서는 볼 수 없는 과장되고 해체된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제시됩니다.
재미있었던 장면은 햄릿의 왕궁이 관객의 눈앞에서 생겨나는 장면입니다. 공기주입식 세트로 구성된 성벽과 왕좌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등장인물들은 그 위에서 넘어지고, 미끌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관객들은 앞선 장에서 축포장면의 엄청난 양에 놀랐듯이, 이번에는 그 거대한 크기에 놀라게 됩니다. 시종일관 이러한 과장과 그 쏟아지는 과한 이미지에 섬뜩함을 느끼게 되었지요.
빈센트 멕케인은 <햄릿>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원작에서 무게감을 가지고 제시된 강박의 정체인 아버지 유령은 스컹크 모형으로, 왕국의 통치에 대한 부담감은 풍선세트로, 세계를 바라보는 연극관은 화려한 '쇼' 의 형태로 치환되었던 것이지요. 희화화에 대한 열정이 지나치게도 느껴졌지만, 아비뇽의 관객들은 빈센트 멕케인의 새롭고 철없는(?) 도전을 유쾌하게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기분 나쁜 얼굴로 극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원작 흔들기' 의 독창적 방식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대는 듯 했습니다.
이번 아비뇽의 무대에서 제가 발견한 공통적인 표현 방식은 '노래하면서 춤추기(singing and dancing)' 입니다. 배우들은 모두 무대 위에서 혹은 무대 밖에서 노래하고 춤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 진지한 장면에서, 혹은 유쾌하고 신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여지없이 그리 행했고, 관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노래하면서 춤추기라 하면 당연한 연기적 행위마냥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허나 아비뇽 배우들의 노래와 춤은 뮤지컬 배우의 행위처럼 보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드라마를 '연기하는 것' 을 넘어서는(post), 그저 공연의 성격과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거나, 혹은 관객들을 직접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다음날엔 드디어 아비뇽 교황청Cour d'honneur에서 공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Anne Teresa De Keersmaeker 의 무용작 <체제나>(Cesena) 입니다. 우리가 '아비뇽' 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운 '아비뇽 유수' 라는 사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14세기 프랑스 왕권과 로마의 교황권이 충돌하면서,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비뇽에 교황이 머무르게 된 사건이지요. 아비뇽 유수(1309∼1377)가 끝날 무렵 벌어진 "8인 성자들의 전쟁"War of the Eight Saints" (1375~1378)은 교황 그레고리 XI세와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도시 연합 사이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다른 말로 Cesena bloodbath 라고 하는바, 거기에서 '체제나' 라는 제목이 나온 것이지요.
아비뇽 교황청은 이 공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 맥락을 살린 장소 특정적 공연인데다, 해가 뜨는 시간(4:30)에 맞추어 시작하는 시간 특정적 공연이기도 했습니다. '체제나' 라는 역사적 사건은 동틀 녘 아비뇽 교황청에서 무용공연으로 재구성된 것이지요.
공연 설명에 앞서 아비뇽 페스티벌의 상징적 공연장소인 교황청 안뜰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나름의 무게감을 가진 작품들이 상연되곤 합니다. 대극장만한 크기로 개조된 안뜰은 개, 폐막작이 상연되는 곳으로 축제가 시작되고 끝나는 장소입니다. 이 곳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특화하여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상연되거나, 반대로 종교적인 성격을 반어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 패러디로써 작품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널따란 공간의 특성을 살려 규모 있는 무용공연이 올라가기도 하지요.
