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아주 낯선 제목의 책을 꽤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놨습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제목에서 느끼는 따분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랬습니다.
두 달 넘게 책을 펴보지 않아 다른 책들에 눌려 있었던 것은 "정보과잉 시대의 돌파구" "콘텐츠를 걸러주는 인간 필터에 주목하라"같은 카피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책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는지,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다른 책들 아래 눌려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왼손으로 책을 들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책장을 스르르 넘겨보니 글자도 굵고 행간도 넓어 부담이 없어 보였습니다.
<큐레이션>이라는 제목에서 느낀 따분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책을 펼쳐 들고 나서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추천사와 프롤로그를 단숨에 읽고 저녁을 먹기 전에 맨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이라고 평가할 만한 책입니다.
책을 소개하려면 우선 '큐레이션'이라는 책 제목에 대해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큐레이션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가치 있게 구성해 배포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 어떻게 고를까?큐레이션은 아주 낯선 단어였지만, 이 정의를 기준으로 인터넷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곳에서 끊임없이 큐레이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2003년까지 만들어진 데이터량은 통틀어 5엑사바이트(1 EB bytes = 1,000,000,000,000,000,000 bytes)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이틀마다 그만큼씩의 데이터가 새로 추가되고 있으며 이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만들어지고 있고, 결국 사람들은 '사실의 나열'을 넘어 '해설'을 요구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미디어 생산자와 미디어 수용자(소비자) 사이에 새로운 중계자의 역할이 중요해지게 됐다는 것이지요.
미디어 생산자와 수용자를 직접 이어주는 미디어 2.0 시대에서 과잉공급 정보를 걸러내고 신뢰를 높이는 일을 하는 중계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미디어 3.0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정한 자료 속에서 막연한 답을 제시해주는 기계 검색보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할 만한 전문가와 저널리스트이다. … 맹목적인 찬사가 아니라 의미와 희소성 있는 정보를 찾아내어 더욱 가치 있게 제시해주는 '큐레이터' 역할에 대한 기대도 한껏 담겨 있다." (본문 중에서)
인터넷이 시작된 후 불과 30여 년 만에 정보와 컨테츠 과잉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결국 신뢰할만한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DJ의 역할을 큐레이터에 비유합니다. 같은 곡마저 다르게 들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능력 있는 DJ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DJ의 역할은 정확히 큐레이터의 역할과 일치합니다. DJ는 다른 사람이 작곡하고 연주, 믹싱해서 배포한 곡들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니까요." (본문 중에서)
자, 당신도 그럼 저자 스티브 로젠바움이 소개하는 사례를 통해 당신에게도 큐레이터가 필요한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갖고 다니지만, 급할 때는 기기를 뒤지는 것보다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 메일함은 스팸으로 가득 차 있다. 스팸이 아니어도 다 읽어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메일을 수신하고 있다.
▲ 페이스북에 등록된 친구가 너무 많으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따라가기도 어렵다.
▲ 매주 쏟아져 나오는 신간 중에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이 부담이다.
<큐레이션>을 쓴 저자 스티브 로젠바움은 '콘텐츠를 만들기는 쉬워졌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 꼭 필요한 내용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2010년 5월을 기준으로 유튜브(Youtube)에서만 매일 20억 개 이상의 동영상이 서비스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큐레이터가 필요하다 온라인상에서 말하기는 점점 쉬워지지만, 듣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큐레이션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큐레이션을 통해 넘쳐나는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고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 디지털 정보의 양이 급증하면서 양질의 의미 있는 정보 수요는 더욱 절실해졌다." (본문 중에서)과거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던 큐레이션이 이제는 온라인 공간에서 막대한 양의 디지털 정보를 대상으로 폭넓게 이루어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콘텐츠 부족의 시대에서 콘텐츠 과잉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콘텐츠가 지나치게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콘텐츠 이용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화제에서는 상영 프로그램을 큐레이트하고, 웹 사이트는 게시글을 큐레이트한다. 명품 판매 사이트인 길트 그룹은 판매할 상품을 큐레이트 한다.… 큐레이션은 인간이 수집 구성하는 대상에 질적인 판단을 추가해서 가치를 더하는 일이다." (본문 중에서)
즉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 구글 검색 엔진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줄 수준 높은 인력이 필요해졌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RSS와 같은 단순 수집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미 수집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온라인상에서 질 좋은 콘텐츠를 수집·공유하고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를 가치 있게 발행해 소비할 수 있도록 하는 큐레이터가 앞으로 소셜 웹을 주도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 책에는 정보과잉으로 인해 사람들이 큐레이션 된 정보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 과잉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저자는 <리더스 다제이스트>를 소개합니다.
