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닫아놓았을 때 존재감이 드러날까? 열어 놓았을 때 정체성이 돋보일까? 모든 권력이 수양에게 집중되자 그의 사저 명례궁은 대문을 닫아놓을 시간이 없었다. 분경이 전성기를 누릴 때도 문턱이 닳았지만 실권을 거머쥔 요즈음 드나드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바리바리 뇌물을 갖다 바치는 사람, 천기를 누설하는 특급 정보라고 허풍떠는 사람, 잔존 김종서 세력의 비밀이라고 첩보를 제공하는 자, 사람 살려 달라고 구명을 호소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정치는 물론 백성들의 생사여탈마저 그곳에서 나오니 덩달아 부부인의 위상도 높아졌다.
"왕비를 우리 집에 불러 인사받고 싶습니다"야심한 밤. 명례궁. 부부인이 수양의 품을 파고들었다.
"대감께 청이 있습니다.""무슨 말씀이오?""꼭 들어주실 거지요?""들어준다 하지 않았습니까?""왕비를 우리 집에 불러 인사를 받고 싶습니다."수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왕비라 했습니까?""네, 의덕왕비 송씨 말입니다.""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왕비를 우리 집에 부른단 말씀입니까?""왜 안 된다고 미리 예단 하십니까? 별 볼일 없는 송씨 가문의 딸이 어떻게 왕비가 되었습니까? 대감께서 밀어주지 않았으면 지가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었느냐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르기 전에 와서 인사해야지, 배은망덕하지 않습니까?""그런 예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예는 만들어 가면 되지를 않습니까? 왜 이렇게 심약해지셨습니까? 예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능력자라고 믿었는데 실망스럽습니다.""욕심입니다.""욕심이라 하셨습니까?""그렇소."불쾌한 듯 수양이 머리를 돌렸다.
"대감을 하늘처럼 받들며 살아왔는데 소첩을 천박하다 하시니 눈물이 나오려 합니다.""부인을 누가 천박하다 했습니까?""욕심은 천박한 욕기(慾氣)입니다. 대감께서 야망이 있으시다면 소첩은 욕망이 있습니다.""그리 이해하셨다면 미안하오. 욕망이 무엇인지 들어나 봅시다.""우리 아들 둘 중 하나는 보위에 올리고 싶습니다.""큰일 날 소리입니다. 밖에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수양이 김종서를 참살하러 나갈 때 손수 갑옷을 입혀주던 여인이 수양 부인이다. 보통의 여자라면 지아비가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일을 행하려할 때 자신과 자식의 안위를 위해 만류하는 것이 상례다. 허나, 부부인은 머뭇거리는 수양의 등을 떠밀어준 강심장의 여인이었다.
예종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제안대군을 제치고 의경세자의 아들 자을산군을 점지해 성종을 만든 것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일종의 권력배양이다. 자을산군 위로 형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후견세력 없는 군주는 식물임금이라는 것을 절감한 그녀는 실세 한명회를 택해 왕실의 존폐를 의탁했다.
부인은 원래 수양의 배필 후보가 아니었다. 세종은 윤번의 맏딸이 조신하다는 말을 듣고 상궁을 파견했다. 허나, 돌아온 상궁은 첫째보다도 둘째가 훨씬 야무지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마음을 바꿔 둘째를 수양의 아낙으로 맞아들였다. 본의는 아니지만 언니의 신랑감을 가로챈 것이다. 부부인의 의중은 곧 한명회에게 전해졌고 한명회는 임금을 움직였다.
"과인과 중전이 영의정 집에 가서 잔치하고자 한다."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하자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임금이 신하 집에 가서 잔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중전이 간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좌헌납 서강이 반대하고 나섰다.
"수양대군 저사(邸舍)에 행행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 임금이 대신 집에 임하신 일은 간혹 있지만 중궁께서 친히 가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찌 국모로서 가볍게 거둥할 수 있겠습니까? 거두어주소서.""중궁이 친히 가야 수양 부인을 위로할 수 있다.""중궁이 신하의 집에 가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에 예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가시면 됐지 어찌 중궁이 함께 가야만 예라 할 수 있겠습니까?""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돌이킬 수 없다."임금이 중전과 함께 경복궁을 나섰다.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도승지 신숙주, 좌부승지 권남, 동부승지 한명회, 좌승지 박원형, 우승지 권자신, 우부승지 구치관, 판내시부사 엄자치, 환관 전균이 수행했다.
