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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시인 신문호 의사시인 신문호가 “모든 고마운 인연들에게 되갚음의 의미로 이 글을 올립니다”라는 인사말이 붙은 첫 번째 시집 <외로움의 깊이>(시인학교)를 펴냈다
의사시인 신문호의사시인 신문호가 “모든 고마운 인연들에게 되갚음의 의미로 이 글을 올립니다”라는 인사말이 붙은 첫 번째 시집 <외로움의 깊이>(시인학교)를 펴냈다 ⓒ 이종찬

늙고 지루했던 흙담 위
장미의 진한 열기로 장식한 부자연스런 오후
선선한 바람과 푸른 잎사귀들은
다시 만난 세상의 의미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연속되는 망각에서 시행착오는 계속되고
연중행사 같은 삶에도 순서가 생기더니
세월의 부스러기 위에 삶의 기억이 얹혀
또 하나의 층을 짓고 있었습니다.
-57쪽, '기억의 층위' 몇 토막

의사시인 신문호가 "모든 고마운 인연들에게 되갚음의 의미로 이 글을 올립니다"라는 인사말이 붙은 첫번째 시집 <외로움의 깊이>(시인학교)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는 제1부 '어떤 그리움', 제2부 '기억의 층위', 제3부 '외로움의 깊이', 제4부 '약속 없는 기다림' 등 모두 4부에 신작시 80편이 삶과 죽음 그 언저리에서 여러 타래로 이어졌다 끊어지는 인연을 손에 꼬옥 쥐고 이 세상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아침에 하얀 종이 접어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 새로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 어쩌면 백지 유서인 것처럼 말입니다. / 누군가에겐 숨 넘어 갈듯 안타까움으로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 / 나태하거나 마음의 혼탁해짐이 싫기도 하지만 / 힘든 숨길로 애처롭게 남은 당부를 서두르는 / 아픈 이의 눈길이 마음 걸려서입니다"-19쪽, '백지유서' 몇 토막

신문호 시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곧 '백지유서'를 써놓은 것과 같다. "새로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시작하"는 이나 "힘든 숨길로 애처롭게 남은 당부를 서두르는" 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은 애착과 미련을 갖는 것은 "지금의 모습과 기억으로는 다시 대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은 조용히 왔다 가는 것이며, 죽음은 기억에 "잠시 머물다 외로움에 지쳐 흐릿해 / 메아리 없는 이름"으로 "그 누구의 입에 맴"도는 것이다. 까닭에 시인은 삼라만상이 이리저리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 비우기 시작한다. 비워서 홀가분해야 삶과 죽음, 그 경계를 벗어난 "텅 빈 자신을 만나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신문호는 '시인의 말'에서 "어제 죽은 이에게 단 하루가 소원대로 주어진다면, 그는 무엇을 하며 오늘 하루를 보냈을까요?"라고 그가 치료하는 환자들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묻는다. 시인은 "지친 이와 평온한 이, 고통을 안고 이 하루를 마감하는 이가 공존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 이치"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방점을 찍었다.

시인이 찾고자 하는 삶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

신문호 첫 시집  신문호 시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곧 ‘백지유서’를 써놓은 것과 같다.
신문호 첫 시집 신문호 시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곧 ‘백지유서’를 써놓은 것과 같다. ⓒ 시인학교
부대끼며 일어났던 집착들이
평온의 바다를 혼잡스레 흔들더니
남의 마음까지 물들게 한 것이
더 큰 상처들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48쪽, '상처' 몇 토막

'상처'란 시에서는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이에게 시인이 "화가 나서 / 버럭 소리 지르고 우둔함에 대한 편견으로/남의 마음 다치게 한 것" 때문에 지금도 속이 몹시 쓰리다. 시인은 '바둑이'란 시에서도 "쓰는 말이 달라 눈빛으로 얘기하며 살아온 지 여러 해"라며, 바둑이가 "몇 일째 이유 없이 끙끙끙거리고 도통 보이지 않"자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시인이 그 까닭을 알고 보니 "뒷다리의 찢겨진 상처로 심하게 부어 있"다. 시인은 그제서야 "녀석보다 부족했던 나의 무관심에 화가 나서 / 눈 맞추고 사과하며" 바둑이를 끌어안는다.  시인은 이번 시집 곳곳에서 이 세상과 삼라만상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 일순간 오해로 빚어지는 갈등 등을 마음 깊숙이 품는다.

시인은 억새에서 "가을 속 억새는 제 세상을 다시 만나 / 잠깐 새 배운 삶의 지혜"(억새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달빛을 바라보며 "시간들도 달빛에 젖어 / 먼 마실 갔"(달빛 회상)다고 여긴다. 그 '지혜'를 배우는 순간과 시간이 먼 마실 간 그 순간이 곧 시인이 찾고자 하는 삶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이다.

