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사업이 누군가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그 이익만큼의 손해를 보는 쪽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손해를 보는 쪽은 항상 힘없는 약자들이라는 것도 재개발의 공식처럼 돼 버린 현실에서 국가기관을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것은 거인 골리앗에 맞선 다윗이 이기거나,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뜨리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한 마을에서 그것도 두 번씩이나 주민들이 일심단결해 승리를 얻은 곳이 있다. 또한 그 원동력을 멈추지 않고, 마을공동체를 건설한 지 올해로 13년째인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마을과 이웃' 공동체를 1월 10일 찾아갔다. - 기자 말
IMF경제위기로 국가와 서민경제가 바닥으로 추락했던 1998년. 청학동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됐다. 그 당시 15평형의 연립주택과 빌라의 가격이 2300만 원이었는데, 감보율 적용으로 주민들은 1500만 원의 개발부담금을 내야 할 처지에 몰렸다. 사업지역 내 15평 미만의 연립주택과 빌라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빈곤층 주민들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몇몇 주민들이 주동자가 돼 나섰다. 당시의 선전구호는 '알립시다, 모입시다, 뭉칩시다, 먼저 알고 있는 분들이 나서야 합니다'로 당시 주민들의 긴박함이 깊게 느껴진다. 주민들은 곧바로 '청학동주민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집행부를 선출했다. 1년 2개월에 걸친 투쟁방식은 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합법적인 방식을 줄곧 유지했고, 다양한 항의시위와 민원을 제기한 끝에 여론을 집중시켰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주민들은 49억 원의 개발 잉여금을 확보해 전국 최초로 개발이익으로부터 소외된 서민들에게 부과된 과다한 청산금을 우선적으로 탕감하게 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싸움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주민들은 철도청(현 코레일)의 수인선 건설사업의 철로가 청학동을 관통해 지상부로 건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는 수인선 지상건설반대시민협의회를 결성해 4년 6개월에 걸쳐 싸웠다. 이번에도 주민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다양한 항의시위를 통해 의사를 표현했고, 결국 마을을 통과하는 철로를 지중화 방식으로 지하에 건설하겠다는 공식 발표를 이끌어냈다.
포기하지 않은 주민들... 성과를 이뤄내다
토지구획정리사업 반대에는 연인원 8800여명, 수인선 지상화반대에는 연인원 3만8000여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주민총회, 서명운동, 피켓시위, 도보시위, 궐기대회, 3보1배 행진, 항의방문, 공청회, 보도자료 배포를 비롯해 정치권에도 해결을 촉구하는 등 주민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적법한 방법으로 풀뿌리주민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토지구획정리사업투쟁을 주민들의 염원대로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남게 된 자투리땅은 자신들의 이익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마을 전체를 위해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내놓게 되면서 '청학동 마을공동체'가 탄생하게 되는 기쁨도 누리게 된다.
마을공동체의 터전이 마련되기까지의 역사적인 기록이 담긴 사진 영상은 애끓는 배경음악과 함께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당시 주민들의 눈물어린 투쟁의 날을 보여준다. 영상을 보는 동안 지난해 35미터 높이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을 살아서 두발로 내려오게 만든 희망버스가 떠올랐다.
이 둘의 공통점이 있을것 같은데 무엇일까? 모두가 숨죽여 본 영상이 끝나자 머릿속을 빙빙 돌던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단결한 '연대의 힘'이었다.
청학동 마을공동체 '마을과 이웃'의 윤종만(52)대표는 당시 투쟁을 하게 된 이유를 말했다.
"당시 토지구획정리사업의 감보율 36.5%를 자신의 땅으로 내놓거나 돈으로 내놔야 했다. 토지를 가진 이들은 공출(供出)을 하더라도 재건축으로 재산을 늘릴 수 있지만, 소형주택에 사는 이들은 개발이익으로 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 서민들의 주거권을 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보고, 부당하게 봤다." 땅을 가진 지주들에게는 개발이익을 통해 건물이 지어지고 부가 축적되는 사업이었지만, 공동주택에 사는 가난한 서민들은 제집에서 쫓겨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윤 대표를 비롯한 대책위의 집행부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자'며 지주들을 설득했고, 결국에는 주민들 모두가 바라는 대로 지주들이 동의하고 자신의 몫을 양보했다. 주민총회를 통해서 가장 어려운 사람부터 감면 혜택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했고, 공동주택은 100%, 단독주택은 50%를 감면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부당 감보율 철회운동은 감동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남은 시비지를 팔아서 돈을 덜 낼 수도 있었는데 주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합의해 남은 땅에는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공부방이라도 만들자고 한 것. 덕분에 지금의 건물을 짓게 됐고, 그것이 마을공동체 운동이 피어나게 된 배경이 됐다.
