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아래 문방위) 전체회의에서 미디어렙법안이 통과됐다. 여기에 더해 'KBS 수신료 인상안'을 논의하기 위한 소위 구성안도 의결됐다. 형식적으로는 둘 다 '한나라당 단독처리'지만 민주통합당의 공모 내지 방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방위 전체회의를 통과한 미디어렙법안은 '여야 합의안'이다. 지난 연말 민주통합당은 미디어렙법안의 '연내 처리'를 목표로 한나라당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었고, 막판에 가서는 'KBS 수신료 인상안까지 처리하자'는 한나라당의 압박에 직면했다.
'비대위 체제' 정당에 완패한 '민주통합정당'5일 문방위 전체회의가 열리자 한나라당은 미디어렙법안 처리와 KBS 수신료 인상안 처리를 함께 들고 나왔다. 민주통합당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두고, 오전을 넘기기 전에 언론계 안팎에서는 '예상 시나리오'가 떠돌았다.
수신료 인상안 처리에 동의했을 때, 불어 닥칠 후폭풍을 고려할 때, 민주통합당이 쉽게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렙법안 처리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완전히 거부하지도 못할 것이다. 아마도 '수신료 인상 소위구성' 정도에서 동의 또는 암묵적 방조를 해주면서 한나라당에게 수신료 인상의 길을 열어주고, 미디어렙법안을 처리하게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 시나리오는 거의 맞아떨어졌다. 민주통합당 문방위원들은 KBS 수신료 인상안 처리에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했고, 회의는 몇 시간 난항을 겪는 듯하더니 한나라당이 미디어렙법안과 함께 '수신료 인상 소위 구성'까지 단독 처리했다. 미디어렙법안은 오는 10~11일 열리는 본회의 통과만 남겨놓게 됐다.
이렇게 되면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모든 요구가 관철된 미디어렙법을 얻어낸 것에 더해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KBS 수신료 인상안까지 처리하는 꿈을 꾸게 됐다. 수신료 인상은 'MB정권 나팔수' KBS의 숙원 사업을 들어주는 일이자, KBS의 광고를 조중동 종편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비대위 체제의 정당이 이른바 '민주통합정당'을 대상으로 이렇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다니, 대단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여야 합의안'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사실 지금 같은 '꼼수의 시대'가 아니라면 미디어렙법은 언론계나 광고주들 정도가 관심을 가질 사안이다. 미디어렙법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방송 공공성이라는 공적가치가 존중되고, 이해관계자들의 요구가 균형 있게 조절되는 정치사회적 조건이었다면 일반 시민들이 굳이 미디어렙의 복잡한 내용까지 알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MB 시대를 사는 시민들은 FTA에서 미디어렙법까지 모든 중요한 의제들을 감시해야 할 고달픈 처지가 아닌가.
미디어렙(Media Representative)은 방송사의 광고영업을 대행해주는 회사를 말한다. 방송사와 기업이 광고를 직거래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부작용, 예를 들면 방송사가 보도를 미끼로 광고를 뜯어낸다거나 기업이 광고를 미끼로 유리한 보도를 요구하는 등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제도다. 그래서 미디어렙의 취지가 '제작․편성과 광고영업의 분리'이고 이를 통해 방송의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우리의 경우는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유일한 미디어렙이었다. 그런데 2008년 헌법재판소가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KOBACO 독점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고, 새로운 미디어렙법이 필요하게 됐다.
'종교방송·지역방송 지원' 외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부터 방송사들은 물론 정치권의 복잡한 계산이 시작된다. 광고영업이 방송사들의 '먹고사는 문제'인 만큼 몇 개의 미디어렙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어떤 방송사가 미디어렙에 의무적으로 광고를 위탁해야 하는지 등의 쟁점이 생기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운동단체나 야당의 입장은 대체로 같은 방향이었다. 미디어렙의 수는 최소한으로 해야 과당 경쟁을 막을 수 있고, 지상파와 똑같은 편성을 하는 조중동 종편은 광고 직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또 특정 방송사가 미디어렙을 소유하게 되면 광고를 직거래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지분 출자를 금하거나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지역방송과 같은 광고취약 매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등이다. '1공 1민', '종편 의무위탁' 같은 말이 다 여기서 나온 얘기들이다.
그런데 아래 <표1>를 보면, 민주통합당은 '종교방송 등 광고취약매체들에 대한 지원' 외에는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다.
이 표의 의미를 풀어보면 이렇다. 조중동 종편은 앞으로 2년 4개월 정도를 '합법적'으로 광고 직거래할 수 있고, 그 후에는 40% 지분을 출자한(아마도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높은) 미디어렙을 차려 광고 직거래와 다름없는 영업을 할 수 있다. "제작편성과 광고영업의 분리"라는 원칙을 깬 것일 뿐 아니라 종편에 대해서만 제공된 엄청난 특혜다. 조중동 종편은 객관적인 시청률과 상관없이 조폭적 영업으로 '먹고 살 길'을 닦아놓은 셈이다.
