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벌(伐)의 뜻 |
"秋九月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 加兮城省熱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因加兮之津."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 중 한 대목이다. 644년 9월에 선덕여왕이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의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 일곱 성을 치게[伐] 했는데 크게 승리하여 가혜의 나룻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이 대목의 '伐'은 '공격하다'의 뜻이지 결코 '멸망시키다'의 의미가 아니다. |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벌휴왕이 185년 2월에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에게 군대를 줘 조문국(召文國)을 쳤다(伐)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두고 의성의 고대국가 조문국이 이때 멸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 등장하는 '쳤다'가 조문국을 '멸망시켰다'는 뜻인지, 아니면 조문국을 눌러 '이겼다'는 의미인지는 알기 어렵다. '伐'이 꼭 '멸망시키다'의 뜻으로만 쓰이는 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는 조문국에 대한 언급은 이것이 전부다. 조문국이 언제 세워졌고, 어떤 왕들과 국가적 사건들이 있었으며, 멸망은 언제 무엇 때문에 했는지 등은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옛날 역사책에도 조문국 기사는 없다. 조문국의 서울 일대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금성산 고분군에서 350∼400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왕관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리 간단한 약소국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는 고대국가 조문국. 여전히 수수께끼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벌휴왕 기사는 185년 무렵 의성 지역의 이름이 조문국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증언해준다. 그 이후,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문국'은 '조문군'으로 이름이 바뀐다. 조문국이 결국은 신라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문'이라는 이름만은 없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673년에 문무왕이 '조문성'(城)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통일신라가 남긴 걸작 의성탑리5층석탑의 처음 이름도 '조문탑'이었다.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 직후에 나온 경상북도 의성군지(誌)에도 '조문'은 면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조문 국민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조문군은 다시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뀐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중국식으로 지명(地名)을 바꾸는 조치가 취해질 때 그렇게 됐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함께 '영남 4대루'로 일컬어지는 문소루(聞韶樓)가 고려 중엽 의성땅에 세워진 것도 고을의 옛날 이름이 문소군이었기 때문이다. 문소군에는 안현, 비옥, 단밀, 진보의 4개 현을 뒀다. 지금 의성군 소속인 다인은 당시 상주에 속했고, 옥산과 단촌은 고창(지금의 안동)에 속했다.
최치원이 붙인 '강주'라는 이름도 전해지고
세월이 흘러 신라 말, 최치원이 문소군에 머무른다. 그가 머무른 곳은 빙산사와 고운사이다. 춘산면 빙계 계곡의 빙산사(氷山寺)는 뒷날 조선 태종이 없애버려 지금은 절터와 5층석탑(보물 327호)만 남아 있다. 그러나 신라 고찰(古刹)의 멋이 잘 간직되어 있는 단촌면 구계리의 고운사(孤雲寺)는 지금도 변함 없이 솔숲 속에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다만 '高雲寺'(고운사)였던 절의 이름이 최치원의 호를 따 '孤雲寺'(고운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최치원은 그보다 뒤인 904년에는 해인사에 머무르게 된다.
최치원은 문소군에 머물면서 의성 일대에 강주(剛州)라는 고을 이름도 남겼다. 강(剛)은 '굳세다, 곧다, 단단하다'는 뜻이다. 즉, 최치원이 문소군에 머물면서 고을 이름으로 '강주'를 지어준 것은 그만큼 의성 지역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옛 문헌에서 최치원을 찾아보면 그가 '剛州 氷山(강주 빙산)'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문소군 또는 강주로 불리던 의성 일대가 '義城'(의성)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초의 일이다. 의성은 지금도 경상북도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지리적으로 볼 때 당시에는 세상의 중심지였다. 고려와 후백제, 신라가 다투고 있던 그 무렵, 의성 일대는 군대의 이동 등 전쟁의 논리에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문소군은 고려의 장수 홍술이 지키고 있었다. 본래 문소군의 성주였던 홍술은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왕건을 지지했고, 이미 고려의 장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지리적 요충인 의성 일대의 중요성으로 볼 때, 견훤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929년, 견훤은 5천 명이나 되는 대군(大軍)을 이끌고 문소군을 공격해 온다.