건물이 완성된 뒤에도 필요한 집기들을 주민들 스스로 채워넣고, 폐지와 고물을 팔아서 생활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공부방 운영에 보태라며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내놓는 등 지금의 공부방이 자리를 잡기까지 주민들의 정성과 노력들이 함께 했다. 덕분에 무보수로 일하는 집행부도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고 한다.
지역신문에 주민들의 활동이 보도되면서 자원봉사와 후원자들이 찾아오고, 마을공동체에 관심있는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12명의 자원봉사 교사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20명으로 늘었으며 3년 이상이 되면 교장선생님으로 위촉을 한단다. 이들 자원봉사 교사들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기도 하다.
공부방을 대안학교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어
마을공동체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손가정이나 맞벌이로 집집마다 아이들이 방치되는 가정이 많았다.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부방이라도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려운 이웃들의 마음과 삶을 보살피는 것이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방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윤종만 대표)옆에 있던 주종모(60) 수석부위원장은 뭔가 떠올랐는지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마을공동체를 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들려줬다.
"마을공동체 왜 하느냐고 했을 때 처음에는 괄시받기 싫어서 했다. 다른 동네에서 우리를 '없이 산다'고 우습게 보고, 관공서에 가도 괄시 받았다. 감보금 투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괄시받지 말자, 하지만 그것을 투쟁방식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들이 작은 일부터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마음들이 하나하나 모여 마을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생각으로 프로그램도 없이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책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한두 명씩 아이들이 늘어나자 마을로 이사 온 현직 교사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3개월간 예비학교 과정을 통해 문제점들을 개선하면서 정식으로 개교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 나는 일들도 많았지만, 주민들은 교사들의 열정에 감동 받았다고 한다.
공부방은 자부담만으로 운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2004년부터 연수구에서 예산을 지원받기 시작했다.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우선으로 받고 있으며 정원은 40명이다. 많지는 않지만 차상위계층에 속하지 못한 아이들 중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돌봄을 하고 있다. 윤 대표는 "중장기 계획으로 공부방이 대안학교로 돼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어서 의논하고 있다"며 "올해부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반딧불 학교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농촌 두레 공동체가 바로 여기 있다
마을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후원금과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행사 때는 어른 2000원, 아이들 1000원의 회비를 받고, 큰 행사를 치를 때는 참여하는 주민들이 비용을 보탠다고 한다. 청학동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는 골목길시낭송, 클래식음악회, 마을보물찾기, 풍물공연 등이다. 특히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53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느티나무와 함께 하는 마을이야기'에는 많은 주민들과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만큼 이 행사는 청학동의 상징적인 축제가 됐으며 올해는 마을합창단을 구성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다양한 마을축제를 진행하면서도 상근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관공서의 지원 없이 자원봉사로 나선 운영위원들이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행사 준비를 시작하면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서 치러낸다고 한다. 마치 과거 농촌의 '두레 공동체'와 같다.
윤 대표는 마을공동체는 단순히 과거의 마을을 되살리는 복원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주체적인 자기 존재의 발견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가족과 이웃의 삶 터를 바꾸고 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의 문제들과 환경, 교육, 여성, 노인, 아이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마을공동체라고 한다.
마을에서도 이웃 간의 다툼이 생기면 마을공동체를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때 마을공동체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재를 해 관계를 회복시킨다고. 그만큼 주민들이 마을공동체를 주민들이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13년간 마을공동체가 유지된 이유일 것이다. 갈수록 이웃 간의 각박함이 심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마을공동체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덧붙이는 글 | * 감보율 : 토지 구획의 정리에 따라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개인의 땅이 줄어드는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