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 다시 찾은 아비뇽은 여전히 화창하고 뜨거웠습니다. 공식적인 축제 일정을 이틀 남긴 터라 막바지 분위기가 강했지요. 아비뇽은 축제의 폐막 이후에는 평범한 시골마을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아비뇽이라 괜히 묘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공연 때문에 놓쳤던 아비뇽의 곳곳을 둘러보고자 했습니다. 아비뇽은 공연 말고도 할게 많은 관광도시이기도 합니다. 유적지인 교황청과 성당, 수도원 등은 축제기간 내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지요. 그 공간에서는 음악 공연도 간간이 벌어지는데 아비뇽 관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아비뇽 강가의 다리도 인상적이며 강 건너편에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야영지, 수영장 등도 있구요. 공연 애호가들에게는 예술축제의 도시이지만,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은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아비뇽의 예술학교, "Ecole de Art" 에서는 현대무용가 제롬 벨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제롬 벨은 재작년 남산예술센터에서 <루츠 푀르스터>라는 작품을 선보인 적 있지요.) 전시관에서는 3초, 30초, 3분, 30분, 3시간 이라는 러닝타임으로 구역을 나누어 제롬벨의 작품세계를 짧지만 강렬하게, 혹은 길고 장대하게 보여줍니다. 관객들이 3초와 30초 구역에서 제롬 벨의 위트있는 무용세계를 관람하고 나면, 30분과 3시간 구역에서는 제롬 벨이 담당했던 작품을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상영되었던 발레리나 <베로니크 두아노>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건물의 한 층에서는 이번 아비뇽 페스티벌 포스터에 나온 손가락 이미지를 스케치한 장 뤼크 물렌 Jean-Luc Moulene 의 사진작업도 전시 중이었습니다. "KIFAC" 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엄지 손가락 끝에 또 다른 작은 다섯 손가락이 자란 모습을 하고 있지요. 장릐크 물렌은 르루와와 스티브 팍스턴의 작업들을 촬영하고 스케치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오페라 극장에서 하는 연극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신의 아들의 얼굴 개념에 대하여"(Sur le concept du visage du fils de dieu) 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이 작품은 전위극 연출로 알려진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작품입니다. 그는 <창세기>,<헤이 걸> 등과 같은 작품으로 내한한 적이 있는 이탈리아의 출신의 연출가이지요. 이 작품은 프랑스어가 아닌 이태리어로 공연되었습니다. 3,4시간은 기본이고, 6시간까지도 감행하는 여타의 아비뇽 공연과는 다르게 한 시간 안팎의 짤막한 러닝타임이었습니다. 스토리도 비교적 간단합니다.
일단 오페라 극장 안에 들어서면 관객들은 무대 위에 거대한 예수님의 얼굴 그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경처럼 존재하는 캔버스 앞에 새하얀 인테리어의 거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거동이 불편한 한 노인이 나와 소파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TV를 시청합니다. 직장에서 막 퇴근한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들은 양복을 벗고 아버지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노인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태를 살핍니다. 여기서 공연은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노인이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에 실례(?)를 한 것입니다. 게다가 작은 것도 아니라 큰(!) 것입니다. 물론 기저귀를 차고 있었던 터라, 아주 문제의 소지는 아니었지만,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식과 쓴웃음이 흘러나왔지요. 아들은 괜찮다는 미소와 함께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돌아선 노인은 앙상하고 비루한 육체를 드러내며 기저귀를 갈 때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특수효과인지, 실제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실례의 흔적은 무대 위에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기저귀를 가는 도중, 분비물은 하얀색 소파에 그대로 묻게 되는 것이었지요.