어둠 속에 파묻힌 아비뇽 교황청 앞뜰에서 중세시대의 성가가 울려 퍼집니다. 그저 실루엣뿐이지만, 무대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무리들이 육성으로써 그 존재감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치 '숭고' 의 시공간으로 초대받는 기분입니다. 게다가 공연을 관람했던 때는 일요일 새벽이라 마치 미사를 드리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현대무용의 난해한 움직임을 예상했던 저는 오히려 시공간의 아우라가 만들어낸 '영성(靈性)' 의 기운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안무가는 무용수들의 몸을 춤추는 육체에서 노래하는 육체로 탈바꿈시켜 놓았습니다. 총총 걸음으로 무대를 뛰어다니는 무용수는 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입니다. 단선율로 구성된 중세의 성가는 인간의 감상용이 아니라 신에게 전하기 위한 노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황청에 함께 모인 관객들은 그 아름답고 성스러운 가스펠에 온통 귀를 빼앗겼지요. 아직 시야가 뚜렷하지 않을 터라 그 청각적 전달이 배가되었던 것입니다.
무용수들은 횡렬로 섰다가 이내 흩어지고, 좌우로 움직이면서 이동합니다. 함께 무리지어 이동하다가도 혼자 남겨져 노래를 부르고, 이내 목소리를 모아 합창하면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습니다. 유일한 시각적 무대기호인 모래로 쌓은 거대한 원은 그 모양이 점점 흐트러져 갑니다.
그날 따라 흐린 하늘 덕분인지, 결국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야가 밝아지면서 흐릿했던 공연이 명료해지는 진귀한 경험을 되었지요. 관객들에게 새벽은 서서히 환해지는 게 아니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빛의 도약이었습니다. 세 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무대 위의 배우들은 여전히 노래하며 춤추었고, 이에 작품은 아침과 함께 관객의 품으로 완전히 도달했습니다. 서광은 없었지만 오히려 회색빛 하늘이 주는 차분함 속에서 이 공연은 영성으로 가득한 예배가 되었습니다.
강렬했던 아침공연의 체험을 뒤로 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10시에 오프 아비뇽 공연, 그것도 인형극을 보았습니다. (아비뇽은 어린이 관객들을 위해서 오전에는 수편의 인형극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이 공연은 대다수의 관객이 성인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바리 부인' 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였지요. '엠마' 라는 여인이 평범한 일상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공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과정을 그 스토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돔 극장이라는 곳에서 상연되었는데, 그 곳은 벨기에 팀의 작품만 전문적으로 상연하는 곳이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갖고 놀법한 크기의 보바리 부인과 다양한 오브제들이 한명의 인형조종수와 함께 모놀로그의 형식으로 전달됩니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섬세한 연극적 표현 등이 한 여성이 몰락하는 과정을 솜씨있게 보여주었습니다. 관객들은 원작을 잘 알고 있었는지 소설 속에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 - 이를테면 결혼식 전날 밤, 바람을 피는 장면, 마차를 타고 가는 장면, 목숨을 끊는 장면 - 에 웃음과 탄식으로 반응하여 주었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작품이었지만, 거대한 규모의 작품 못지않게 묘한 울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아비뇽의 공연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다수의 실내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아비뇽 연극은 대체로 언어극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프 아비뇽의 공연들을 선택하는데 또 하나의 팁은 원작이 있는 작품을 보는 것입니다. 내용을 미리 알고 있으니, 다른 나라 언어로 진행된다고 해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덜할 것입니다.
아비뇽의 무대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베케트, 브레히트는 물론이고 다리오포, 오스카 와일드, 까뮈, 버지이나 울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대 소설가, 현대 극작가들의 작품이 올라갑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체홉의 작품이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의 체홉 사랑과는 별개로 아비뇽에서는 축제 기간 내내 한 작품만 발견했습니다. 공식 초청작 중에는 스트린드베리의 <미스 쥴리>가 두 작품이나 있고, 욘 포세와 장주네, 벨기에의 소설가 탐 라노이에의 작품도 있었지만, 공식행사 중에 체홉은 없었습니다.
공연과 공연사이 윌리엄 포사이스의 설치물을 보러갔습니다. <Unwort> 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안무의 (혹은 무용적인) 오브제들" (Objets Choregraphiques)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었습니다. 고로 이 작품들도 '설치' 이면서 동시에 오브제들의 '무용' 공연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작년 '덧셈에 대한 역원' 이라는 작품으로 미술과 무용의 경계를 허물었던 포사이스 컴퍼니의 한국공연이 떠올랐습니다.
