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날치기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새해 벽두부터 한중FTA 망령이 농촌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 9일 개최된 한중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FTA에 비해 5배 이상의 농업 피해를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과의 FTA 국내 절차를 개시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언은 한마디로 통상정책 수립에 있어 농업과 농민은 정책적 고려의 대상에도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주었으며, '통상 독재'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미 농민단체들은 "이명박 정부가 한미FTA로 한국 농업에 사형선고를 내렸고, 한중FTA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며 울분을 표출하고 있다.
한중FTA 농업 피해, 한미FTA 피해보다 2~5배 심각그럼, 한중FTA와 MB 통상정책의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선 한중FTA는 막대한 농업피해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농업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한 협상이라는 점이다.
한중FTA로 인한 농업 피해에 대한 국책 연구기관들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료공개를 거부하고 있으며,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도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언론을 통해 일부 유출된 국책 연구기관들의 연구 내용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언론 보도(<한국일보> <연합뉴스> <노컷뉴스> 등)에 따르면, 국내 경제연구기관들은 한중FTA 체결에 따른 농업 피해가 한미FTA보다 2~5배 수준이나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중FTA 체결로 2020년 기준 농업생산액은 2005년 대비 약 20%까지 감소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연간 최대 3조3600억 원의 농업생산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은 전 품목에서 관세를 50% 감축하는 방향으로 한중FTA를 체결하면 농업 부문에서 쌀 2조447억 원 등 총 2조7722억 원의 소득이 감소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한미FTA에 따른 피해액의 3.4배 수준이다.
이같이 한중FTA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 이유는 '중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농산물 생산 구조, 재배 품종이 우리와 거의 유사하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많이 수입되지 않았던 신선 농산물도 수입 가능하기 때문에 시설채소나 과채류에도 직격탄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산둥성 인근에 한국 시장을 겨냥한 고품질 과채류 농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어 그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 수입하는 고추(270%), 마늘(360%), 양파(135%), 생강(377.3%), 참깨(630%), 땅콩(230.5%), 인삼(754.4%) 등의 작물에 매기는 고율의 관세가 FTA로 사라지면 국내 농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중FTA뿐만 아니라 정부가 현재 타결 또는 진행 중인 전 세계 70여 개국과의 FTA를 보면 싱가포르, 걸프협력회의(GCC)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농산물 수출강국이다. 이는 MB정권이 일방적인 농업 희생만을 강요하는 통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국회의 '피해분석' 자료제출 요구에도 '불가' 입장만
둘째, 피해 당사자인 농민의 의견은 수렴하지 않았고, 농업피해 분석보고서조차 공개하지 않는 독단적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역대 FTA(한-칠레, 한-EU, 한미 등)의 공통점은 FTA로 인한 피해 당사자인 농민들의 이해와 요구가 전혀 수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한중FTA 국내 절차 개시 과정 또한 농업계의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되었으며, 협상과정 또한 그럴 것이 분명하다. 국내 절차 과정에서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한다고 하지만 과거 전례로 볼 때 요식행위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농업 피해를 우려해서 협상 개시를 하지 않거나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중FTA 농업 피해에 대한 국책 연구기관들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도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참여정부 당시에는 그나마 협상 내용에 대해 국회의원에게 비공개 열람 정도는 허용하는 수준이었으나 MB정부 들어서는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비밀주의'가 당연시되고 있다. 이해 관계자와의 협의는 사라졌으며, 피해분석 보고서조차 공개하지 않는 '독단적 협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통상관료에 대한 견제세력, 검증 시스템이 없다. 현재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70%에 육박할 정도로 통상 분야는 우리 국민 경제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분야다. 또한 통상의 영역은 국제법적 지식과 외국어 능력 등을 수반하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며, 협상 과정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이에 대한 접근도 어렵고 정보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비밀주의가 관행화되어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민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통상협상 과정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비준 여부를 판단하고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국회조차 통상전문위원회는 물론이고, 전문위원 한 명 없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지금껏 국회는 협상 과정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협상 결과만 놓고 '거수기식' 투표를 통해 비준 여부를 결정하는 수준에 머물러온 것이다.
국민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통상협상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올 총선과 대선을 통해 한국의 정치를 바꾸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정권교체로 일방적 농업 희생을 전제로 한 통상협상을 중단하거나 폐기해야 하며, 국회 물갈이로 행정부의 통상협상에 대한 국회의 견제력을 확보하고 검증 시스템을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값싼 외국 농산물을 사다 먹는 게 더 이익 아니냐는 낡아빠진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의 하나인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을 농정 철학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국민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농정으로, 농업정책의 대전환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
덧붙이는 글 | 이호중 기자는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기획팀장입니다.