아들은 수건을 가지고 나와 아버지가 흘린 분비물을 정성껏 닦고,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충격적인 장면은 이제야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파에서 휠체어로, 휠체어에서 테이블 의자로, 테이블 의자에서 침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합 4번 실례를 합니다. 얼마나 리얼한지, 무대의 배설물의 냄새가 그대로 객석에 전달될 정도입니다. 눈과 코를 의심해도 무대 위에 그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이쯤되면, 아비뇽의 관객들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몇몇 관객은 헛기침을 하며 요란스레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다수의 관객들은 미간을 찡그린 얼굴로 엽기적이고 황당한 무대 위 인물들의 '행동' 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비뇽의 무대에서는 성행위, 배설 등의 난잡스런 퍼포먼스를 벌인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행위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니, 당혹스럽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어려운 노인은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실례를 하고, 순백색의 무대는 온통 흑갈색으로 물들어 갑니다. 아버지는 연신 '미안하다' 는 말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아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게 됩니다. 그러나 수건을 가지러 간 사이에 아버지가 다시 침대에 실례를 하자, 드디어 아들도 폭발을 하고 맙니다.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지요. 아버지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합니다. 사실, 여기까지 분명한 드라마 구조는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배설과 이를 수습하는 아들의 행위가 반복되면서 오는 느낌은 사뭇 강렬합니다. 처음에는 그 행위들이 희극적으로 느껴졌다가, 이내 비극이 되고 무대 저편의 사건이 아니라 곧 우리가 맞닥뜨려야할 현실로 인식되었으니까요. 우리에게도 부양하고 돌보아야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불쾌하게 느껴졌던 배설물의 존재도 절박하게 다가왔습니다. 무대 위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으로 전이된 것이지요. 관객들은 아들의 인내와 분노에 대해 공감하면서, 아버지의 모습에선 연민을 표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던 아들은 갑자기 무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듯한, 예수님 그림 앞에 가서 - 정확히 말하자면 - 입술 부분에 바짝 다가서서는 두 팔을 앙 옆으로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떨구게 됩니다. 무대 위 현실에서 벗어난 아들의 돌발적인 행동이 놀랍기도 했지만, 객석에 등을 돌린 채 행했던 '간단한' 동작 하나가 굉장한 임팩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듯한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일까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더 큰 반전은 그 이후에 찾아옵니다. 노인이 침대에서 괴로움으로 몸을 웅크리며 울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멀리서 살펴보지요. 몇몇 아이가 하나둘씩 가방을 메고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감상하던 그들은 이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수류탄입니다. 그리고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예수님의 얼굴을 향해 던지기 시작합니다.
앞선 장면들도 그렇지만, 뒤이은 장면도 충격의 연속입니다. 구원의 의미를 떠올리려는 찰나, 신을 부정하는 모양새인 것이지요. 게다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던져대는 수류탄과 그의 굉음은 관객들의 마음을 심난하게 울려대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얼굴을 불에 타고 맙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관객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 뒤로 "you are (not) my Shepherd" 라는 문구가 모습을 드러내지요. '당신은 나의 목자시오' 라는 시편의 문구이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not)" 의 글자가 의미심장합니다. 실제적인 상황과 상징적인 장면, 그리고 문자로 명시된 장면이 어우러진 극적 단계를 지나오고 나서야 관객은 이 공연이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과 파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짧은 작품 안에서 '노인' 문제로 국한될 수 있는 상황을 확장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전쟁과 테러를 연상시키는 아이들의 폭력적 행위는 부자의 무기력한 모습과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지요. 마지막에 타오르는 예수님의 얼굴상과 철골구조로 남겨진 글자들은 삶과 쾌락이 무상한 것이라는 '바니타스' 를 연상케 했습니다. 분명 불쾌감과 황당함을 유발하는 공연이었습니다. 허나 그 거부감을 공감으로 바꾸고, 개인적인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이끌어준 점에 대해서는 실로 찬사를 보낼 만 하였습니다.