이 공연의 주제는 바로 '문자'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Unwort' 는 독일어로 '단어' 라는 뜻입니다) 오래된 첼레스탱 교회 내부의 나뉘어진 각 구역에는 '문자'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육중한 크기의 옛 영사기를 통해 몇 개의 단어로 된 문장들이 투사됩니다. 그 옆에는 나무 기둥에 새긴 문구들이 문자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지나가면 2층 높이의 거대 점자가 놓여 있습니다. 종이위에 쓰인 문자가 아니라 여러 가지 오브제와 변형된 문자 형식 등으로, 글자들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진열대 위에는 알파벳이 한 글자씩 전시되어 있습니다. "K" 가 하나, "P" 가 하나, "L"이 두 개 "N"이 세 개, "V"가 두 개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문자가 어떤 의미가 아닌 해체된 상태로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의미구현체제로서의 문자가 아닌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지요.
중간테이블에선 두 명의 무용수가 알파벳으로 문자를 만들며 놀고 있습니다. 글자들의 조합을 달리하며 뭔가 단어를 해체하고 완성하지요. "Parole" 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춤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의미전달을 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언어' 라는 개념적 형태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겠지요. 그리하여 포사이스가 보여준 전시 방식은 인간의 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개념과 맞닥뜨리게 하는 문자(오브제)들의 춤이었습니다. 중간 단계를 삭제하고 또 다른 예술 전달의 경로를 개척하는 포사이스만의 미덕이 돋보였습니다.
아비뇽의 공연들은 대개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곽 안에 있는 극장들에서 벌어집니다. 성곽 안의 너비는 쉽게 설명하자면 대략 '대학로' 두 배의 크기를 상상하면 됩니다. 즉, 시내라면 걸어서 갈수 있는 위치에 극장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극장의 숫자도 마찬가지로 대학로 정도로 상상하면 편할 것입니다. 한손에는 두꺼운 오프 아비뇽의 책자를 들고, 한 손에는 포켓사이즈의 아비뇽의 공연장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아비뇽 관객들의 모습이 이곳의 익숙한 풍경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중심가를 관통하는 제일 큰 거리를 좌우로 크고 작은 골목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극장들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습니다.
어떤 공연들은 아비뇽 성곽 안쪽이 아닌 바깥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가까이는 0.9 km 떨어진 곳에서, 멀게는 15km를 가야 나오는 시외 공간에서 상연되기도 하지요. 도저히 걸어서는 가지 못합니다. 아비뇽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 공연을 위해 관객들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버스 정면에 공연명과 장소가 명기되어 있기에, 이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안내를 따르다 보면 극장에 도착하게 됩니다. 외려 북적이는 아비뇽의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외곽의 정취를 구경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었지요.
아비뇽을 벗어나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아비뇽 시내 와 5.5km 떨어진 퐁떼 지역의 아비뇽 강당 Auditorium du Grand Avignon-le pontet 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대형 문화센터 혹은 미술관처럼 보이는 건물 안에 있는 강당이었지요. 여기서 올라간 작품은 Cecilia Bengolea, François Chaignaud, Trajal Harrell, Marlene Monteiro Freitas, Yannick Fouassier 라는 네 명의 무용수들의 공동작품 <(M)IMOSA>입니다.
한 여자가 나와 상의를 탈의하고,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자는 가슴을 덜렁거리며 무대 곳곳을 뛰어다닙니다. 아슬아슬 하의도 곧 벗겨질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의는 튀어나온 남성의 성기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지요.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성기를 동시에 지닌 채 여성스러운 몸짓으로 요염한 몸짓을 수행하는 저 존재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녀는 숨을 고른채 관객의 앞으로 나와 그 질문에 답을 해줍니다. 내 이름은 미모사입니다. "My name is MIMOSA"
작품의 제목을 잘 살펴보면 "M" 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M)IMOSA 의 괄호는 완전한 의미의 '여성' (male)을 말하지 못하는 불완전성을 통해 단순히 꽃의 이름만이 아닌, 그 이름에 걸친 여성성을 오히려 드러낸다는 언어적 유희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괄호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거리낌 없이 여성으로 살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그 여성성을 강조해야지만 여성이 되는, 그렇지만 유쾌한 전복을 꿈꾸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입니다.