임금의 행차가 광통교를 건너 명례궁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양녕대군 이제를 비롯한 종친과 영양위 정종, 영천위 윤사로, 화천위 권공 등 부마, 왕비의 아버지 여량군 송현수가 미리와 대기하고 있었다. 임금이 대문밖에 이르자 준수하게 잘생긴 젊은이가 정중하게 맞이했다.
"전하! 누추한 소신의 집을 찾아주시니 광영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수양의 맏아들 도원군이다. 이때 수양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 둘째 해양군은 이제 갓 다섯 살이다. 임금과 도원군은 사적으로는 사촌 형제지간이다. 도원군이 17세. 임금이 14세.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는 친형처럼 많이 따랐다. 허나, 그것은 사사로운 일. 현재는 군신관계다.
서청(西廳)에서 연회가 펼쳐졌다. 풍악이 울리고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흥겨운 것 같았지만 예리한 눈빛들이 오갔다. 탐색전이다. 효령대군을 중심으로 한 수양 지지 세력은 외연확대에 열을 올렸고 금성대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 세력은 흘러 다니는 정보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그 자리에 누구 덕에 올라갔느냐...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왕비는 익랑(翼廊)에서 별도로 연회를 주관했다. 왕실의 여자들은 물론 정권실세의 혈족과 차세대 권력자 부인들이 갖은 치장을 하고 맵시를 뽐내는 경연장이었다. 특히 현 왕비와 차기 내명부 수장 후보들이 운명적으로 마주치는 각축장이었다.
"중전마마! 만수무강하소서."먼저 수양대군 부인이 예를 올렸다. 절을 올리는 소매사이로 왕비를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훗날 조선 개국 이래 최초의 수렴청정을 행했던 여걸이다. 예종 1년, 성종 7년. 도합 8년간 그녀는 여왕처럼 군림했다.
"그 자리 누구 덕에 올라갔느냐? 하례는 내가 받아야 하거늘. 네가 받는다는 것이 말도 안 돼. 난 네가 그 자리에서 빨리 내려오기를 기도하고 있어. 암, 빨리 내려와야지..."부부인 윤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사찰과 승려들은 조선을 개국한 성리학자들의 척불숭유 정책에 따라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윤씨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승려를 집으로 불러들이거나 암자에 나가 기도를 올렸다.
뒤이어 경혜공주와 경숙옹주가 예를 올렸다. 말은 없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연민으로 가득 찼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임금. 그 곁에 외롭게 서있는 왕비. 그들을 바라보는 누이와 시누이의 시선은 애잔하기 짝이 없었다.
봉보부인과 윤번의 처가 예를 올렸다. 봉보부인은 임금을 기른 유모다. 왕실법도는 임금의 유모를 내명부 종1품으로 예우했다. 더욱이 엄마가 없는 임금을 친자식처럼 기른 봉보부인을 왕실에서는 각별히 존중했다.
참석한 여인들 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여인이 나섰다. 윤번의 처다. 수양의 장모이며 부부인의 친정어머니다. 사복시소윤 한계미의 처에 이어 마지막으로 도원군의 처가 예를 올렸다. 제일 젊은 여인이며 참석한 여인들 중 자태가 가장 빼어난 여인이었다. 군집한 닭 사이에 한 마리의 학처럼 돋보였다.
"흥, 나이도 어린것이 건방지군, 넌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나라면 모를까."왕비를 바라보는 눈길이 까칠하다. 왕비 15세, 그녀 18세. 그녀는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한확의 딸이다. '나라면 모를 까'에 자존심이 묻어 있다. 그녀의 집안은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미녀 집안이다.
공녀(貢女)로 붙들려간 그녀의 큰 고모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후궁이 되어 려비(麗妃)가 되었고 작은 고모는 선종의 후궁이 되어 공신태비가 되었다. 공출된 조선 처녀가 황제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미모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한확은 누이 덕에 명나라 황실로부터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얻었고 조선의 중국통으로 군림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녀는 수양의 맏아들 도원군과 혼례를 올리고 지난해 아들 이정을 낳은 5년차 부인이다. 그 아기가 훗날 월산대군이고 성종으로 왕위에 오른 자을산군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다.
수양은 용인술이 뛰어났다. 가치 있는 사람은 끌어들여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버릴 사람은 가차 없이 베었다. 그에겐 설득이란 없었다. 설득하느니 베고 수습하는 성미였다. 혼사도 잘 이용했다. 현 정국을 이끌어가는 의정부의 삼정승은 영의정 수양,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이다. 이들은 혼맥으로 엮여 있다. 좌의정의 아들이 사위이고 우의정의 딸이 며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