SBS는 민영미디어렙에 40%의 지분을 출자해 사실상 자사 미디어렙을 소유하게 되고 광고 직거래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역시 "제작편성과 광고영업의 분리"라는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SBS가 지배하는 미디어렙은 SBS 계열 PP(드라마, 스포츠 채널 등)의 광고영업까지 할 수 있다.
심지어 법안은 경과규정을 두어 SBS가 지난해 11월에 설립한 자회사 미디어렙을 통해 6개월에서 12개월까지 광고영업을 할 수 있게 했다. MBC는 KOBACO를 계승한 공영미디어렙에 의무위탁 되는 조건에서, SBS는 그야말로 '내 세상'을 만난 형국이다.
'누더기' 미디어렙법, 얻는 것과 잃는 것그런데 이 법안을 두고 지난달 말부터 언론운동단체의 입장이 엇갈렸다.
언론노조는 종교방송, 지역방송 등의 입장을 반영해 이런 법안이라도 '연내처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언련 등 시민단체는 '조중동종편 특혜법', 'SBS 특혜법'이라며 반대했다.
법안을 수용하자는 쪽은 '미디어렙법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공백을 틈타 SBS, MBC가 각각 자사 미디어렙을 만들게 되고, 광고시장에서 광고취약매체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면서 '일단 법을 만들고 개정투쟁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쪽은 '미디어렙의 근본 취지를 훼손한 특혜법안을 용인해 주면 법 제정의 의미가 없을뿐더러, 한번 풀어준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의 개정은 제정보다 더 어렵다'고 주장한다. 광고취약매체의 생존 문제는 제대로 된 미디어렙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미진하더라도 특별법 등으로 지원하자는 입장이다.
어떤 쪽이든 미래의 일까지 예단할 수 없으므로, 지금 법안으로 미디어렙법을 제정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부작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표2>를 보면 이 법의 제정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 정도다. MBC가 자사 미디어렙을 설립하지 못하게 하고, 종교방송 등 광고취약매체를 지원하는 것이다.
법안을 찬성하는 쪽은 이것만으로도 법 제정은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법안에 반대하는 쪽은 '조중동 종편의 약탈적 영업 합법화'를 비롯해 법 제정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얻는 것보다 더 크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미디어렙의 원칙'을 지키는 쪽이 '실리'라고 판단한다. 그저 원칙을 고수하는 차원이 아니라 '누더기 법'을 만들어 놓고 개정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조건이 형성됐을 때 명분을 갖고 제대로 법을 만드는 게 오히려 쉽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입장의 차이가 정상적으로 논쟁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연내 입법이냐 아니냐'는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는 데 있다. 어떻게든 법안이 통과되는 것이 유리했던 종교방송 등이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연내 입법 방해세력'으로 몰아붙였고, 언론노조와 일부 언론단체가 여기에 가세해 '연내 입법' 프레임이 공고해졌다.
민주통합당 지도부도 법안 내용과 관계없이 '연내 입법'을 목표로 삼았다. 지난 연말 이들은 언론단체들에게 "한나라당과 더 이상 협상은 없다. 이 법을 받을지 말지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주문했다. 아무리 소수정당이지만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협상 태도였다.
언론노조는 이 법안을 수용하면서 "미디어렙법을 만들지 않으려던 한나라당과 싸워 입법에 나서게 한 것만으로도 성과", "이 법안을 너무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협상이든 시간에 쫓기는 쪽, '이만하면 많이 얻었다'고 생각하는 쪽의 주장은 힘을 받을 수 없다. 한나라당은 '연내 입법'을 최대 목표로 삼은 야당과 언론운동진영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고, 앞서 언급했듯 KBS 수신료 인상안까지 들고 나왔다.
수신료를 1000원 인상하면 그동안 KBS에게 갔던 2천억 정도의 광고가 시장에 풀릴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 부담을 늘여 '정권 나팔수'를 먹여 살리면서 조중동 종편을 위해 광고시장의 파이를 키워주려는 것이다. 즉 국민이 더 낸 수신료가 조중동 종편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밖에도 미디어렙법안에는 '독소조항'이라 할 만한 것들이 더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미디어렙이 정당한 사유없이 방송사업자의 방송프로그램 기획, 제작, 편성 등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데, "정당한 사유 없이"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문제다. 어떤 "정당한 사유"이면 제작 편성에 영향을 미쳐도 되는 것일까?
민주통합당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조중동 종편의 미디어렙 유예기간이 '사업자 선정일'부터인지 '사업자 승인일'부터인지도 몰랐다. 법안에 또 다른 문제 조항들이 있는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국민 돈으로 '조중동 종편' 먹여 살리는 상황,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미디어렙법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미디어렙법 논의는 '수신료 인상안'까지 불러오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민주통합당이 아무리 한나라당에 책임을 넘기려 해도 안 된다. 민주통합당은 '누더기 미디어렙법안'에 합의를 했고, 이 법안의 '연내 처리'에 안달하면서 한나라당이 '수신료 인상안'까지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민주통합당의 지도부와 문방위 위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한편, 민주통합당을 향해 사실상 무조건적인 '연내 입법'을 요구했던 단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현실'이란 이름으로 원칙을 섣불리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