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상봉이 성사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기 직전 열린 2010년 11월 상봉 이후 14개월째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김정일 사망 당시 한국 정부가 일반 국민의 방북 조문을 금지하자 북한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영원히 상종 않을 것'이란 성명을 냈고, 이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에서 "도발 시 강력 대응"을 언급한 데 대해서도 '반역패당에게 그 어떤 출로도 없다'고 응답하는 등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 70세를 넘긴 이산가족들에게 냉랭한 남북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다리기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2011년 11월 30일 기준 통일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는 총 12만 8653명이다. 이중 4만 9395명이 사망했고 7만 9258명만이 생존해 있다. 우리 나이로 올해 79세인 상봉 대기자 허아무개씨는 지난해 상봉이 불발된 후 통일부로부터 상봉을 재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이젠 신청자들이 많이들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신청한 사람들이 모두 만나려면 수십 년은 걸린다고들 해서 희망을 거의 접었는데, 통일부에서 그 전화를 받고 그래도 기대감이 다시 생겼어요."허씨의 오빠는 허씨와 함께 신청대기자 명단에 올라있다 2010년 말 세상을 떠났다. 허씨가 1년에 한번 참석하는 동향 모임에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직 상봉자로 선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있을지 모를 가족의 소식을 들어보려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허씨는 브로커가 사기를 치는 게 아니어도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돈이 얼마나 더 들지 모르니 계속 시도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비공식 경로 통한 교류도 줄어사실 허씨 남매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허씨가 1994년 업무 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의 조선족에게 함경도의 옛 집 주소와 조카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건넸고, 이 쪽지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조카의 지인에게 전달되었던 것. 이 지인으로부터 처음 답장을 받은 1996년 이후 허씨와 조카는 중국을 통해 5~6차례 사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허씨의 오빠는 북한 내에서 발각될 경우 아들이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해 친필 편지 쓰기를 거부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번 국경을 넘을 때마다 위험 부담이 커, 허씨와 조카 가족은 이산가족상봉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편지 왕래를 중단했다.
지난 한해 허씨처럼 중개인이나 단체를 통해 제3국에서 편지를 교환하거나 직접 만나는 비공식 교류 역시 크게 줄었다는 것이 통일부 이산가족과의 설명이다. 중개인 중에는 조선족 뿐 아니라 사업상 북한과 관련된 이들도 많으며, 평소 이들을 통해 소규모 접촉이 종종 이뤄졌다는 것.
남북대화무드가 조성된 기간 중에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교류의 여지가 열려있었다. 정부는 이와 같은 민간 부문 교류 활성화를 위해 종류에 따라 상봉 300만 원, 생사확인 100만 원 등 일정액을 정해 지원금으로 지급하고 있기도 하다. 2011년에는 1250만 원이 이 민간교류경비로 집행됐다.
상봉자들에게 지속적인 교류 길 열려야
공식상봉단에 포함되어 가족을 만나고 온 이들 역시 답답한 마음을 달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2009년 북한에 생존해있던 여동생 세 명을 만나고 온 장선숙(74)씨는 당시 대전 내에서 유일하게 상봉자로 뽑혀 3일 동안 전부 5번 만났다. 장씨는 "상봉기간 동안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한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하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못한다"며 행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지막 날 오전상봉 2시간 하고나서 내가 차 창문으로 손 내밀고, 동생들은 통일되면 만나자고 울고 그게 끝이에요. 전화 통화나 편지 왕래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이건 일체 단절이요, 단절."공식상봉행사를 통해 만난 상봉자들이 교류를 지속하려면 상봉 대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제 3국을 거치는 수밖에 없다. 상봉자들 역시 고령인 만큼 다시 소식을 들을 가능성이 낮아 한 번 만남 이후 더 큰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장씨처럼 상봉행사 변화나 후속 조치를 호소하는 상봉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이 공식적인 경로로 교류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마련에 대한 필요성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남북관계 선결 과제로 다룰 것"정부는 이미 여러 차례 "이산가족상봉은 남북관계에서 최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2009년 처음 북측에 제시한 '고령 이산가족 고향방문'은 상봉방법을 다각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령자 위주로 방문단을 구성해 고향이 가까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들이 함께 북한의 해당 지역을 방문하도록 하자는 것. 자리가 마련됐을 때 바로 논의의 물꼬를 틔우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다양한 방안을 더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
당분간은 이산가족상봉문제에서 분명한 진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 역시 김정일 사망 이후 연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허씨와 같은 이산가족들에게는 지금의 긴장된 남북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안타깝다. 인터뷰 말미, 허씨는 작은 바람은 나타냈다.
"이런 얘기 한번 누구한테 털어놓고 나면 며칠을 편히 못자요. 너무 그립고 가슴이 아파서. 전 그래도 편지라도 주고받았지, 다른 사람들은 60년 넘게 살았는지 죽었는지 일체 몰라요. 주위엔 살아선 전혀 못 만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북한에도 우리나라 정부에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왜 없겠어요. 워낙 다른 나라인 건 알지만, 편지왕래라도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