아비뇽의 마지막 밤(7월 26일)을 함께할 공연은 교황청에서 상연된 기 카지에 GUY CASSIERS의 <피와 장미>BLOED & ROZEN. HET LIED VAN JEANNE EN GILLES (영어제목 : Blood & Roses. The Song of Joan and Gilles) 라는 공연이었습니다. 작년 아비뇽페스티벌에서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공연을 선보였던 기 카지에는 이번엔 탐 라노예 Tom Lanoye의 소설을 가지고 '잔 다르크' 에 관한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도 역시 아비뇽 교황청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였습니다. 교황청 앞뜰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벽은 대형 스크린으로 탈바꿈 되었고, 밤이 찾아온 아비뇽의 야외극장은 마치 영화관 마냥 어두운 상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 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빌어 온 표현 형식에 있습니다. 무대 전면의 카메라는 무대 앞에 모인 배우들의 모습을 거대한 스크린에 포착하여 보여줍니다. 또한 좌우의 카메라와 하얀 뒷벽은 특수효과 처리를 위한 간이 영화세트장을 연상시켰지요. 고로 이 작품은 교황청의 큰 무대를 외려 '작게' 활용하는 대신, 배우들의 세세한 말과 행동을 크게 증폭시켜 스크린에 송출하는 영화적 방식을 사용합니다. 관객들 역시 무대 위의 배우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대 너머의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 속에 배우들에 집중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실존인물 잔다르크와 그의 부관 질 드레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공연의 앞부분은 잔다르크가 계시를 받고, 마을을 떠나고, 왕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특이하게도 왕과 대신들은 모두 등 뒤에 사람이 업힌 듯한 의상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영웅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권력의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 와중에 잔다르크는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출진을 무시당하고, 처녀를 감별 받는 등 굴욕적인 사건을 감내하게 됩니다. 부관인 질 드레는 안타깝게 잔다르크의 수난을 지켜 볼 뿐이지요. 사실 질 드레는 생소한 인물입니다. 그는 성녀와도 같은 잔의 모습에서 구원을 발견하고 부관을 자처했던 프랑스의 백작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추종자였던 그는 쟌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지고 나서 그 좌절감으로 다수의 아이들을 유괴하여 살해하고, 연금술을 행하는 등 악마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지지요. 공연은 그러한 사실을 극적인 상황으로 각색하여, 재빠른 전개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낀 잔다르크는 군인의 사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에 질은 죽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라며 그녀를 위로하지요. 그러나 결국 쟌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마침내 루앙에서 마녀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질 드레는 쟌다르크가 종교재판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신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된 것이지요.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속성을 반반씩 지닌 이 작품은 영상과 음향,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쟌 다르크의 화형장면을 형상화합니다. 질드레는 실의에 빠져 쟌다르크를 되살릴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악마에게 아이들의 피와 심장, 팔다리를 제물로 바치는 연금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말지요. 결국 질 드레 역시 종교재판에 넘겨져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잔다르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천사(성녀) 혹은 아직은 미숙한 성적 존재인 '어린' 소녀로 그려집니다. 한편, 질이 쟌을 살리기 위해 잡아들이는 것은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대신들과 왕비도 잔다르크의 아이의 순진함, 생명력, 아름다움을 이용하려는 존재로 그려지지요.
이번 아비뇽 페스티벌의 키워드로 "enfant"(어린이)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예술감독인 보리스 샤르마츠의 개막작의 이름도 <enfant>인데다가, 위에서 언급한 카스텔루치의 작품에서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어린아이가 나옵니다. (샤를 황태자의 친족으로 어린 왕자가 등장하지요.) 무대 위의 '어린' 존재들은 그 육체적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주는 상징적 표현으로 풀이될 수 있겠지요. 무대 위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들로부터 오는 환기적 효과와 동시에, '늙어가는' 유럽을 각성시키는 상징적 의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수편의 아비뇽 인-공연과 오프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매시간이 감탄과 경이로움의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하고 멋진 공연들을 만나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보았던 가난한 아랍인들과 집시들, 아프리카인들의 구걸하는 눈빛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축제에서, '세계화 되어버린' 축제로 전락한 아비뇽의 면면도 살필 수 있었고,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세계의 젊은이들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아비뇽에는 연극 애호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연 관객과 휴가 관광객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고, 저와 같은 신출내기 관객들도 참 많았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관광객들도 굉장히 많이 눈에 띄었고,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객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한국은 90년대 중반부터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매년 몇 편 이상의 작품이 올라가고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많은 작품을 아비뇽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참가하는 연극예술가 뿐만 아니라, 한국의 관객들도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요. 한국의 공연예술이 많이 성장한 만큼, 아비뇽에서도 충분한 활약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관람한 아비뇽의 공연들은 미학적 완성도가 어마어마하거나,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대 위' 라는 공간에서 공연예술이 나아갈 수 있는 극한을 체험하게 해주고, 사회적인 문제와 의식적으로 마주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 더욱 강하게 어필되었지요. 그간 막연하게 갖고 있던 환상대신, 공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뭐든지 전폭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아비뇽의 노력을 목격하게 된 기분입니다. 한국도 그에 못지않은 공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으니까, 서로 좋은 에너지와 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요.
이제 드디어 - 아비뇽 공연들의 러닝타임마냥 길고 긴 - 리포트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통해 저를 '한국에서 온 관객' 으로 만들어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세계의 공연예술 무대를 찾아 돌아다니는 기획자들의 발품으로, 그간 한국의 관객들이 진귀한 공연을 보고 있었다는 점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된 사실이었지요. 7월, 아비뇽에서 입에 달고 살았던 프랑스말 한마디로 지면을 끝내겠습니다. 들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Merci beauco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