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고군분투 중오후 3시의 커피숍에는 언제나 고적감이 감돈다. 혼자 책을 읽는 사람들, 혼자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들. 그들은 거대한 우주 속의 행성인 양 외로운 자전을 계속하고, 시간은 끝없이 그들을 비껴서 흘러간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이제 다수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화두가 됐다. 물질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모든 것에서 윤택해짐과 더불어 각 개인은 점점 개인화되고 원자화되어, 보다 외로움에 직면해야 하는 세상에 처했다.
물론 외로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딘지 부정적으로만 여겨지는 외로움이지만 때로 이것을 창조적 발상의 근원으로 삼는 '자발적 왕따'들에 의해 고독은 긍정적으로 변한다. 스피노자, 에디슨, 괴테,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의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구자들은 외로움과 기꺼이 동행하며 그 외로움을 창조적 발상의 출구로 연결시켰고, 그들이 이룬 업적은 후세들의 삶에 편리와 도전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지금은 우리가 찬양해 마지않는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같은 종교사상가들도 당시에는 기득권층의 배척과 탄압을 받으며 외로움의 고행을 택한 '왕따'들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의 사상과 업적을 존경하며 기꺼이 본받으려 하지 않는가!
그와 달리 최근 교육에서 문제시 되는 '왕따'는 외로움을 악용한 극악의 형태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 집 한 자녀'가 일상화 된 지금, 외로움을 감당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은 집에 들어서도 맞아줄 가족이 없어 게임에 중독되거나, 누군가와의 대화를 그리워하며 채팅 삼매경에 빠지거나, 타인을 외롭게 만드는 왕따의 쾌감에 자신의 외로움을 잊어가고 있다. 또한 왕따를 당하는 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하소연할 상대가 없으니 외로운 고투를 거듭하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래저래 외로움에 대처하지 못한 사회적․ 가정적 원인이 이 같은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에 그 심각성은 날로 커지고 있으며, 외로움에 대해 우리가 보다 섬세히 연구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하고 있다.
우리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 동일한 관점을 가지면서 외로움을 잊어보려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로움은 누군가와 함께 함으로써 극복되거나 채워지는 감정은 아니다. 왜 외로운가를 자신에게 반문하지 않은 채 그저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외로움을 한 곳으로 몰아낼 수는 있어도 근원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충분한 내면적 대화를 통해 외로움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개인적 성찰을 이룰 계기로 삼는 것이 외로움에 대처하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언론이 '왕따'의 심각성을 보도함과 동시에 소위 '집단 따돌림방지법'이 도입 돼야 한다는 대중적 여론을 이끌어냈지만, 그러한 제도적 움직임 못지않게 사회와 가정에서 인문학적 분위기를 이끌고 사회 구성원이 어릴 때부터 사유와 성찰의 힘을 길러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낳은 경쟁과 '빨리 빨리'가치가 팽배한 지금. 누구도 외로움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외로울수록 그 외로움에 더욱 적극적으로 맞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외로움을 근원적으로 발전시킬 방안은 없는가?' 이것은 보다 자기 관리가 잘 된 성인이라 할지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이며, 그러기에 외로움을 이겨내는 체계적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이뤄져야 할 필요성도 있다. 또한 그것은 인문학적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느리고 오랜 시간 품을 들여 자신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에서도 비롯된다.
현대 문명 속 외로운 군상들의 새로운 관계 맺기일본 여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 <안경>은 고독에 대면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일상의 번잡함에 질려버린 여주인공이 찾아간 남쪽의 어느 바닷가. 이른 아침에 눈 떠서 조용히 아침을 먹고 해변에서 메르시 체조를 한 후, 해가 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세상과 자아에 젖어드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일과다.
물론 때때로 기다림의 연속인 낚시를 하거나, 바다를 바라보며 노곤한 봄날의 공기를 한 올 한 올 뜨개실로 떠내는 과정을 통해 자아와 만나기도 한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관계 맺기에 공들이지 않는다. 고향, 나이, 직업 등 현실에서 우리가 '관계'라고 여겨지는 매뉴얼을 서로 묻는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냐고 반문하며, 그러한 요소들이 오히려 더욱 관계를 단절시켰음을 일깨워준다.
보다 활자화된 많은 것들을 보길 원하는 현대 물질문명의 개인이었던 주인공은 그곳에서의 휴가가 끝날 쯤엔 자신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보다 많은 것을 보도록 하고, 그럼으로 인해 보다 많은 것을 취하게 하며, 결국엔 다수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길 촉구한 매개체인 안경이 바람에 날려가 버려도 이제 불안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의 내면을 더욱 섬세히 바라보게 해 줄 자아의 안경을 쓰고 다시 바닷가 마을로 돌아온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