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새로 시작할 즈음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녀석은 대뜸 초등학교 6학년생인 자기 딸이 수학 100점을 맞았다고 자랑했다. 그 비결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자기 아내가 딸 아이를 직접 지도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아내가 학원 강사를 해도 되겠다고 격려했다. 100% 인증을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힘든 초등학교 고학년 수학을 누가 직접 가르칠 수 있으랴?
대신 녀석은 딸아이 영어는 손도 못 댄다고 했다. 그건 친구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친구와 친구 부인은 이과는 따라갈 수 있지만 문과는 젬병이라고 했다. 영어는 더더욱 그런다고 했다. 하여 앞으로 어느 학원에 보내야 할지, 어떻게 영어를 가르쳐야 할지 완전 난감하다고 했다.
이때다 싶어 내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어는 그냥 영어 동화책을 술술 읽어나가면 실력이 늘어난다고 했다. 옛날 대학 시절 히브리어를 배울 때도 노래를 따라 배운 적이 있고, 그 즈음 영어공부도 팝송을 틀어 놓고 따라 불렀는데, 그게 어느 순간 말이 된다는 걸 느꼈다. 내가 자랑하는 걸 약간 고깝게 듣더니만, 녀석은 정작 교재는 뭘로 해야 하냐고 따져 물었다. 사실 초등학교 영어 교재는 오십보백보이지 않던가?
그러나 M. L. 네즈빗의 <그래머 랜드>는 다르다. 초등학생들이 손에 들고 읽어만 나가도 술술 풀리는 영문법 책이다. 이른바 9품사에 관한 이치를 판사와 그 신하들로 구성된 재판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책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어의 품사가 8품사이지만 여기에서는 관사를 품사에 포함시켜 9품사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구본에서 찾을 수 없는 나라 '그래머 랜드'(Grammer Land)는 그 어떤 요청 여왕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지향하는 그래머 판사가 있고, 왕뿐만 아니라 황제까지도 그 판사의 법을 따라야 하나는 가상의 나라다. 그 판사는 그래머 랜드 전체를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단어를 아홉 명의 추종자들에게 나눠줬는데, 그들을 바로 9품사로 부르는 것이다.
9품사는 각기 재미난 친구로서 부유한 명사씨, 명사씨의 친구 대명사씨, 누더기를 걸친 꼬마 관사, 수다스러운 형용사씨, 늘 분주한 동사 박사와 부사, 생기 넘치는 전치사, 편리한 접속사, 가장 독특한 감탄사 등이 그들이다. 그들 가운데 몇 몇이 다른 품사들보다 더 많은 단어를 갖게 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그래머 판사는 그들이 서로 납득하여 화해할 수 있도록 재판을 진행해 나간다.
그 재판 내용은 이런 것이다. 명사 love, grace, beauty, use, home, duty에다 각각 lovely, graceful, beautifu, useful, homely, dutiful처럼 명사 끝에 형용사 어미를 덧붙인 걸 두고, 부유한 명사씨가 수다스런 형용사씨를 절도죄로 그래머 판사에게 고소한 사건이 그것이다.
졸지에 두 손이 꽁꽁 묶인 형용사씨가 이번에는 명사씨를 상대로 고발한다. 그 내용은 또 무엇인가? 절도죄로 형용사씨를 고소한 명사씨도 알고 보니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형용사를 가지고 명사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게 그것이다. happiness, prettiness, silliness, cleverness 등, ness로 끝나는 것들이 실은 모두 형용사에서 차용한 단어라는 점이다.
그래머 판사는 이 고소 고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까? 그는 구문분석 변호사와 비평가라는 경찰들과 현실세계의 독자를 칭하는 '스쿨룸셔'(Schoolroom-shire)의 친구들을 각기 불러들여 토론을 벌인다. 그리하여 형용사씨의 절도죄는 성립이 안 된다고 판결을 한다. 왜냐하면 명사씨도 형용사씨의 것들을 임의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니 둘이 관대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고 법정 진술을 마무리 짓는다.
물론 이 모든 과정 속에 많은 단어들도 나오고 각 장의 마지막에 문제도 나오지만, 스토리 위주로 따라가면 무척이나 재미를 읽을 수 있다. 마치 동화책을 읽듯 손에 놓기가 싫을 정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조금 늦게 출간되어 140년 동안이나 영미권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았다는 이 책은,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에게도 가장 좋은 영문법 친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