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64)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다.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됐고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을 역임했다.
전두환 정권이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김 상임고문은 1985년 9월 안기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에게 23일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당했다. 이 때의 고문으로 그는 말과 행동이 어눌해지는 파킨스병을 앓게 됐다.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었지만 민주화를 위한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88년 복역을 마치고 나온 그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활동하다 1990년 또 다시 구속됐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고문과도 싸웠다. 김 상임고문과 부인 인재근씨는 남영동 분실 고문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크게 기사화했고 세계의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김 상임고문과 인씨는 이를 통해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했다. 독일의 함부르크자유재단은 김 상임고문을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1995년 2월 수평적 정권교체 실현을 목표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3선에 올랐다.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 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했다. 지난 2007년 당시 유력 대선주자로 꼽혔지만 "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위한 밀알이 되겠다"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08년 총선 당시 도봉갑에 출마했지만 서울을 휩쓴 뉴타운 광풍에 밀려 국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지난 11월 '뇌정맥 혈전증'으로 병원을 찾기 전까지 분주히 거리에서 뛰며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완전수입 반대 촛불집회, YTN 사수 촛불집회가 열렸을 땐 촛불을 들고 나섰다. 올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위한 3차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부산에 내려갔다. 야권통합을 위해 각계 인사들도 만나고 있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지난 29일 면회를 마친 뒤 "3달 전 김 상임고문과 '통합' 문제를 두고 통화를 나눴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