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뭔 볼거리가 있느냐?""몇 번 다녀온 곳을 왜 또 가느냐?"'제 눈에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보는 눈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르다. 자연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그날 그곳에 있던 사람만 보고 느끼게 한다. 그래서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본 곳을 또 찾는다. 여행의 즐거움은 가본 사람만이 안다.
지난 12월 25일은 몽벨서청주산악회원들이 겨울궁전 덕유산으로 눈꽃산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정상의 상고대와 눈꽃이 아른거려 마음이 들떴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탓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승용차를 몰아 경유지인 청주시외버스남부터미널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해 아내와 나는 운전을 교대하려고 차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문이 잠겨 버렸다. 배낭과 카메라가 차안에 있어 갑자기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몸은 욕망이 더 큰 쪽으로 움직인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통영고속도로 인삼랜드휴게소에서 회원들과 합류했다.
발아래 펼쳐지는 눈꽃 세상
무주리조트의 설원은 스키나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알록달록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 덕유산을 산행할 사람들은 탑승료가 왕복 1만2000원, 편도 8000원인 곤돌라 탑승장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요즘은 표를 사고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탑승 번호를 알려준단다. 기상 상황에 따라 운행을 중단하니 무주리조트로 운행 시간과 운행 여부를 알아보는 게 좋다.
덕유산 향적봉(1614m)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봉우리지만 곤돌라가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1525m)까지 운행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10시 20분경, 우리가 탑승한 8인승 곤도라가 설천봉으로 가는 15분 동안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스키장과 하얀 눈가루가 휘날리는 눈꽃 세상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눈 덮힌 하늘 봉우리'를 아십니까
산은 올라봐야 그곳의 날씨를 안다. 특히 추운 겨울산은 더 그렇다. 높은 산을 오르던 전문 산악인들마저 추위를 못 견뎌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곤돌라에서 내려서니 '눈 덮인 하늘 봉우리' 설천봉에 한기를 가득 품은 강풍이 몰아쳐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한다.
덕유산은 국내 최고의 눈꽃 산행지다. 추운 겨울에 더 아름다운 설천봉에서는 눈꽃 세상이 펼쳐진다. 설천봉 레스토랑 등 높은 산에서 만나는 건물의 모습도 특이하다. 끝에는 덕유산 설천이동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지원센터 옆 계단을 오르면 눈꽃 여행이 시작된다. 초입은 미끄러워 아이젠이 없는 사람들은 고생을 한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을 오르는 능선은 서리가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상고대와 아름다운 눈꽃들로 눈부시다. 눈길 주는 곳마다 눈이 덮인 구상나무와 주목이 이어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가 장관이다. 상고대와 눈꽃이 덕유산 정상 향적봉을 '눈 덮인 하늘 봉우리'로 만들었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덕유산 정상 향적봉은 눈꽃세상의 중심이다. 덕유산은 곤돌라 덕분에 쉽게 오를 수 있지만,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기후 변화가 심하다. 눈물이 주르르 흐를 만큼 바람이 차 정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정상을 알리는 표석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정상에서 보이는 사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은 후 간신히 기념사진 한 장 남겼다.
반대편으로 내려서면 지붕가득 눈을 뒤집어쓴 향적봉 대피소(063-322-1614)가 있다. 바람을 피해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추운 날씨라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컵라면이 인기다. 그렇다고 어디 소주 한 잔과 마음이 통하는 후배들이 입에다 넣어주는 과메기 안주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찬바람이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시기한다.
눈꽃을 이고, 삭풍에 굴하지 않는 고사목
눈꽃 산책길은 향적봉에서 중봉까지 높낮이가 없는 고원을 따라 이어진다. 보지 않고 누가 겨울 덕유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말할 수 있을까. 고사목에 만발한 설화, 동화 속 세상으로 안내하는 눈꽃 터널, 큰 산을 넘나드는 눈보라는 한 폭의 그림이다. 새로운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구간이 덕유산 눈꽃 여행의 클라이맥스다.
겨울철의 눈꽃 산행은 걷는 것이 쉬는 것이고, 쉬는 것이 걷는 것이다.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새하얀 눈이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사진가들이 탐내는 좋은 풍경은 길 아래편에 숨어있다. 능선에서 벗어나 곁길을 따라가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눈꽃을 이고, 삭풍에 굴하지 않는 고사목의 기개가 장엄한 풍경을 연출한다.
눈꽃 향연이 중봉(1594m) 바로 아래편까지 이어진다. 중봉은 향적봉과 함께 덕유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다. 언덕처럼 야트막한 중봉의 전망대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1.3km 거리의 향적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산은 높은 곳에서 봐야 제 맛
무릇 겨울산은 높은 곳에서 바라봐야 '설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새하얀 눈이 하늘 아래 눈꽃 세상을 만들었다. 중봉 전망대에 서면 어느 쪽을 바라봐도 설국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등산객들이 동엽령이나 오자수굴 방향의 설원을 향해 무리지어 걷는 모습도 극적이다.
덕유산의 깊은 맛을 알고 싶은 여행객들은 중봉에서 오수자굴과 백련사를 거쳐 삼공리로 내려가거나 백암봉을 거쳐 동엽령 방향으로 산행하면 되지만, 사실 눈꽃산행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아쉽지만 중봉에서 발길을 돌려 향적봉으로 향한다.
추운 겨울 새하얀 눈꽃을 만끽한 하루였다. 청주로 향하는 차안에서도 덕유산의 눈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덕유산 눈꽃은 아쉬움을 달래는 뒤풀이에서도 주인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 '추억과 낭만 찾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