"바람에 숨 막히고 살아감이 힘들고 / 거미줄에 가려진 기억속의 억매임에 / 눈물을 묻고 산 날 참으로 많았지만 / 잠깐 숨 멈추면 있는 자리 바뀌고 / 다음 세상 내 모습 알아보지 못할진대 / 삶, 죽음 그리고 또 다시 살아감 / 한 치의 양보 없이 두 눈을 마주보며 / 마지막일 수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았어도 / 떠나는 이 마음을 얼마나 알겠는가." -71쪽, '세상살이' 몇 토막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살이는 "잠깐 숨 멈추면 있는 자리 바뀌고 / 다음 세상 내 모습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떠나는 이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잴 수 없다. 시인은 그런 까닭에 "외롭고 초라한 생명들의 작은 의미마저도 / 어쩔 수 없는 인연의 사슬"로 여기며 "잠깐 숨 쉬는 영혼들과의 재회에서 / 먼 옛날 / 잊고 지낸 뿌리의 얘기를 나누고 싶"다.

이 세상과 삼라만상을 치료하는 참 의사 시인

선물로 받은 꽃을 앞마당에 심었습니다.
조금 더 오래 같이 하고 싶어서
열심히 물을 주었습니다.

숨소리는 가라앉고
마음은 존재를 떠나
영혼으로 서로를 감싸고 있기에
지금의 이 꽃은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존경하는 당신에게
가슴과 눈물을
무거운 돌덩이로 누르고
돌아서서 드리고 싶은 꽃입니다.  
-106쪽, '카네이션' 모두

시인은 시인을 늘 토닥이던 어머니와 불교에 나오는 '연'(然)을 화두로 삼아 이 세상 사람들을 빗대고, 삼라만상을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란 거울에 비춘다. "어울려 살아감에 / 마음앓이 끝이 없네 / 애초에 없던 것이 / 무슨 업에 생겼는고 / 이 순간 풀 수 없음을 / 내 마음 다 알건만 / 내 스스로 묶어두고 / 벗어나지 못하는가"(매듭)처럼 시인도 그 '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픔만의 운명을 애초에 알았더라면 / 살면서 헤어질 준비도 했겠지요."(만남 그리고 이별), "하루가 지나갔다는 사실에 /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그 의미를 다시 느끼게 합니다."(하루), "가을아침 / 밤새 준비된 이별 / 노란 가랑잎이 또 팔랑거리며 / 길 위에 떨어지고 있습니다."(낙엽) 등에서도 '연'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 '연'은 어쩌면 신문호 시인이 영원히 쥐고 나아갈 화두이자 이 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해'인지도 모른다.

"한곳에 모여앉아 / 고민하고 대화하며 삶을 일구던 이 / 하나 둘 조각으로 떨어져가고 / 함께했던 이야기는 가물거리는 기억에 / 작은 잔재만 남기고 / 세월에 실려 떠나버렸습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는 / 연을 타고 가버린 사연이 그리워 / 먼 곳이 보이는 산위를 올라봅니다." -129쪽, '연' 모두
  
여기서 말하는 '연'은 우리가 허공에 날리는 '연'(鳶)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삼라만상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그 '연'(然)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그토록 삶과 죽음에 매달리는가. 시인 직업이 삶과 죽음을 늘상 맞닥뜨리는 의사이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 깊은 속내는 훨씬 더 멀리 앞서가고 있다.

시인은 병 든 사람을 주사바늘과 수술 혹은 약만으로 고치는 그런 단순한 의사가 아니다. 시인이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손에 든 주사바늘과 수술칼, 치료약은 "사랑은 언제나 추운 빗속에 서서 / 따뜻한 손짓으로 토닥거리고 / 뒷모습의 허전함에 마음 쓰려하면서도 / 안타까운 미련을 미소로 달래"(사랑은 언제나)주는 '큰 사랑'이다.

의사시인 신문호. 그는 온갖 병에 걸려 깊이 시름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뒤틀려 자꾸만 어긋나 더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이 세상과 삼라만상까지 수술과 약만이 아닌 시로도 치료할 줄 아는 참 의사 시인이다. 그는 마치 싯다르타가 성문 밖으로 나가 병든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과 죽은 사람을 본 뒤 29살에 성을 나와 고행 끝에 마침내 도를 깨친 것처럼, 그렇게 시를 쓴다. 그에게 있어서 시가 곧 '도'다.
    
시인 이산하는 "신문호 시인의 첫 시집 <외로움의 깊이>는 특별한 시적 수사나 기교 없이 하얀 배꽃처럼 맑고 단아하면서도 진정성의 향기가 깊이 우러나오는 시"라고 말한다. 그는 "그 향기는 상처로 얼룩진 이 세상의 속살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치유한다"라며  "언제나 작고 낮은 자리에 머물러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그런 넓고 깊은 그늘 같은 시"라고 썼다.

시인 신문호는 1956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91년 의대 교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 위치타주립대 위치타종합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척추수술과 인공관절수술을 하면서 소아마비와 뇌성마비 재활치료학을 공부했다.

귀국을 한 뒤에는 200명이 넘는 중증 뇌성마비 환자들을 진료하며 무료수술을 했다. 시인은 2010년 계간 <문예시대> 신인문학상에 '백일홍' 외 시 4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부산 경희병원 원장(정형외과 전문의)으로 일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외로움의 깊이

신문호 지음, 시인학교(2011)


#시인 신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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