미모사는 잎을 건드리면 오므리며 아래로 늘어지는, 접촉에 대단히 민감한 꽃(함수초)이지요. 공연의 맥락을 좀 더 헤아려 보자면, 이 작품은 제니 리빙스턴이 만든 "파리는 불타고 있다(1990)"(Paris Is Burning) 라고 하는 영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기존의 젠더 문제를 다층적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인종문제와 계층 문제를 엮어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가를 다루었던 화제의 다큐멘터리였지요.
후에 주디스 버틀러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젠더는 불타고 있다"(Gender Is Burning)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녀는 그 글에서 연극적 행위와 실천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행성' 의 의미와 '체현' 의 개념을 설명하였지요. 20년 전 다큐 영상에서 나타난, 성적(性的) 경계인들이 보여주는 절박하고 암울한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 여기 무대에서 펼쳐진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고 유쾌합니다. 그들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으로서 거리낌 없이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드러냅니다.
그(녀)들은 '알콜 중독자' 라는 반복되는 가사를 카운터 테너의 발성을 이용해 여성보다 아름다운 소프라노로 노래합니다. 그녀들의 노래는 아름답고 또한 진지하지만, 그 가사는 저속하고 유머러스합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가사이면서 동시에 남자를 갈구하는, 사랑에 관한 노랫말이기도 했지요. 그 춤 또한 특이했습니다. 그녀들이 몸짓은 딱히 발레도, 현대무용도 아닌 요염하고 절제된 동작이었습니다. 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했던 그들은 여성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남성적 육체로 독특하고 자유로운 춤을 선보였습니다. 그녀들은 대개 독자적으로 (혹은 듀엣으로) 춤과 노래를 이어나갔지요.
그(녀)들은 객석에 자신의 옷가지를 미리 준비해놓고, 노출된 공간에서 새로이 의상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녀들이 착용한 무대 의상은 여성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화려한 의상이 주를 이루었지요. 짙은 눈화장과 빨간 입술에서부터 짧고 슬림한 하의,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10센티도 더 되어 보이는 킬힐 등. 그나마 상의는 걸치지도 않고 시종일관 반나체였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양성이 혼재된 그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끊임없이 흥겨움을 더해주었지만, 그러한 수행성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원하는 성(性)으로 다다르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난감하고 괴로운(?) 장면도 있었지만, 미모사들은 끊임없이 객석과 무대를 오고가며, 자신의 끼를 한껏 뽐내었습니다.
이 공연 역시 주된 표현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노래하며 춤추기'가 일관되게 수행됩니다. 생각해보면, 수행성 혹은 공연성이라는 것은, '말하기'(대사)에서 보다 '노래하며 춤추기' 를 통할 때, 그 존재감의 크기 혹은 깊이가 더해지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관객의 입장에선 자기 사연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역동적인 방식인 셈이지요.
공연은 정해진 러닝타임을 한 시간이나 넘어서 지속되었습니다. 다소 난삽하고, 부산했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용기 있고 끈질긴 퍼포먼스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습니다. 네 명의 크로스 젠더 무용수들은 극장의 현관에서 관객들을 배웅했고, 다수의 관객들은 퇴장하면서 악수하고 포옹하면서 흐뭇한 미소로 돌아갔습니다. 저 역시도 가까운 곳에서 그들 존재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보다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아비뇽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그 피로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비뇽의 공연들은 생각보다 거친 구석이 많았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도발적이고 전위적이며, 의외의 부분에서 감동이 오곤 합니다. 예상과는 전혀 달랐지만, <미모사>는 현대의 공연예술이 관념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현실을 증언해주는 것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