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형규(가명·45·기혼)씨는 자신이 다니던 신용카드 회사가 인수합병되면서 명예퇴직 접수를 공고하자 기다렸다는 듯 얼른 신청했다. 퇴직금도 제법 두둑하고 시기도 좋았다. 자신의 입사 동기들은 퇴직을 할 상황이 아니라며 다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불안정한 회사 상황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기도 불안한 눈치였다.

명예퇴직을 하고 나오더라도 진짜 퇴직이어선 안 되는 나이인지라 다음 일자리가 문제였다. 괜히 창업했다가 퇴직금만 날리는 선배들 사례도 종종 들려왔다. 나이가 어중간해서 어디 새롭게 취직하기도 어렵거니와 급여 조건을 맞춰야 해서 여간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형규씨가 제법 배짱 두둑하게 웃으며 사표를 날릴 수 있었던 건, 다 아내 유선진(가명·40)씨 덕분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의논한 상태였다. 현재 선진 씨는 글쓰기 교사로 동네에서 이름 깨나 날리고 있다. 이제 형규씨가 퇴직금을 받게 되면 두 사람은 동네 인근에 자그마한 독서 및 글쓰기 학원을 개업할 생각이다.

이미 10여 년 전 아이가 4살 정도 되었을 때 형규씨는 매일 계속되는 야근에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렇게 고생한다고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는 회의감이 밀려들었지만 아직 집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유달리 예민한 아이 때문에 아내는 맞벌이를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둘 다 일하러 나갔다간 아들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살림을 도맡아 지출을 최소화하고 아이 돌보는 데 올인하기로 했죠. 남편 직장 업계 특성상 퇴직이 빠르단 건 이미 알고 있었고, 10년 후 정도까지,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게 될 때쯤 제가 돈 벌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로 했죠."

10년 뒤를 꼼꼼하게 준비한 부부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의 한 장면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의 한 장면 ⓒ 폴스타 엔터테인먼트

나름 글쓰기를 전공하기도 했고 회사 홍보팀에서 일하면서 실력도 인정받았기에 선진씨 역시 사회생활도 하고 자아실현도 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아들 양육 때문에 이도저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진씨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나중에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저런 글쓰기 관련 온라인 강좌를 찾아 들었고, 관련 자격증도 따면서 집에서 한 달에 한두 아이만 맡아 독서토론 논술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10년 뒤라 생각하고 준비하는 거라 그리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쉬엄쉬엄 천천히 준비해나갈 수 있었다.

"많이 모아 가르치는게 아니니까 한 아이 한 아이 좀더 정성들여 가르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소문이 좋게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저는 집에서 가르치니까 간식도 챙겨줄 수 있고 해서 아마 아이들 엄마들이 더 안심하고 좋아했던 것 같아요. 혼자라 쓸쓸한 제 아이도 공부하러 오는 애들이랑 어울려 같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해서 좋았구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점차 많아졌어요."

드디어 남편이 퇴직하는 날, 퇴직금으로 그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봐둔 곳에 최소한의 경비를 들여 학원을 열었다. 이 역시 오랜 시간 준비하니 여기저기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천천히 알아볼 수 있었고, 다양한 곳을 시간들여 비교해보고 선택할 수 있었기에 좋은 자리를 비교적 적당한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일을 그만 둔 형규씨 역시 책읽기를 워낙 좋아해서 글쓰기나 독서지도사 과정을 공부하여 2년 후쯤 천천히 합류하기로 했다. 어정쩡한 시기에 어쩔 수 없는 퇴직을 당했어도 두 부부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의논하니 해결점이 도출된 것이다.

'우리 공동의 인생'을 준비하는 결혼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한 장면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한 장면 ⓒ 싸이더스 FNH

재무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부부간의 경제적 소통이 놀라울 정도로 단절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돈 얘기만 하면 싸우게 되어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태반이 서로 수입을 합쳐 공동 살림을 하기보다 따로 계좌관리를 하고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했든 때가 되어 선봐서 결혼했든 결혼한 그 순간부터 부부는 정말 중요한 인생의 동반자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같이 힘을 합해도 그 길이 순탄할 리 없는데 정작 '우리 가족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양가 가족이 있고 둘이 더불어 낳은 자녀가 있다. 따라서 '나'의 인생, '너'의 인생 못지 않게 중요한 '우리 공동의 인생'이 있다.

결혼하면서 형규씨 부부처럼 역할 분담을 나눠맡고 미래를 찬찬히 계획하는 부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편들은 현재의 일이 고되고 힘들더라도 '시한부 고생'임이 확실하다면 참을만 할 것이고, 아내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돈벌이'나 '개인적 자아실현'보다 '자녀 돌봄'이 시급한 것이 현실이다.

아이 돌보는 일을 왜 아내만 해야 하느냐며 남편이 할 수도 있다는 얘기는 접어두자. 누가 하든 둘이서 충분한 의논이 행해지고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또한 어떤 결과가 아니라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임을 명심하자. 30여 년 자신의 스타일대로 살아온 삶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선진씨의 현명한 양보가 한 가정이 겪을 수 있었던 위기상황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엮어나간 셈이다.

아이가 생기면 부부 둘다 나가서 번다는 게 어려워진다. 부부 둘 중 누구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당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린이집에서 아이 돌보는 일을 하느라 자신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맘고생이 심한 서예림(가명·32)씨에게 말했다. "그냥 내 아이를 내가 돌보면 안 될까요."

단순히 돈 버는 것만 생각해서는 현명한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 버는 돈을 어떻게 잘 배분하고 잘 쓰느냐를 결정하는 '살림'이 무너진다면 가정의 건강성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부부 둘이서 연봉 경쟁할 것이 아니라면 이제 역할분담과 미래계획이 건강한 가족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너무도 절실한 시점이다. 무조건 벌고 보자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얘기다.

덧붙이는 글 | 박미정 시민기자는 (사)여성의 일과 미래 재무상담센터에서 경제교육 강사와 재무상담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맞벌이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