앞에서 견훤의 군대를 5천 명이나 되는 '대군'으로 표현했다. 당시의 5천 군사를 현대에 견주면 몇 명 정도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와 백제의 인구를 각각 70만 호(戶) 안팎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참조해서 짐작해보자. <구당서>의 숫자는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등 각 나라의 자료를 조사한 다음에 통계를 낸 결과일 테니, 그렇다면 당시 삼국의 인구는 대략 500만 명쯤 된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를 5천만 명으로 보면 그 10배, 그렇다면 견훤의 5만 명의 군대가 의성에 쳐들어온 셈이다.
왕건, 문소군 성주 홍술 장군을 기리다
현재 의성 인구는 약 6만 명이다. 따라서 홍술 장군이 견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홍술은 전사한다. 왕건은 "나의 팔이 떨어져 나갔구나"하고 애통해 하며 홍술에게 김씨(金氏) 성을 하사(下賜)하고, 그를 의성군(義城君)이라 높여 부르게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건은 940년(태조 23)에 문소군(郡)을 나라 안에 10곳밖에 없는 부(府)의 한 곳으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홍술 장군을 기려 의성부(義城府)라 부르게 한다.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 42∼43쪽 |
신라에서 중국식 성(姓)씨가 사용된 것은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부터이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지역을 다시 신라가 빼앗아 당항성이란 서해안의 항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된 이후 신라는 중국과 활발한 외교관계를 가졌다. 이때 신라는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왕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던 성씨를 칭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왕을 김씨로 하고 왕비의 성씨를 박씨라 했던 것이다. | 고려 중기까지 우리나라 사람의 대부분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계백' 장군이라 부르지만 '계'가 그의 성이고, '백'이 이름인 것은 아니다. '계백'은 그저 그의 이름이나 별호(別號)일 뿐 성씨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같은 대장군의 성씨마저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고려 중기까지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에게 성씨가 없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고구려와 왜를 오가며 내물왕의 두 아들, 즉 눌지왕의 두 동생(402년에 왜에 볼모로 간 미사흔, 412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간 복호)을 구출하고 장렬히 죽은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그 대신 '김제상'이 나온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박제상'과 '김제상'은 같은 인물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신라에 성씨가 처음 생긴 것이 '신라의 광개토대왕'인 진흥왕(眞興王, 540~576 재위) 때이기 때문이다. 본래 이름이 삼맥종(三麥宗)인 그는 외교문서에 서명(署名)을 하면서 성씨가 없는 것은 문제라고 판단, 김(金)씨를 창씨(創氏)하고, 문서에 '金眞興'(김진흥) 세 자를 적었다.
진흥왕이 성씨를 '金'(김)으로 한 것은 '金'(김)이 곧 '금'이기 때문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도 '(황)금' 궤짝에서 나왔다. '금'은 '최고'의 보물인 것이다. 왕족의 성씨를 정하는 일이었으므로 진흥왕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金'(김)을 성씨로 채택했는데, 광물을 부를 때는 "금"이지만 성씨일 때는 그와 달리 "김"으로 부르게 했다.
따라서 왕건이 홍술 장군에게 '김'씨 성을 하사한 것은 최고의 귀족으로 대우하는 일이었다. 왕이 하사한 성씨를 가지게 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홍술은 특히 진흥왕의 성씨인 김씨를 받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義城'(의성)은 고려 초부터 시작된 의성 지역의 이름이다. 의성군이 '의(義)로운 쌀'이라는 상품 이름을 만든 것도, <의성 관광> 홍보책자에 '義(의)와 禮(예)의 고장'이라는 표어를 내건 것도 모두 고려 초의 역사에서 유래(由來)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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