<리더스 다제이스트>를 만든 드윗 윌리스는 많은 양의 잡지를 요약해서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를 압축·요약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31개의 잡지를 압축 요약해 만든 잡지가 최초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견본호였습니다.
큐레이션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타임>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프랑스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했던 드윗 윌리스는 병실에서 미국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문득 읽어야 할 자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다른 독자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잡지 콘텐츠 양이 너무 많아 바쁜 독자들이 다 읽기에는 버겁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사업 아이디어가 싹트기 시작했다." (본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시작된 1920년대에도 이미 콘텐츠의 양이 너무 많아 큐레이션 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잡지는 현재 전 세계에서 1억 명이 넘는 독자를 거느린,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잡지가 됐지요.
또 최초의 뉴스 매거진이었던 <타임> 역시 큐레이션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타임을 만든 헨리 루스는 미국 전역에서 매주 출간되는 기사를 요약해 세계 최초로 '뉴스 매거진'을 발행했다는 것입니다.
"<타임>은 세계의 아이디어와 기사를 미국 독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 모든 간행물을 정독할 시간은 없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할 중산층에게 유일한 정보 공급원 노릇을 했다." (본문 중에서)
24살에 <타임>을 창간한 루스는 처음부터 '설득력 있고, 기사 분류가 확실하며, 명쾌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수집 또는 큐레이션이라 부르는 작업을 지향했습니다. 루스는 바쁜 사람들이 알아야 할 뉴스를 매주 한 번에 읽을 분량으로 압축해주는 서비스로 돈을 벌었습니다.
모두 미국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인터넷이 보급되기 훨씬 전에도 동영상 큐레이터가 있었더군요. 존 왈슨은 TV 수상기를 판매했는데, 방송 전파가 잘 잡히지 않자 1948년 마을 근처 산에 공동 시청 안테나를 세워 최초의 케이블 방송을 했답니다.
"그는 가입자에게 설치비 100달러와 월간 수신요금 2달러를 거두었다. 1952년에는 1만 4000명의 가입자가 70개의 신생 케이블 회사에서 서비스를 받았다." (본문 중에서)
케이블이 방방곡곡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의 방송을 수집해 서비스했고, 수집과 큐레이션에서 제작으로까지 진화한 기업은 후에 컴캐스트(comcast)와 케이블비전(cablevision)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큐레이션은 블루오션이다이들은 모두 막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틈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한 콘텐츠 사업가들이자 혁신가들이었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로젠바움은 오늘날 이런 큐레이션의 기회는 인터넷 공간에서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합니다.
스트리밍고메닷컴(streamingGourmet.com), 수전보일닷컴(susan-Boyle.com) 같은 누리집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만든 수 많은 동영상을 링크하고 분류해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것으로 성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블로그 미디어로 알려진 <허핑턴포스트>의 경우도 역시 큐레이션을 통해 성장한 경우입니다. 또 2000년 미국 대선 때 등장한 <드러지리포트>나 <메디에이트닷컴>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브랜드파워는 큐레이션에 의해 결정 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트위터를 통해서,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을 클릭함으로써 끓임없이 큐레이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훌륭한 식사를 하고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려본 적이 있는가? 휴가 중에 묵은 호텔에서 불만을 느껴 페이스북에 악담을 올려본 적이 있는가? 만약 책이나 영화, 레스토랑, 항공사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글을 웹에 올려본 적이 있다면, 이미 큐레이터로서 웹의 지식에 일조한 셈이다." (본문 중에서)
결국 정보과잉 시대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인간이 검색 로봇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콘텐츠를 수집하려면 최고의 콘텐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바로 큐레이터가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큐레이터의 판단력, 경험, 지식이 총동원 돼 최고의 콘텐츠를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큐레이터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정보 과잉, 콘텐츠 홍수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이 검색을 대신하게 되고, 인간 대 인간이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큐레이터는 단순히 콘텐츠를 걸러내는 사람을 뛰어넘어 하나의 브랜드가 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저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로 인터넷 공간에서 속보성 보다 적시성이 더 중요하게 평가될 것이라 예측합니다. 어떤 정보와 콘텐츠를 공유하기에 적합한 시점을 찾아 큐레이션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검색의 시대는 끝나고 소셜 큐레이션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선언합니다.
덧붙이는 글 | <큐레이션> (스티븐 로젠바움 씀 | 이시은 옮김 | 명진출판사 | 2011.09 | 1만6000원)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 될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